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필리아(Biophilia).
생명을 뜻하는 단어 ‘Bio‘와 좋아함 또는 교감을 나타내는 단어 ‘philia’의 조합어이다. 나는 이 단어를 ‘우리 유전자에는 생명 사랑의 본능이 새겨져 있다’고 말하는 에드워드 윌슨의 책 <바이오필리아>에서 처음 접했다.
두 시간을 내달려 도착한 포천 국립수목원 주차장에 들어서며 한번, 부슬비 아래 우산을 들고 수목원 입구 쪽으로 걸어가다 또 한 번 이 단어가 떠올랐다. 원시림이 보존된 광릉숲 대자연의 기운이 ‘국립수목원’이라고 단정하게 쓰인 입체조형물 뒤로 묵직하게 펼쳐지는데, 와.. 여기 우리나라 맞아? 우리나라에 이렇게 웅장한 숲이 있다고? 갑자기 거인국에 도착한 소인이 된 것처럼 고개를 한껏 들어 주변을 둘러보던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렇게 마음껏 자라 아름드리 한 나무를 본 게 언제였지? 내가 바라던 곳이 아마도 여긴 것 같아. 비 내리는 4월의 어느 오후가 갑자기 근사하게 밝아지는 느낌인걸.
나는 왜 수목원을, 정원을, 자연이 있는 곳을 그렇게 찾아다니는 걸까. 표면적으로야 앞으로 내가 만들어갈 정원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자는 목적이 있지만 사실 더 깊은 마음은 따로 있었다. 진짜 살아있는 생명을 마주하고 싶다는 마음, 인간과 동물, 식물에 둘러싸인 삶이지만, 함부로 대하고, 버리고, 훼손하는 대상으로서의 생명이 아닌, 서로 맞물린 조각이 역동적인 전체로 연결되는 생명력을 만나고 싶었달까. 자연 속 생명 있는 것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내는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고 순환되는지 그 비밀이 많이 궁금했다. 분리와 이별, 포기가 난무한 위기 가정 지원 현장에서 오랜 시간 누적된 피로가 생명력에 대한 갈증과 녹색을 찾는 마음으로 나를 이끌었나 보다.
포천 수목원은 조선 제7대 왕 세조의 능이 있는 광릉숲이 보호구역으로 지켜지다 88올림픽에 ‘광림 수목원’으로, 1999년엔 우리나라의 최초 국립수목원으로 지정되면서 지금의 ‘포천 국립수목원’이 되었다. 왕릉이 있던 주변이라 오랜 시간 사람의 손을 덜 타도록 보호되었다는 설명과 지금도 하루 방문객을 3500명으로 제한해 예약제로 운영된다는 설명이 어찌나 반갑던지. 그렇게 원시림과 인공림이 잘 조화된 수목원 안으로 이끌리듯 들어섰다.
국립수목원은 550년이 넘은 광릉숲을 기반으로 조성된 수목원이라 그런지 곳곳이 숲처럼 느껴졌다. 도심에서 만나던 땡볕 아스팔트 위 이쑤시개처럼 가늘게 꽂혀있던 나무들과 땅에 들러붙은 듯 낮은 키로 표면만 채워버린 화단 꽃들에 익숙했던 눈이 갑자기 사방으로 광활하게 확장된 자연의 공간 앞에서 어디에 시선을 둘지 분주해졌다. 오랜 시간이 빚어낸 성숙한 교목과 아교목, 관목과 초본류, 지피식물이 골고루 층위를 채우며 밀도 있게 빚어낸 여러 개의 숲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수목원은 어디를 먼저 둘러봐야 할지 고민이 될 만큼 깊고 넓었다.
야광나무, 너도밤나무, 전나무, 참나무, 잣나무, 독일가문비나무, 구상나무, 측백나무, 메타쉐쿼이어를 비롯해서 처음 보는 나무들이 정말 많았다. 각각의 나무가 그려내는 고유한 수형과 색감, 다양한 질감과 볼륨이 어우러지는 수목원 외곽 풍경을 볼 때면 아름다운 실루엣 애니메이션 ‘프린스 앤 프린세스’가 생각나기도 했다. 이 나무의 수형이 원래 이런 모양이었어? 이 나무가 키와 두께가 이렇게나 클 수 있다고? 아니, 우리 동네 공원과 아파트 단지에서는 왜 얘를 맨날 둥그렇게 이발을 시킨 거지? 이렇게 자연스러운 자태가 나오는 관목인데 꼭 그렇게 정형화된 모양으로 찍어내듯 복제해야 했냐고.
