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와서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이 곳은 어딜가든 휠체어 타고 다니기 좋다는 점이었다. 어떤 건물을 가든 대중교통을 이용하든 휠체어를 타고 이용하는 승객들이 거의 매번 보였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독일은 법적으로 모든 건물이 휠체어가 다닐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그보다 더 신기했던 건 휠체어를 장애인만 이용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나 내가 사는 동네는 노인 비중이 높아서 어딜가든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대부분인데 정말 많은 노인들이 보행보조기를 사용하는 게 눈에 띄었다.
휠체어 경사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다양했다. 장애가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보행보조기가 필요한 노인들, 유모차를 끄는 엄마와 아빠들도 많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이 바퀴 달린 캐리어를 끌고 편리하게 이동했다. 차가 없는 우리 부부는 집 근처 슈퍼마켓에 갈 때 바퀴 달린 바구니(보통 돌돌이라고 부른다.)를 이용한다. 무거운 쌀이나 우유 같은 것들을 잔뜩 사는 날엔 돌돌이가 큰 도움이 되는데, 한번도 이동하는데 불편함을 느낀 적이 없다. 자연스럽게 독일이라는 나라에 대한 호감도도 높아졌다. 이렇게 휠체어가 다니기 좋은 나라가 있을까.
“유모차 끌고 다니면 갈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아.” 어린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독일에서 알게 된 한국인 유학생 부부는 이제 막 두 돌 지난 딸과 6개월 된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아이 아빠가 학회로 집을 비운 날 아이 엄마의 SOS 요청으로 그 집을 방문했다. 아이 엄마는 밖에서 달달한 디저트를 먹고 싶다고 아이 둘을 동시에 태울 수 있는 쌍둥이 유모차에 태워 나와 함께 집을 나섰다. 하도 집에서 아기만 봐서 근처 카페를 잘 모른다며 그녀는 나에게 좋은 카페를 추천해 달라고 했고, 나는 자신있게 한 카페로 데려갔다. 하지만 그 곳은 쌍둥이 유모차를 끌고 실내로 들어가기엔 출입문이 좁았고, 야외에서 먹기엔 햇볕이 너무 뜨거웠다. 다른 카페로 옮겨서도 단체 손님 자리를 피해 빙 돌아서 유모차를 대고 겨우 앉을 수 있었다. 그마저도 유모차나 휠체어가 진입할 수 있는 마지막 자리였다. 단 한 번도 카페를 고를 때 유모차를 고려해 본 적 없는 나로써는 생소한 어려움이었다.
새로운 건 그 뿐 만이 아니었다. 벌써 일 년 넘게 이 동네에 살았는데, 유모차를 끌고가는 길은 전혀 처음 보는 길이었다. 아기 이유식을 사야해서 잠깐 중앙역 지하의 마트에 들렀는데, 아이 엄마는 내가 중앙역을 이용하면서 단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길로 안내했다. 그 길은 휠체어 경사로로 연결된 길이었다. 중앙역에 딱 하나 있는 엘리베이터는 취객인지 노숙자인지 모를 누군가의 소변 냄새로 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녀는 내게 “이 엘리베이터는 늘 숨을 참고 타야 돼.”라고 사전에 친절한 설명도 잊지 않았다. 유모차로 이동하기 쉽지 않겠다는 나의 말에 그녀의 입에선 술술 힘들었던 일화들이 쏟아졌다. 기차역에서 단 하나의 승강기로 모든 휠체어와 유모차가 줄을 길게 늘어선 바람에 기차를 놓친 이야기, 이전에 살던 도시에서는 기차 승강장 수에 비해 엘리베이터가 부족해 늘 돌고 돌아서 가야 했던 이야기, 식당이든 카페든 입구가 좁아 못 들어가는 일은 자주 있다는 말까지. 1인용 유모차였을 때보다 2인용 유모차를 가지고 나올 때가 훨씬 더 이동 반경이 제한된다고도 덧붙였다.
법적으로 모든 시설에 휠체어가 다닐 수 있도록 경사로나 엘리베이터를 설치해야 하는 독일조차도 결코 유모차를 끄는 아이 엄마에겐 살기 좋은 곳은 아니었다. 이 곳에서는 휠체어로 이동하기 참 좋다고 생각한 내 자신이 순간 부끄러워졌다. 고작 여행갈 때 캐리어나 장볼 때 돌돌이 정도 끌고 다녔으면서 한국보다 조금 더 많은 경사로에 살기 좋다고 단정해버렸으니. 실제 당사자들에게 휠체어 경사로나 엘리베이터는 겨우 한 걸음 시작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원하는 곳에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여유있게 기차 승강장에 도착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서 목적지까지 가는 일들이 꽤나 힘써 노력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여기가 나아. 한국 갔을 때 지도 어플에서 식당을 찾으면 하나같이 ‘휠체어 불가' 표시가 뜨는데 숨이 턱 막히더라.” 한국에선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기지 않고서는 외출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과연 내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을까 한숨도 푹푹 나왔다. 나 역시 아이를 낳게 되면 겪게 될 이야기, 나이가 들어 걷는데 보조기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마주할 현실, 혹시나 사고가 나서 휠체어를 타야할 때 직면할 문제들이 처음으로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이동의 편리함이 주는 행복은 아이가 없고, 나이가 들어도 두 다리로 거뜬히 걸을 수 있고, 큰 사고 없이 건강한 사람들만이 우연히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부족하게나마 모든 시설에 승강기나 휠체어 경사로가 하나씩은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편리를 누리고 있다. 만약 엘리베이터와 경사로의 수가 더 많아진다면 어떨까? 아이를 둘 이상 유모차에 태우고 다녀도 마음 편히 식당도 카페도 갈 수 있는 엄마라면 분명 조금은 더 행복하지 않을까. 무거운 짐을 굳이 허리에 메지 않아도 바퀴 달린 가방으로 일상이 조금 더 편리해지지 않을까.
특정 소수를 위한 시설이라고 생각하면 멀게만 느껴지는 일들조차도 결국 그 소수자성, 바퀴가 달린 기구에 의지해야하는 상황 자체를 들여다보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사실은 모두를 위한 일이 될 수 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잠시 말을 멈추고 불편함을 겪는 당사자의 말에 조금만 더 귀를 기울이면 문제가 선명해진다. 바퀴를 굴리는 일이 더 편리해질수록 이 사회의 행복 총량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늘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본다.
* 글쓴이 - 메이
유학생 남편과 함께 독일에서 신혼 생활을 꾸리며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이야기. 독일에서의 첫 사계절을 보내며 익숙해진 것들과 여전히 낯설고 새로운 것들을 관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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