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는 직업을 Job이라 하지만, Calling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우리나라 말로는 천직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천직이나 Calling 같은 용어들은 자신이 그 직업을 갖는 것이 자신의 의지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함의를 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천직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갖는다. 성직에서 언급하는 ‘소명’이라는 단어와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단어의 뜻에 따르면 누군가의 부르심에 따라 우리는 그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소명이나 천직이란 것이 정말로 절대자가 있어서 우리에게 시켰다기보다는 나 자신이 그 직업, 그 일에 갖는 애정과 의지가, 개인이 스스로 인식하는 자신의 의지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라 보는 게 더 합당할 것도 같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남이 시켜서 하는 일에 기쁨과 보람을 느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소명을 받아서 하는 천직, 또는 그에 상응하는 열정으로 일을 하는 사람이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은 자신의 일에서 찾는 보람이다. 그리고 그 보람은 아주 종종,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와, 이 세상 전체에 대한 기여로 이어진다.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일을 천직으로 여긴다는 것은 개인이 단순히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게 내가 소속된 사회에 기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이렇게 보면 일찍이 자신의 천직을 발견하는 사람은 개인적으로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하고 싶은 일이 명확하고, 그 명확하게 하고 싶은 일을 자신의 직업으로 삼아 오랫동안 그 일을 한다는 것은 그 일이 주는 대가와 관련 없이 훌륭한 일이다.기왕 일을 하면서 사는 세상, 그 일을 절대자나 그 일 스스로가 나를 불렀다고, 나는 거기에 호응했을 뿐이라고 말할 정도로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한 일을 통해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런데 반면, 그런 소명을 느껴서 처음부터 천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일에서 우리는 천천히 흥미를 발견하기도 하고 가치를 발견하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일이 다 나름의 가치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모든 일은 다 이 사회에서 필요로 하기에 존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불필요한 자부심이 부끄러워질 만큼 하찮기도 하고, 그 일을 무시하는 사람이 부끄러워해야 마땅할 만큼 중요하기도 하다. 그 사실을 처음부터 직감적으로 깨닫는 지혜로운 사람도 있지만, 반면에 천천히 오랜 세월 그 일을 하면서 그 일의 의미를 찾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몇 가지 비 일상적인 체험에 의해 한 걸음씩 다가오기도 한다.
내가 게임을 만들고 플레이하는 일에 대한 가치를 생각하게 된 계기가 몇 번 있다. 그중 한 번은 내가 게임 만드는 일을 그만두려고 마음먹었을 때 찾아왔다.
십수 년 전, 내가 일하던 회사를 떠나야겠다는 판단을 했을 때다. 후배의 소개를 받아 일하게 된 보드게임 회사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다. 나는 그 작은 회사의 유일한 게임 개발자이자, 한국 게임을 외국에 수출한다고 툭하면 보도자료를 내던 회사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지만 월급을 받지 못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어머님 돈까지 빌려서 투자를 한 회사였기에 내가 나가면 그 투자금이 휴지가 될 것 같아 나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손절이란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르던 때다.
노동청에 임금 미지급을 고발한 직원들이, 회사 통장 사본과 함께 내가 모르던 현실을 알려주지 않았으면 나는 그 희망 없는 직장에 더 오래 남아있었을 것이다.
이직을 결정한 나는 그해 10월 중순에 독일 에센이라는 도시에서 열리는 보드게임 컨벤션에 출장을 가게 되었다. Spiel Messe라는 이름의 그 행사는 전 세계 거의 대부분의 주요 퍼블리셔들이 부스 참가를 하는, 명실공히 세계 최대의 보드게임 컨벤션이다. 그 출장의 목적이었던 몇 개의 미팅을 마치고 나는 딱히 목표도 없이 구름 같은 사람들의 무리와 함께 아마도 마지막 방문일 이 행사장을 떠돌고 있었다.
