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이를 안고 잠에 드는 것은 위험하다. 바깥 세상은 가짜가 된다. 일을 하러가야 된다거나,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등의 모든 현실적인 사고가 마비된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서로를 향해 기꺼이 무너진다. 여기엔 우리 둘 밖에 없다. 죽어도 좋으니, 이대로 시간이 영원히 멈추어버렸으면 좋겠다.
모든 구원의 순간에는 언제나 사랑이 존재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구원의 주체는 사랑이다. 누군가를 진심어린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고는 그를 구할 수 없으며, 반대로 구원받을 수도 없다. 예수는 인간을 사랑했기에 대신 죽을 것을 택했고, 이로 인해–성경에 의하면-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않았는가. 이러한 신의 사랑 말고, 인간이 만들어낸 예술작품에서도 <사랑에 의한 구원>이라는 테마는 종종 등장한다.
* 아래 내용부터는 영화 <성스러운 피>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 인생이 고통뿐이던 한 청년이 있다. 그는 서커스단에서 일하던 피닉스다. 눈앞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그러니까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고 끝내 아버지마저 자살하고 마는 끔찍한 일에 정신착란증세를 겪다가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채 정신병원에서 살아간다. 그런 그에게도 잊지 못할 사람이 한 명 있다. 바로 서커스단에서 같이 일했던 언어장애와 청각장애를 가진 알마라는 여자아이었다. 서커스단에서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주었던 사람이 바로 알마였기에, 그는 정신병원에 갇힌 채 알마를 계속해서 그리워한다.
언젠가부터 그는 죽은 어머니의 환영을 보기 시작한다. 어머니의 환영은 그를 예전 서커스단이 있던 쪽으로 이끌었고,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사람들을 하나 둘씩 제거하도록 요구했다. 나중에는 그가 조금이라도 감정을 품었던 여성들을 다 죽이도록 조종하기까지 했다. 그는 졸지에 사람을 수차례나 죽인 연쇄살인범이 되어 죄책감에 몸부림을 친다. 예전에 서커스단에서 코끼리가 죽었을 때에 조차도 목청이 터져라 울었던, 몹시 여린 사람인걸 생각해보면, 트라우마가 만든 환영 때문에 스스로 살인을 자처한 데에서 오는 죄책감이 어느정도일지 예상해 볼 수 있겠다. 원치않는 일을 계속해서 해야만 하는 것, 모든 일상을 지배하여 삶을 갉아먹는 것, 그에게 트라우마는 이런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피닉스에게도 구원의 순간이 찾아온다.
알마가 피닉스를 찾아온다. 옛날 그 모습 그대로 그 둘은 서로를 꼭 껴안는다.
“너, 날 멀리 데려가려고 온 거지?”라 묻는 피닉스의 말에 알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구원의 순간이다. 드디어 피닉스에게 죽어도 좋으니 이대로 영원히 멈추어버렸으면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피닉스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알마에 손에 이끌려 어딘가로 향한다.
피닉스가 보아온 모든 것은 가짜였다. 어머니의 환영은 각목인형이었으며, 널부러진 시체는 이불더미가 둘러 쌓인 것일 뿐이었고, 그 많던 서커스단 직원들은 모두 피닉스가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이제 알마와 피닉스는 가짜를 불에 태운다. 피닉스의 삶을 갉아먹는 모든 것은 이제 없다. 그의 트라우마는 한줌의 재로 변하여 공기 중에 흩어졌고, 그 순간, 피닉스는 눈물을 흘리며 알마를 꼭 안아준다. 모든 것이 가짜라는 걸 용감하게 알려줄 만큼 피닉스를 사랑한 사람은 알마 뿐이었을 테다. 알마는 피닉스를 지옥에서 구해냈다.
난 모든 사랑이 구원이 될 수는 없겠지만, 모든 구원은 사랑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믿는다.
사랑은 진실을 가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모든 걸 이해하도록 만든다.
알마가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래서 피닉스에게 “네가 보는 세상은 가짜야!”라 소리칠 수조차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닉스는 알마에게 이끌려 진짜 세상을 본 것처럼.
사랑은 현실을 외면하게 만들 때도 있지만, 때로는 삶을 살아가고 싶게 한다.
피닉스에게 알마가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아마 스스로 삶을 포기했을 것이다. 부모님들은 ‘자식 때문에 산다’라 말하고, 연인들은 ‘너 없이는 못살아’라 말한다. “너만 있으면 돼”라는 말은 진짜다. 사랑하는 이만 있으면 삶을 견딜힘이 생긴다. 삶이 주는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이 없다면, 사랑하는 이를 꼭 껴안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있으면 된다. 그냥 그렇게 하면 된다.
“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음, 옛날 같았으면 ‘호르몬의 장난이지만 행복을 위해 즐기는 것’이라 대답했겠지만, 너를 만나고 나서는 완전히 달라졌어.”
“어떻게?”
“추구했던 모든 걸 버려도 괜찮을 것만 같은 착각을 주는 것. 함께할 수만 있다면, 다가올 모든 일들이 한 개도 두렵지 않은 것.”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
*
매달 26일 -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이야기 '
글쓴이 - 영원
음악 공부를 하고있는 대학생입니다. 이유있는 예술을 하는 것이 꿈입니다.
브런치 https://brunch.co.kr/@d8aec389643a40f
유튜브 채널 https://www.youtube.com/channel/UC-78Z2dXevYPh4j0BMAhX-A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