엘리는 문득 그 아찔하고 정신없던 그 순간들이 그리워졌다. 끝도 없어 보이는 컨벤션 홀 안에서 분주히 뛰어다니는 사람들, 모든 것을 담아가리라는 듯한 의지가 담긴 듯한 눈빛으로 여기저기를 살피고 귀를 기울이는 해외 게스트들, 옹기종기 모여 각자의 목적을 위해 눈빛과 대화를 나누는 무리들. 그리고 그 들이게 무슨 도움이 필요할 지 살피는 각 잡힌 단정한 유니폼 속의 컨벤션 홀 직원들. 마치 다시 못 돌아갈 옛 연인과의 추억이 가득했던 시절을 떠올리 듯 아련해졌다. 생각지도 못한 전염병이 그녀의 업무환경과 생활을 이렇게까지 온통 뒤 흔들어 버릴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인하우스 VS 프리랜서
통번역대학원을 졸업 한 후 통번역사들은 인하우스, 즉 상근 통번역사로 기관에 소속되어 경력을 쌓은 뒤 프리랜서로 전향을 한다. 기관에서 일하며 자신과 맞는 분야를 알아가는 과정을 거치기도 하고, 그 분야에서의 반복적인 통번역 업무를 통해 실전 감각을 쌓고 난 후, 바다와 같은 프리랜서의 삶으로 뛰어드는 셈이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시간당 비교적 높은 페이를 받으며, 조직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벗어나 일할 수 있다. 물론 개인의 성향에 따라 기관에서 안정적으로 상근직으로 근무하는 이들도 있고, 근무했던 분야에서 권고를 받아 전직을 하기도 한다. 통번역일을 하다 관심이 생겨 전문 자격증을 따기도 한다. 기업에서 통번역 업무를 하다 서로 합의가 되어 직원으로 다시 입사한 인하우스 통역사도 있었고, 계약서 등을 번역하다가 법에 관심이 생겨 로스쿨에 진학해 변호사가 된 케이스도 있다.
엘리는 프리랜서로의 삶을 꿈꿔왔다. 자유로움과 불안전성의 공존 가운데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야 하는 무게감을 기꺼이 감당하고 싶었다. 영어를 수단으로 전 세계와 소통하며 지내고 싶은 마음이 통역사가 된 가장 큰 이유였고, 한 기관에서 수십 년 같은 일을 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 두번 째 이유였다. 엘리는 대학 졸업 후 1년 가까이 준비해서 공기업에 입사했다. 부모님은 기뻐하셨고 안심하셨다. 백 대 일이 넘는 경쟁을 뚫고 입사했지만 그녀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매일 똑같은 일을, 순환 근무를 한다지만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들과 생을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이건 순전히 성향의 문제였다. 엘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4년 가까이 일을 한 후 짧은 결단의 시간 뒤, 부모님도 모르게 사직서를 내고 (이 부분은 부모님께 여전히 죄송한 엘리다) 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 친구에게 ”미친*, 어쩔려구 그래?“ 소리도 들었던 그 때를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났다.
줄줄이 취소된 통역일정
2020년 1월. 새해를 맞은 엘리는 설레였고 한편으로는 결연하기까지 했다. 인하우스 통역사의 시절을 보내고 2019년 괜찮은 에이전시들과 계약을 맺었다. 순차 통역, 부스 동시통역 일정 등이 잡혔다. 요청받은 일이 너무 많아 오히려 거절한 일정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 달 동안 일주일에 한 두 차례의 일정으로 이전에 기관에 받았던 월급보다 더 많은 페이를 기대할 수 있었다. 다이어리에 일정을 채우면서 체력만 키우면 되겠구나 생각했다. 지난 주 3일 동안 통역 일정 후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그런데 코로나 뉴스가 들려왔다. 신종 감염병. 전 세계에서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 소식이 들려왔고, 돌연 온 지구가 갑자기 멈추었다. 특히나 코로나가 시작된 아시아 지역은 방문 제한국이 되었다. 에이전시로부터 날아온 일정 연기 메일들이 쌓였다. 그렇게 갑자기 엘리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그래 잠시 쉬어가는 것도 괜찮지 뭐. 좀 쉬자’ 그렇게 생각하며 지냈다. 그런데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 때 까지도 괜찮았다. 석달 째가 되니 저금해 두었던 돈을 계속 쓰는 것이 부담스러워지기 했다. 몇 년차 베테랑 동시 통역사들도 일이 없어 프리랜서 지원금을 신청한다는 신문기사와 통역사 커뮤니티 속 암울한 이야기들을 읽고나니 불안감이 그녀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공무원이었던 부모님과 다른 가족들에게 코로나는 조심해야할 전염병이었지 생계에 타격을 주는 존재는 아니었다. 반대가 두려워 모르게 퇴사를 감행했던 엘리는 그들에게 민폐를 끼치진 않을까, ‘그러게 공기업은 왜 그만둬서,,,,,,‘ 식의 질타를 받을까 두려웠다. 무엇보다 엘리 그녀가 사랑해서 선택한 그녀의 존재와도 같은 일이 사라지는것은 아닐 까 몹시나 두려웠다. 혼자 끙끙 속을 끓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렇게 코로나 블루를 겪었다.