보드게임을 체험할 수 있는 자리는 거의 꽉꽉 차 있었고 좀처럼 자리가 나질 않았다.이제 막 사람들이 일어나는 자리를 발견하고 자리에 앉는 찰나, 내 앞에 덩치가 산만한 독일인 하나가 앉았다.
그 외양이 정말 특별했는데, 팔뚝과 목덜미를 가득 채운 문신이야 그렇다 쳐도, 살이 안 보일 정도로 귀와 코에 꽂혀있는 금속 링 하며, 무엇보다 특이했던 것은 머리를 민 그의 이마였다. 두피 밑에 쇠구슬 같은 것을 박았는지 양쪽이 대칭인 네 개의 작은 뿔이 이마를 채우고 있었다.
그가 머리를 민 것이 젊은 나이에 일찍 찾아온 탈모 때문인지, 스킨헤드들이 흔히 그렇듯 인종차별을 포함한 정치적 신념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우리가 같은 자리에 앉아 인사를 나눌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와 그가 자리에 앉고 나서 두 자리를 독일인 커플이 채웠고, 우리는 그해의 화제작 중 하나였던 Shadow of Chamelot이라는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팬데믹 같은 세계적으로 히트한 협력 게임이 나오면서 협력 게임이 많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몇 안 되는 수작 협력 게임이었던 Shadow of Chamelot은 그해, 독일의 SDJ(올해의 게임 대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아서왕과 함께 카멜롯 성을 지키는 기사들이 되어 우리는 성을 지키기 위해 함께 협력한다. 문제는 플레이어 중에는 배신자가 있고, 그 배신자는 다른 사람이 실패해야, 즉 성이 함락당해야 이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날 그 테이블의 배신자는 바로 나였다.
함께 협동하여 야만인의 침략을 물리치는 페이즈에서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서로를 도왔고, 배신자를 색출하는 단계에서는 서로를 의심하며 낄낄대기도 했다.독일인 커플 중 남자가 의심을 받고 여자 친구는 가장 강력하게 그를 의심했다. 게임이 끝나고 나서 내가 배신자였다는 사실을 밝히자 사람들은 배를 잡고 웃어댔다.
1시간 남짓 돌아간 게임이 끝나고 나서 나는 간단히 인사를 했다.
머리에 쇠구슬을 박은 스킨헤드 청년은 아헨공대를 다니는 공대생이란 걸 알게 됐다. 그는 게임을 좋아하는 학생이었으며, 게임도 하고 구매를 하기 위해 동생과 날을 잡아 놀러 온 것이다.우리는 서로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기원하며 악수를 했다. 두툼한 그의 손은 무척 따뜻했다.
그때 그는, 내가 게임을 같이 플레이 하기 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우연히 게임을 통해 만났고, 짧은 시간을 재미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함께 했다. 그리고 적어도 내게는, 그는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것이 크리스 크로포드라는 게임 학자가 말한 '마법의 원',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이 공유하는, 일상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 함께한 경험이 갖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게임을 만드는 일은, 그저 내가 그것이 좋아서 선택했던 일이고 본질적으로는 허튼 장난이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이 때로는 지겨워서, 또는 너무 하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 때는 나는 이날의 경험을 떠올리곤 한다. 실제로 이 경험은 내가 보드 게임업을 떠났던 8년 이후 다시 이일을 하게 되는 이유가 되어 주었다.
사람들이 그들의 국적이나 외모 재산, 사회적 지위 등등 그 어떤 외적인 배경들을 벗어나 일상과는 다른 경험으로 만나게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그 배경 뒤에 숨겨두고 있던 인간 그 자체를 드러나게 만들고 그것은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오랜 시간 해온 이 허튼 장난에 의미가 있다고 하면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한다.
글쓴이 - 정희권
2000년경부터 게임, 장르문학, 만화 등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렉시오, 스파이시 등의 보드게임을 기획, 제작했고, 현재는 만화 등 다른 IP 가 갖고 있는 재미를 게임 시스템으로 구현하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아내와 함께 우보라는 보드게임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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