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권에 대한 환상을 갖는 것이 우리 눈에 유치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 음식을 사는 데 썼어야 할 돈, 마지막 남은 얼마 안 되는 푼돈으로 샀을지도 모르는 복권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그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의 고통과 쓸쓸한 노력을 생각해 보렴.
-빈센트 반 고흐의 편지 중에서
복권에 관심이 생긴 건 고흐 때문이었다. 동생의 뒷바라지를 받으면서 빈궁하게 생활하던 고흐는 동생에게 복권가게를 기억하느냐고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서 고흐는 심경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고흐는 날마다 성실하게 습작을 했고, 가랑비가 내리는 아침에도 그림을 그리고자 집 밖을 나섰다. 작업하러 걸어가는 도중에 복권가게를 지나가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복권을 사려고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복권을 구매하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세파에 지친 노파들로 몸집이 자그마했다.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생활수준이 어떠한지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었지만, 삶을 지탱하고자 안간힘을 쓴다는 사실이 그들의 겉모습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고흐는 복권을 통해 인생이 바뀌길 바라는 마음이 깨알만큼도 없었고, 복권당첨에 삶의 희망을 걸고 하루하루 견디는 사람들을 떠올릴 때면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복권을 사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기대에 찬 표정을 보면서 고흐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복권가게의 정경이 그려지는 동안 복권의 의미가 새롭게 새겨졌다.
더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은 고흐의 마음이나 더 좋은 형편이 되길 바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은 사실 똑같은 바람이었다.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의 오지랖이 섞인 비난과 숱한 무시를 겪어왔기에 고흐는 그들을 비웃던 자신이 옳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나 힘겨운 일상에서 벗어나 유복하게 살고 싶은 절박한 마음을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고흐는 생각했다.
복권당첨이 환상에 불과하고, 복권을 사는 것이 유치해 보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 복권 구매란 삶의 질이 오락가락하는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음식을 샀어야 할 돈으로 복권을 샀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불쌍하고 가엾은 사람들의 고통, 복권을 통해 생활고라는 수렁에서 구원받으려는 쓸쓸한 노력, 그리고 쌈짓돈이 복권비용으로 날아가면서 더더욱 곤궁해지게 되는 암울한 현실을 생각해보라고 고흐는 동생에게 편지를 썼다.
고흐의 편지는 시간과 대륙을 건너 내 마음속 우체통에 사뿐히 배달됐다. 한 세기 전에 쓴 고흐의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지금 이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과 그들이 복권을 사면서 품는 희망과 기대가 상상됐다. 그동안 내가 바라지 않아서 바라보지 않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었다.
나는 일확천금을 바란 적도 없고, 복권을 구매한 적도 없었다. 공부한답시고 현실을 생생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떨어진 채 지내왔다. 거리를 두어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지만, 때때로 그 안으로 들어가 몸소 경험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복권을 향한 사람들의 마음도 멀찍이 떨어져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에 한결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려면 내 돈으로 직접 복권을 사야만 했다.
나에겐 돈에 대한 양가감정이 있었다. 분명 돈을 좋아하지만 돈에 집착하면서 늙어가는 것에 대한 혐오가 컸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초연한 체 하면서 재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책만 읽으면서 고매한 척 살아왔다. 나약한 위선이었고 나 스스로를 속이는 기만이었다.
나는 그동안 쌓아온 삶의 관성을 깨뜨리고, 세상에 더 마음을 활짝 여는 과정 중의 하나로 복권을 사보기로 했다. 복권을 사는 건 나만의 실험이었다. 복권을 사면서 느끼는 체험, 들썩이는 감정 등을 기록하면서 나의 변화추이를 관찰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돈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강한지, 그러한 욕망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부딪혀보기로 했다.
그동안 외면해왔던 내 안의 그늘을 복권으로 탐색하면서 나를 더 알아가기로 결심했다. 로또를 1년 동안 사기로, 그렇게 내 안의 내밀한 욕망과 사귀기로 마음먹었다.
<로또를 향해> 글쓴이 - 이인
인문학 강사이자 작가. <나의 까칠한 백수 할머니>, <고독을 건너는 방법>, <남자를 밝힌다>, 등등 여러 책을 저술했고, 많은 곳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재미있으면서도 산뜻한 글을 쓰려고 해요. 언젠가 그대와 반갑게 뵐 날을 상상하며, 오늘도 싱싱하고 생생하게 보내요!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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뫔친구
그렇습니다. 복권을 사는 사람들의 자신의 잣대로 바라보기 보다는 한번 즈음 그들의 입장에 서서 바라 보는 시각의 전환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이 아침에 해 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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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천구서박함함박님께. 이인입니다. 댓글을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처럼 상대의 시각에서 생각해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요. 고흐가 체험했듯 우리도 그러한 체험 속에서 삶은 그윽해져가겠지요. 오늘도 생생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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