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은 기다린다_사랑의 인문학_정지우

2021.10.18 | 조회 2.31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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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현실적인 사람이 아니다. (...) 그 사람은 내가 기다리는 거기에서, 내가 이미 그를 만들어낸 바로 거기에서 온다. 그리하여 만약 그가 오지 않으면, 나는 그를 환각한다. 기다림은 정신착란이다. (...)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중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기다린다. 사랑하는 이의 전화를 기다리고, 만남을 기다리며, 그와 문자 한 줄이라도 닿기를 기다린다. 그러면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기다리는 사람을 상상한다. 그의 웃음, 그의 눈빛, 그의 몸짓이 눈 앞에 어른거린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상 속에서 이미 그와 만나고 있지만, 그가 현실의 존재로 ‘현현(顯現)’하길 바란다.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면, 나는 아마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 테다.

그런데 그때 내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엄밀히 말해서 그 사람 자체는 아니다. 오히려 내가 기다리고 있고, 만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바로 그 사람은 내 안에 ‘상상’으로 존재하는 어떤 사람이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는 몇 년간 데이지와의 재회를 꿈꾼다. 그런데 재회의 바로 그 순간, 개츠비는 눈 앞의 데이지가 자기가 기다린 ‘상상 속’의 데이지와는 다르다는 걸 순간 깨닫는다. 물론, 그는 곧이어 눈 앞의 데이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자 하지만, 그 ‘머뭇거림’의 순간은 기다림의 본질에 관해 알려주는 측면이 있다.

사랑의 기다림이란, 엄밀히 말해서 내 안의 어떤 ‘상상’에 대한 욕망에 가깝다. 그 ‘상상’은 실제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기이한 대상 같은 것이다. 그 상상은 그 사람 없이는 생겨날 수 없는 것이면서도, 그 사람 자체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 상상은 오로지 내 안에 있는 망상만은 아니어서, 실제로 존재하는 그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상상이 곧 그 사람은 아니며, 오히려 우리를 ‘기다리게’ 만들기 위해 나타난 내 안의 요정이나 악마 같은 ‘내 안의 존재’에 더 가깝다.

이는 사랑이 맺는 삼각관계의 특성을 보여준다. 즉, 사랑을 할 때, 우리는 상대방과만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상상을 통해 상대방과 삼각형의 관계를 맺는다. 나는 상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내 안의 상상을 바라보고 있다. 상대를 간절히 기다린다고 하지만, 내 안의 상상을 바라보고 있다. 상대를 이해하고 원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내 안의 상상으로 윤색되거나 조작된 상대방이다. 우리 인간은 상상을 통해 관계를 맺고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상상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사랑의 관계는 천차만별로 달라지기도 한다. 가령,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상상한다면 어떻게 될까? 상대방의 모든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나에 대한 무신경, 무관심, 미움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상대방과 떨어져 있으면, 나에게 무신경하고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쏟는 상대의 모습이 상상된다. 그러면 나는 절망적인 기분을 느끼다가 이별을 선고할 수도 있다. 실제 상대방의 마음이 어떻느냐는 무관하게 상상과 맺는 관계가 사랑을 결정지을 수도 있다.

반대로, 상대방이 나를 사랑한다고 믿는 사람은 과감하게 고백을 하고, 사랑의 관계에 진입할 수도 있다. 상대방은 여전히 긴가민가한 상황이지만, 나를 사랑한다고, 사랑할 거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만나다 보면, 그런 믿음이나 용기에 맞는 관계에 진입하기도 한다. 사랑에는 어떤 상상이 개입하느냐에 따라 그 판도가 달라진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대로 믿을 수 있는 그 누군가를 사랑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의 문제가 많은 경우 ‘상상’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상상은 절대불변하는 그 무언가가 아니라, 규정하거나 수정하고, 다시 만들어나갈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사랑의 기술이란, 상상을 어떻게 정교하게, 그 관계에 이롭도록 교정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 글쓴이 - 정지우

'청춘인문학', '분노사회',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너는 나의 시절이다' 등을 썼습니다. 페이스북에 매일 글을 쓰고 있기도 합니다. 오늘의 글이 당신의 삶을 조금 더 다정하게 만들어주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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