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중 누구도 명절 음식이 먹고 싶다고 말한 적 없는데, 나 혼자 그 냄새와 분위기가 그리워 며칠간 부지런을 떨었다. 목요일에는 꼬지 산적과 호박전을 만들어 작은언니네 집으로 배달하고, 오늘은 두부 동그랑땡에 오징어튀김과 양파 튀김, 잡채와 샐러드 등을 준비하느라 새벽부터 점심까지 내내 주방에 있었다. 나물종류는 자신없어 안했지만 그래도 나름 추석 상차림인데 우리 가족만 먹는 건 아닌 거 같아 함께 하고 싶은 이들을 불러 즐겁게 식탁에 둘러앉았다.
호주에 있는 친구를 만나고 오면 나도 모르게 요리가 하고 싶어진다. 3년 전 호주에 다녀와서 제일 먼저 도전한 게 ‘김치 담그기’였는데 며칠 전 열흘 간의 호주 여행을 마친 나는 또다시 ‘추석 상 차리기’ 도전하고 말았다. 바쁜 일상에서 식사 준비는 늘 해치워야 하는 어떤 일과여서 정성스레 무언가를 준비하고 함께 먹을 이들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지만, 호주에 있는 친구로부터 정성스럽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고 나면 나도 모르게 음식과 요리에 대한 ‘재해석’이 일어나는 것 같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사랑하는 이들에게 정성을 들인 음식을 먹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음식은 사랑이지, 암 요리는 정성이고 말고’라며 새벽부터 동동거리는 내 모습을 보니 웃음도 나고 신기하기도 하다.
명절을 보통의 휴일처럼 보낸 지 오래되었다. 시댁도 친정도 명절마다 무얼 어떻게 꼭 해야 한다는 말씀이 없어진지 오래이다. 평소에 찾아뵙다 보니 교통체증이 최고조에 달하는 명절엔 모이지 않는 쪽으로 합의되었다. 간편하고 스트레스 없는 명절이 처음엔 반가웠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무언가 서운하고 싱겁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명절에만 느낄 수 있던 어떤 진한 정서, 그 시간들이 채워주던 어떤 충만함이 사라진 느낌이랄까.
명절이면 거실을 가득 채우던 떠들썩한 웃음소리, 오랜만에 모여든 친척들이 몰고 온 낯선 공기, 맥락 없이 뒤섞이던 다양한 세상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리둥절해 하던 그 느낌이 왠지 그리워진다. 주방에 모여 앉은 여자 어른들이 신나게 대화를 하고, 거실 한복판에서 즐겁게 화투를 치는 남자 어른들의 풍경이 건네던 묘한 안정감과 들뜬 마음이 요 며칠 더 선명하게 밀려왔다. 어린 내게 집안 가득 어른과 아이들이 모여 있는 시간은 몇 년에 한번 돌아오는 축제처럼 묘한 설렘의 시간이었던 것 같다. 모든 순간이 내내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달력을 벗어나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 대가족 안에 포근히 안겨있다는 느낌이 명절엔 있었던 것 같다.
한상 가득 차린 점심상을 정리한 후 나의 제안으로 다 같이 화투를 쳤다. 뭐라 설명하기 힘들지만 오늘은 왠지 화투를 만지며 즐겁게 깔깔대고 싶은 마음에 굳이 편의점에서 사 오게 했다. 어린 시절 아빠가 친척들과 화투를 칠 때면 그 곁에서 지폐를 세고 동전을 쌓으며 신나하던 그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었던 걸까. 아이들에게도 이번 추석에 처음 배운 화투가 뭔가 이색적이면서도 짜릿한 경험이었나 보다. 보드게임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화투는 처음 만나는 우리 전통의 카드게임 일 테고, 거기에 엄마가 함께 즐기니 이보다 더 신나는 게임이 어디 있을까.
아이들은 화투장이 짝짝 붙는 소리의 경쾌함을 알아듣더니, 광박이네 피박이네 쌌어! 등의 말들을 금세 배워 맛깔나게도 내뱉었다. 서로의 점수와 판세를 읽곤 마침내 손을 높이 쳐들며 Go! 를 외치는 아이들의 살아있는 표정이라니. 요 며칠 뚱하던 사춘기 녀석의 표정이 신나게 살아나는 것을 보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오늘은 예상치 못한 타짜가 모든 승리를 싹쓸이를 해서 어린 시절처럼 신나게 돈을 셀 일은 없었지만 승패와 상관없이 모두가 즐거웠다. 젊은 시절의 내 아빠와 오후를 함께 보낸 느낌이랄까. 모처럼 가족 모두와 손님까지 흥겹고 시끌벅적한 하루를 보냈다.
‘명절’이라는 단어 뒤에 ‘스트레스’나 ‘증후군’이라는 단어가 따라붙은 지 오래되었다. 징글징글한 음식 준비와 뒷정리, 오랜만에 만난 친척으로부터 받는 오지랖 넓은 간섭의 말, 넘쳐나는 자랑과 충고의 말들 때문에 명절과 모임이 싫다는 이들이 많았다. 이번 추석 연휴엔 가족 여행을 가거나, 명절 음식을 직접 하지 않고 간단히 주문해 먹거나, 차례를 간소화하는 등 명절 풍경도 조금씩 달라졌음을 SNS를 통해 본다. 부모 자녀만으로 이루어진 핵가족과 1인 가구가 많아지는 요즘, 확대가족까지 함께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따뜻한 밥 한 끼 먹는 날은 명절이 아니면 더욱 쉽지 않은 시절이 되었다.
이번 연휴에는 ‘우리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엔 어떤 명절 풍경이 남게 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부지런히 명절 음식을 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불러 식탁을 가득 채웠는지 모르겠다. 허례허식과 불필요한 여성에게만 과도하게 부여된 명절 노동은 없애야겠지만 나를 둘러싼 거대한 가족나무를 확인하고, 그 안에서 새겨진 이야기도 전해 들으며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많은 이들의 수고와 사랑을 되새기는 훈훈한 모임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정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를 빼놓지 않으면서도 보다 창의적이고 유쾌한 가족모임을 지속하기 위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한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뺄것인가 치열하게 고민해 보자.
저녁이 되어 돌아가는 손님들을 배웅하는데 저물어가는 하늘 노을이 너무 예뻤다. 새벽부터 음식 준비하고, 함께 나눠 먹고, 즐겁게 웃었던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에 딱 어울리는 하늘이구나 싶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명절 기분이 난 날이었다. 내년 추석은 어떻게 더 신나는 풍경을 만들어 볼까 상상해 본다.
* 매달 13일 ‘마음 가드닝’
글쓴이 - 이설아
<가족의 탄생>,<가족의 온도>,<모두의 입양>을 썼습니다. 세 아이의 엄마이자 입양가족의 성장과 치유를 돕는 건강한입양가정지원센터 대표로 있으며, 가끔 보이지 않는 가치를 손에 잡히는 디자인으로 만드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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