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는 어디에서 오는가
‘죽지 않는 한 나는 숨을 쉬는 것을 멈추지 못할 것이다’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든다. 10분 뒤에도, 20분 뒤에도, 한 시간, 하루, 일주일이 지나도 나는 숨을 쉬고, 눈을 깜빡이고, 침을 꼴깍 삼키며 살아갈 것이다. 더 나아가 아침이 오면 해가 뜰 것이다. 학교를 갈 것이고, 밥을 먹을 것이고, 밤이 되면 잠에 들 것이다. 어떤 공부를 할지, 어떤 사람을 만날지, 무슨 메뉴를 먹을 지와 같은 사소한 것들은 매일 바뀔 수 있을지 몰라도 큰 틀은 똑같다. 해가 뜰 거라는 것, 숨을 쉴 거라는 것, 그리고 밥을 먹을 거라는 것 말이다. 이러한 귀납법적 진리는 너무나 당연히 생활 속에 스며들어있기에 평소에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잘만 살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그런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끝없는 우울에 빠지게 된다.
권태다. 이 땅에 발 붙여 살아가는 인간으로써 생명 유지를 위해 택한 본능적인 매커니즘 그 자체에 느껴지는 구토다. 이러한 본질적인 권태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삶은 허무해지고 모든 것에 실증이 난다. 생각해보자. 수업을 듣는 것도 반복된다. 아침에 피곤을 견뎌내고 일어나서 학교에 간 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사서 정신을 깨운 후 수업에 들어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히 반복 되고 있는 일상이다. 주말에는 친구를 만나 카페에 가서 수다를 떤다. 때로는 술을 마시러 가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자며 누군가를 불러내기도 한다. 혹은 집에서 혼자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거나 읽고 싶었던 책을 읽으며 쉬기도 한다. 하지만, 어쨌든 주말에는 쉰다. 어떤 방식으로든 평일의 피로를 달랜다. 이것 또한 반복된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것도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하기 위해서라 믿어왔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피로를 풀기위해 스스로 선택한 일이라 믿어왔는데, 본질적인 권태감이 찾아올 때에는 과연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것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의문이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숨을 쉬지 않으면, 밥을 먹지 않으면, 우리는 죽을 것이다. 작가 아베 코보의 소설 『모래의 여자』 속 주인공 남자가, 삽질을 게을리 하면 모래에 파묻혀 죽을 운명에 처한 것처럼 말이다.
던져진 존재, 서로 다른 자세
(*소설 『모래의 여자』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자는 모래 마을에 던져졌다. 그저 휴가 중 희귀 곤충 채집을 위해 사막을 찾았던 평범한 학교 선생일 뿐이었는데, 마을 사람에게 유인되어 감금을 당한 후 모래를 퍼내는 노예가 된다. 완벽한 부조리다. 그런데, 삶은 원래 이렇다. 태어나기를 소망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없다. 모든 생명체는 원래부터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며 그 중에 그것을 자각하는 이는 인간뿐이다. 누구나 신을 믿었던 시절에는 그래도 조금 덜했다. 파스칼의 『팡세』에서는 인간의 기본적인 상태를 ‘침착하지 않고 불안하며 권태로운 것’으로 간주했다. 파스칼이 보기엔 다양한 문화, 학문, 여가 등 세상의 모든 것들은 사실 권태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은 허무를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신 없는 인간의 삶의 양태’이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면 권태감에서 해방될 수 있다.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 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나은 삶이 존재하고, 이 세계가 진짜가 아니며, 견디고 나면 비로소 아무런 암울한 감정 없는 세상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으면 현실에서의 권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모래의 여자』 속 모래를 퍼내는 삶에 적응하여 순응하며 살아가는 ‘여자’는 이러한 종류의 사람이다. 그녀는 본인에게 찾아온 부조리를 ‘절대자의 목소리’로 여긴다. 감히 반항할 생각도 하지 않으며 탈출할 생각은 죽어도 하지 않고, 단지 소원이 있다면 돈을 모아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라디오’를 하나 장만하는 것 하나 뿐이라 말한다.
하지만 남자는 다르다. 남자는 자신이 마주한 부조리에서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애를 쓴다. 결국 탈출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남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탈출을 위해 노력하는 행위 그 자체가 삶의 의미가 되어 버린 듯하다. 남자는 여자와 다르게 반항하는 삶을 택했다. 남자는 까뮈가 말하는 ‘반항하는 인간상’에 가까워보인다. 까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부조리에 대한 성찰은 비인간적인 것을 고통스럽게 의식하는 데에서 출발하여 그 여정의 종점에 이르면 인간적 반항이라는 열정에 찬 불꽃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삶이란 본래 던져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반항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그의 논지는 모래 마을에서 탈출하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남자의 행동과 제법 닮아있다. 하지만 까뮈가 말하는 반항에서의 핵심은 그의 행동처럼 악에 받친 무언가가 아니다. 까뮈는 부조리에 대항하기 위해서 ‘죽음의 곁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소설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세상 모든 것에 권태를 느끼는 인물이었는데, 사형선고를 받고 난 후에 비로소 자유를 경험한다. 까뮈는 그것이 바로 ‘유한함’에서 오는 자유라 설명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오늘 무심코 지나쳤던 세상의 모든 풍경들은 다시는 볼 수 없는 유한한 것이라 생각하는 순간 아름다워 보이기 마련이다. 눈앞에 보이는 파란 하늘, 흔들리는 나뭇잎, 그리고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까지, 당연하다 생각하면 한 없이 당연한 것들인데, 유한함을 인지하는 순간 소중해진다. 까뮈는 그것을 깨닫는 방법은 ‘인간은 언젠간 죽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항상 마음속 어딘가에 품고 살아가는 것뿐이고, 그렇게 되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주장한다. 이것이 까뮈가 말하는 부조리에 대한 반항이다.
