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나의 개인적인 시선을 가득 채우는 무엇에 국한되는 대신, 이 세계가 이루어지고 탄생한 결과 존재하게 되는 무엇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세계의 탄생을 목격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은 상대를 가만히 응시하게 된다. 대개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가만히, 오랫동안, 그렇게 바라볼 일이 없다. 보통 서로 승인받지 못한 그런 '응시'는 무례함이나 불쾌함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그런 '바라봄' 혹은 '사랑의 응시'라는 게 허용되고,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에게 바라봐주길 바라는 마음이 깊어진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를 지긋이, 어느 때보다 깊이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당신을 바라볼 때, 때로 우리는 이 세계 전체를 함께 기억한다. 당신이 있는 노을, 당신과 있던 해변, 당신이 바라보고 있고 동시에 나도 바라보고 있는 어떤 풍경 혹은 세계를 함께 본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가 아니었다면, 굳이 공원 벤치에 앉아 몇 시간을 가볍게 재잘거리면서, 그보다 오랫동안 그 공간의 햇살과 나무와 사람들을 그리도 깊이 응시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보고 있는 바로 이 세계를 당신도 함께 보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깊이 느낄 일도 없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이 세계가 나와 당신에 의해 바라보아지고 있고, 다시 말해 인식되고 있고, 그렇게 확실히 존재한다는 확신을 그만큼 가질 일도 없을지 모른다. 결국 사랑 속에서 두 사람은 이 세계를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 예찬>에서 사랑은 이처럼 세계에 대한 목격이자,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고, 세계의 탄생을 맞이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특히, 사랑에서 '아이의 탄생' 또한 이와 같이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본다. 사랑하는 사람 둘 사이에서 태어나는 새로운 아이는 곧 새로운 세계를 열어보인다. 나에게는 그저 무심하게만 존재했던 세계를 아이가 유심히 관찰한다. 바람에 흔들리며 춤추는 나뭇잎들, 빨간 벽돌의 모양들, 신비로운 이불의 촉감, 찌릿한 탄산수의 맛 같은 것들 앞에 반응하는 아이를 통해 세계는 다시 한 번 탄생한다.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이를 통해 탄생하는 세계를 목격하고 사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사랑은 언제나 세계의 발견이다. 흔히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의 특성들을 열거하곤 한다. 그는 눈이 크고 예뻐, 그는 존경할 만한 직업을 가졌어, 그는 호기심이 많고 다정해, 같은 것들을 우리는 '사랑'의 표현이라 말하고, '사랑하는 이유'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런 대상의 속성에 머무르는 것은 어찌 보면 사랑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은 나와 세계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사랑을 재확인하며, 세계를 다시 만들어가고 구축해가는 일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자는 세계 속에 들어선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면서, 비로소 이 세계를 다시 만들어간다. 당신을 사랑한 이 바닷가는 내가 홀로 경험한 바닷가와 다르다. 나의 아이와 함께 거닐게 된 이 공원은 내가 혼자 산책하던 공원과 다르다. 사랑하면서 우리는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하고, 기억하고, 저장한다. 세계를 새로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대상에 고착된 사랑을 넘어서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세계를 창조할 가능성이 생긴다. 그 세계에서는 모든 것에 대한 의미도 새로이 부여된다. 홀로일 때는 수박을 썰어먹는 저녁 시간 같은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고, 원하지도 않았던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로운 사람과 만난 세계에서는, 함께 수박을 썰어먹는 저녁 시간이 너무나 소중한 나머지 다른 모든 것보다 중요한 가치를 지닐 수도 있다. 세계의 발견은 그렇게 가치의 발견, 가치의 재정립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게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가치 속에서 삶을 창조해가는 것이다.
*
'사랑의 인문학' 글쓴이 - 정지우
작가 겸 문화평론가로 활동하며, <청춘인문학>, <분노사회>,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너는 나의 시절이다> 등을 썼습니다. 사랑에 대해 고민하고 쓰면서 더 잘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싶네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