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릴라는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브로치가 없어지자, 앤이 가져간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마 이 장면은 <빨강 머리 앤>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마릴라는 앤을 추궁하지만, 앤이 자기는 절대로 브로치를 가져간 게 아니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마릴라는 앤을 믿지 않고, 믿을 수 없는 고아를 집에 들였다면서, 마음이 너무도 좋지 않은 이유는 무엇보다 앤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 앤에 대한 확신, 앤이 훔치거나 잃어버렸을 것이라는 확신, 그로 인한 매우 불편한 마음과 심지어 입양에 대한 다소간의 후회까지 느껴지는 이 마음은 마릴라의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그 이전에 린드 부인이 심어놓은 편견과도 관련되어 있다. 함부로 아이를 입양하는 게 아니라고, 입양아가 문제를 일으킨 경우가 있고, 천성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마릴라에게 '두려움'을 조장해놓았던 것이다.
결국 마릴라가 앤을 의심하고 믿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내면의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앤은 브로치를 가져가지도 않았고, 브로치는 사라지지도 않았다. 단지 마릴라가 떨어진 브로치를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해, 마릴라가 마음이 그토록 좋지 않았던 것은 '자기 안'에 있는 것 때문이었다. 외부적으로 일어난 사건(브로치를 잃어버린 일)은 다른 사건으로 얼마든지 대체될 수도 있었다. 앤이 아파서 설거지를 못했거나, 실수로 식탁보를 태웠거나, 그밖의 앤의 실수나 앤과 아무 관련없이 일어난 어떤 일도 이 '두려움'이 투사되는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달리 말하면, 마릴라의 마음 속에는 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이 두려움은 언젠가 반드시 폭발할 것이었다. 그 마음이 폭발할 구실만 있으면 되었다. 그 구실이 '브로치 사건'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반드시 폭발해야만 했다. 폭발한 이후, 사실은 앤이 자신이 두려워할 만한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스스로 반성하고, 앤에게 용서를 구해야만 하는 일이 '필연적'으로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관계'란 결코 '나'와 '당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관계의 더 핵심적인 부분은 '나'와 '내 안의 두려움'과의 문제이다. 당신이 누구든 간에 모든 관계가 시작될 때, 우리는 당신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다. 혹시 이 사람 이 상한 사람은 아닐까? 이기적으로 나를 이용하려는 건 아닐까? 나를 험담하는 나쁜 사람 아닐까? 모든 관계에는 이와 같은 두려움을 넘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있다.
사실 관계에는 그밖에도 수많은 '나'와 '내 안의 무언가'의 문제가 개입한다. '내 안의 무언가'에는 나의 이상, 기준, 편견 등이 포함될 수 있다. 문제는 '당신' 이전에 '내 안의 무언가'에 있다. 내가 나의 편견을 어디까지 인정하고 극복할 것인지, 혹은 내가 나의 기준으로 어디까지 당신은 평가할 것인지 아니면 나의 기준을 포기하고 당신을 받아들일 것인지, 이런 것들이 관계 문제의 본질에 가깝다.
따라서 이런 필연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갈 것인지가 매우 중요하다. 마릴라는 '자기 안의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해서 거의 앤을 학대하듯이 방에 가둬놓는다. 결국 마릴라가 자신의 오해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며 문제는 해결되지만, 정도가 더 심하면 돌이킬 수 없는 관계의 상처가 될 수도 있다. <빨강 머리 앤>은 어떻게 보면, 마릴라의 성장 서사처럼도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마릴라가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앤을 진심으로 사랑해가는 과정이 상당히 극적인 면이 있기 때문이다.
관계는 끝도 없는 오해의 연속이고, 이 오해를 끊임없이 풀어나가야 하는 여정이다. 그런데 이 오해는 대부분 각자의, 서로의 내면에 있는 기준, 편견, 두려움, 이상 같은 것과 관련되어 있다. 당신에 대해 지레짐작하고, 의심하고, 내 안의 두려움을 당신에게 투사하면서, 관계는 수렁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럴 때마다 필요한 건 내 안의 문제를 제대로 마주하고, 당신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의 나와 당신이 만나 관계를 매번 시작하는 것이다.
* '선한 이야기 읽기' 글쓴이 - 정지우
작가 겸 변호사. 20대 때 <청춘인문학>을 쓴 것을 시작으로, <분노사회>,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 등 여러 권의 책을 써왔다. 최근에는 저작권 분야 등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20여년 간 매일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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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밀착된 마음'을 연재 중이었으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해당 코너를 당분간 쉬면서 다양한 '선한 이야기'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로 임시 변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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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
개인적으로 요즘 붙들고 있는 문제였습니다. 작가님께서 세모문에 정리해 주신 글을 읽게 되어서 기뻤습니다. "'관계'란 결코 '나'와 '당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 안에 제멋대로 자리잡고 있는 관념들을 들여다보는 용기를 내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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