그렇다면 남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모래 마을을 탈출하는 것만이 진정한 자유일까?
세상의 유한함을 즐기며 어린아이로 살아가기
모래마을은 유한한가 아니면 영원한가? 혹시 그것은 남자의 손에 달려있는 것은 아닐까? 남자는 모래마을이 유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먼저 인지해야한다. 모래마을의 인구는 워낙에 점점 줄어들고 있다. 벌써부터 일손이 부족해 관광객 신분의 사람들을 모래 구덩이 속에 집어넣고 일을 시키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노동력을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막에 관광을 목적으로 오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며, 남자처럼 막차를 놓쳐 마을에 머물다 가는 사람은 정말로 손에 꼽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 바깥세상과의 연락 수단이 없어서 구조마저 불가능 한 사람을 추려내면, 남자 같은 사람은 몇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수준이다. 아이를 낳아서 인력을 보충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각각의 집에서 우연히 아이가 생길 수는 있겠지만,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생명을 잉태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단지 목적이 ‘모래를 퍼내기 위한 것’ 뿐인 아이를 자신의 의지로 낳으려고 하는 부모는 별로 없을 테니 말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모래마을은 분명 유한하다. 언젠가는 인력 부족으로 인해 무너져버릴 마을이다. 남자는 이 마을에서의 삶을 우선 즐겨야한다. 마을이 무너져 모든 게 묻혀버리든, 남자 혼자 탈출에 성공하든 남자의 삶에서 이 마을은 분명히 유한하기 때문이다. 모래마을의 유한함을 깨달은 남자는 이제 이 곳이 아름다워 보일 것이다. 해변의 모래사장에서 아이들이 모래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모래를 이용해서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할 것이다. 모래성을 쌓을 수도 있고, 모래에 몸을 파묻고 얼굴만 내미는 놀이를 할 수도 있고, 또 모래에 글씨를 쓰며 함께 사는 여자에게 사랑고백을 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남자는 갇힌 상황 속에서도 큰 자유로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남자는 모래마을의 유한함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이대로 가면 아무리 서로 열심히 일한다고 한들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 한명, 한명에게 다가가 일러준다면, 사람들은 동요할 것이다. 지금까지 누군가를 가둔 채 일을 시켜온 것이 허무하게 느껴질 것이다. 남자는 이제 탈출을 앞두고 있다. 그는 마을의 유한함에 대해 말하며 다 함께 이 마을을 버리는 것만이 살 길이라 말해야 한다. 그러면 마침내,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 혼자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은 다 함께 행동하면 가능케 되는 것들이 많다. 마을을 탈출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마을 사람들은 언젠가는 마을이 무너지고, 본인도, 그리고 가족들도 모래에 파묻혀 죽는다는 남자의 말에 함께 마을을 떠나자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남자가 마을을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은 이것이다. 우선 마을을 사랑한 후에, 다 같이 떠나는 방법 말이다. 사람들은 설득하는 남자가 무미건조한 말투면 귀담아듣지 않을 것이다. 진심어린 표정과 목소리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을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고, 그러려면 마을의 유한함을 깨달으면 된다.
현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우선 삶의 유한함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 길가에 핀 풀꽃을 따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트를 만들어 줄 수도 있고, 길을 걷다가 하늘이 너무나 아름다우면 잠시 길가에 앉아 하늘을 한 없이 바라볼 수도 있고, 들리는 음악이 아름답다면 잠시 피아노에 앉아 그것을 재현할 수도 있다.
우리는 더 나아가 권태를 인식하지도 못한 채, 삶의 유한함에 대한 생각을 기억 저 편으로 미뤄두고 사는 ‘모래마을 주민’들을 구해야한다. 세상은 이미 무너지고 있다. 본능적인 매커니즘에 종속되어 숨을 쉬고, 밥을 먹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사람들은 어느덧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살기 위해 일을 하는, 모래마을을 지켜내기 위한 일련의 기계가 되고야말았다. 남자가 모래구덩이에 갑자기 툭 던져진 것처럼, 나머지 마을 주민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갑자기 툭 던져진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조리에 맞서 무언가를 바꾸려면 우리는 함께여야한다. 모래마을이 무너질까 두렵다면, 모래를 퍼내는 것이 아니라, 모래마을에서 함께 탈출하면 된다. 다 함께 살아남는 방법은 그 방법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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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이야기 '
글쓴이 - 영원
음악 공부를 하고있는 대학생입니다. 이유있는 예술을 하는 것이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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