암석 정원, 여름 정원, 소리 정원, 이끼 정원 등 30여 개의 테마정원으로 꾸며진 수목원 전체를 자세히 돌아보려면 반나절로도 모자랄 듯하다. 우중산책이고 오후 시간 방문만 예약한 터라 부지런히 걸었는데, 깊은 숲 안으로 연결된 길에서는 혹시나 길을 잃을까 싶어 돌아 나오기도 했다. 이렇게 거대한 자연에 들어선 게 얼마인지, 아무 것도 책임질 필요 없이 거대한 자연 시스템에 나를 맡기기만 해도 되는 이 안온함이 얼마 만인지 그냥, 마냥 행복했다.
요즘 한국에서도 숲 정원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국내에는 아직 숲 정원을 떠올릴 때 손꼽아 가볼 만한 곳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숲은 나무만 빽빽하지 나무와 땅 사이의 공간을 채우는 다양한 관목과 초화류의 식재가 부족한 상황이다. 숲은 그저 피톤치드를 받고 나물이나 약초를 캐러 가는 어르신들의 공간일 뿐, 다양한 층위의 식물들이 어우러져 풍성하고 아름답게 빛나는 성숙한 정원이 될 수 있단 걸 많은 이들이 아직까지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숲을 채운 교목이나 아교목 아래 기지개를 편 수백 송이의 수선화 무더기를 본 적이 있는가? 봄을 활짝 열어제끼며 숲 속에 생동감 넘치는 색을 더하는 튤립이나 크로커스를 본 적이 있다면, 어떻게 숲이 정원이 될 수 있는지, 그 숲은 또 얼마나 깊이감이 있을지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숲 정원과 반대로 요즘은 단시간에 완성할 수 있는 정원들이 각광을 받는 것 같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 종류의 꽃이 끝도 없이 심어진 넓은 들판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이 인스타그램을 도배한다. 양귀비를 비롯해 코스모스, 장미, 핑크 뮬리, 해바라기, 아네모네, 천일홍 그 수도 헤아리기 힘들 만큼 다양한 꽃들이 지자체 대표로 선발되어 관광객 맞이에 일생을 바치는 요즘이다. 이런 곳을 정원이라 불러야 할까, 그냥 포토존이라 불러야 할까. 그런 사진을 볼 때마다 헷갈린다.
물론 군락을 이룬 꽃이나 나무가 건네는 경외감과 감동이 있다. 엄청난 사이즈의 자연이 압도하는 느낌은 그 자체로 인간 안에 단단히 웅크린 어떤 철벽같은 걸 무장해제 시키는 힘이 있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이런 포토존이 전국적으로 번지는 것이, 이곳을 다녀간 이들이 정원의 개념을 그렇게 납작하게 새겨갈까봐 반갑지만은 않다. 이제 막 정원에 눈을 뜨고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배우는 초보 가드너로서, 인간의 계산과 통제 아래 만들어져 한 철의 사진 배경으로 소비되는 꽃밭이 아닌, 생명력을 전염시키며 인간과 깊은 교감을 나누는 자연의 품이 얼마나 너그러운지 경험해 보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단조롭고 일률적인 정원이 아닌 천혜의 자원이 그대로 살아있는 깊은 숲이 품어내는 정원은 훨씬 더 생태적이고 지속 가능하다. 몇백 년 그 자리를 지킨 웅장한 숲을 걷는 것만으로도 움켜쥐었던 주먹이 스르르 펴지거나, 내 문제에만 천착해 있던 좁은 시야를 벗어나 인생 전체를 바라보는 지혜를 얻는 경험을 한다. 포천 국립수목원은 크기가 가늠이 안되는 하나의 거대한 숲 정원이다. 너무 넓어 지도를 가지고 천천히 둘러봐야 할 만큼 다양하고 아름다운 그곳은 보물찾기 하듯 둘러봐야 진가를 맛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에는 숲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도록 숲 해설 프로그램을 이용해 볼까 생각 중이다. 사계절의 변화를 꼭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국립수목원, 내 안의 바이오필리아를 깨우러 매 계절 찾아가고 싶다.
세 번째 정원 여행을 하면서 느낀
- 하나, 정원이 시간이 완성해가는 예술품이구나.
- 둘, 오래된 숲의 생명력은 또다 경외감으로 다가온다.
*글쓴이 – 이설아
작가, 글쓰기 공동체 <다정한 우주>리더, 정원이 있는 시골 민박을 준비하는 초보 가드너. 저서로는 <가족의 탄생>,<가족의 온도>,<모두의 입양>,<돌봄과 작업/공저>,<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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