화상회의 통역
세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소통해야했다. 그래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재택근무와 더불어서 화상회의로 각종 국제회의 들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에이전시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엘리는 화상으로 통역을 다시 시작했다. ZOOM, Microsoft Teams, Cisco Webex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사용하여서 통역을 진행했다. 위기상황이 올 때 인류는 연대하며 한층 더 진보하는 구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음에 그저 감사했다. 그런데 컴퓨터, IT쪽으로는 고개를 내두르며 바보처럼 멍했던 엘리다. 한글과 워드 프로그램만 겨우 사용하던 그녀. 엘리는 진보해야했다. 아니 그녀에게는 진화 수준이었다. 강력한 보안이 필요한 업체에서는 Cisco Webex를 사용하고, 지금 근무하는 IT회사에서도 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 외에는 ZOOM Microsoft Teams등을 사용했는데 다양한 툴에 익숙해져야 했다.
동시통역을 할 때 부스에 있을 때면 오로지 화자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통역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신경을 쓴다. 사실 이것만도 머리에 지진이 나는 듯한 과정이다. 그런데 화상회의 동시통역은 그야말로 혼이 나갈 듯 정신이 없다. 회의장에서 청중은 리시버(Receiver)를 착용해서 통역사의 말만 들으면 된다. 그런데 화상 회의상 에서는 모든 음성들이 섞여버리니 영어 청자와 한국어 청자를 구분해서 음성이 들리도록 설정을 하고 시작한다. 통역사는 한국어에서 영어로 통역할 때는 영어 청취버튼을 누르고 통역을 하고, 영어에서 한국어 통역을 할 때는 한국어 청취 변환 버튼을 눌러가며 통역을 해야하는 것이다. 혼란하다.
(사실, 전달이 중요하거나 중요한 협상에서는 동시통역보다 순차통역으로 진행되는데 중간에 필요에 따라 회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 정보 전달같은 경우는 동시로 진행되기도 한다.) 한 번은 통역을 한참 했는데, 영어청취 버튼을 누르지 않아서 했던 통역을 다시 한 적도 있다. 진땀이 흐르는 순간들은 화상회의에서 더하면 더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처럼 인터넷 인프라가 좋지 않은 국가에서 참여한 화자가 있으면 음성이 중간에 끊기기도 한다. 그녀도, 처음 화상회의를 진행하는 세계 모두 같이 성장하고 있었다. 그렇게 처음 겪는 판데믹 속에서도 소통하고 각자의 일을 해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줌 피로(Zoom Fatigue)에 시달리기도 했고, 시차 때문에 예상 못한 시간에 일을 해야 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라도 그녀가 사랑하는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미국 스탠퍼드대 제레미 베일런슨 교수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줌 피로'의 원인을 규명한 논문을 미 심리학협회 학술지 「기술, 정신, 행동」에 게재했는데, 한 화면에서 여러 사람과 동시에 마주 봐야 하는 상황이 뇌에 부담을 줘 피로도가 상승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집에서 화상회의를 할 때면 하의는 트레이팅 복을 입고 있어도 되고, 회사나 행사장에서도 정장과 구두를 차려입어야 하는 수고로움 또한 덜수 있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이 있었다. 통역의 환경이 바뀌긴 했지만 화상회의로 오히려 더 넓은 분야의 더 사람들이 모일 수 있게 되었고 엘리의 일은 계속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다시 회사에 들어가 일하고 있는 엘리이다. 프리랜서는 아니지만 자기 일만 열심히 잘 해내면 어느정도 자유로운 IT업계 문화를 경험 중이다. 페이퍼 리스(Paperless)회사로 프린터도, 복사기도 없이 노트북만 사용하는 것이 그녀에겐 또 하나의 적응해야 할 업무 환경이었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환경을 경험할 수 있는 직종이 얼마나 될까‘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회사 직전에 근무했던 국가 기관에서는 한 차례 회의를 위해서 수십 장의 문서를 참여 인원별로 테이블 위에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엘리에게 그 간극이 몹시나 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며칠 전 같이 일하는 개발자 한 분이 한 말이 떠올랐다 “여기서 통역 오래 하시던 분 개발자로 전향하신 분 있으세요. 한번 도전 해 보시는 것은 어떠세요?” 생전 처음 보는 C언어에 눈이 어지러운 요즘. 답답해서 코딩을 공부해 볼까 생각한 적은 있지만 전직을 고려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엘리는 흠짓 놀랐다. ’통역사에서 개발자라니.......요즘 억대 연봉으로 모시기 바쁘다는 개발자라는데 어디 한번 도전해봐?‘ 잠시 3초정도 생각해 봤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지금 그녀의 일이 참 좋다. 여전히 코로나는 진행 중이고 대규모 국제 행사가 개최되기는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들이 다시 모일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현장 속의 그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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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순수국내파 통역사로 먹고살기’를 썼습니다. 영어와 한국어로 세상과 세상, 언어와 언어사이의 소통을 도우며 살아가며, 세상과 사람에 도움이 되는 글을 쓰기도 소망해봅니다. 아이들과 학생들이 재미있게 영어를 익히도록 하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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