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잘 짓는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어떤 제목들은 내가 봐도 꽤 봐줄 만하다. 이를테면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나 《공부의 미래》, 내가 편집하진 않았지만 내가 지은 《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같은 제목들이 그렇다. 그런데 출판사 이름을 지을 때는 고욕이었다.
내 원칙은 이랬다. 첫째, 무슨 무슨 ‘북스’, 무슨 무슨 ‘서재’, 무슨 무슨 ‘서가’ 같은 꼬리표를 달지 않는다. 그런 이름들은 너무 많다. 둘째,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교양인’과 같이 이름에 지향점을 담지 않는다. 이름은 그냥 이름이고 싶었다. 셋째, 한글로 짓는다. 대원칙은 출판사 이름은 쉬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출판사 이름은 접근하기 쉽고 친근하게 짓고 싶었다.
나는 왜 그렇게 출판사 이름에 자연 명칭이 많이 들어가 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그것처럼 쉽고 친근한 이름이 없었다. 산, 강, 숲, 하늘, 바람, 나무, 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아침, 저녁, 해, 달…. 그리고 그 단어들이 포함된 수많은 합성어들, 예컨대 푸른숲, 갈마바람, 남해의봄날, 아침달, 책읽는저녁. 자연 명칭에 ‘책’이나 ‘생각’ ‘글’처럼 출판을 연상시키는 단어를 붙여 만든 이름도 상당하다. 책바다, 생각의나무, 글뿌리, 글봄 등.
현재 대한민국에 상호 등록된 출판사가 약 9만 8천여 개다. 그러니까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이름이 이미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쉽다. 검색하면 다 나온다. 이름 짓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출판사 이름을 지을 동안은 길을 가다가도 거리의 간판들만 보였다. 무슨 단어를 보면 이런저런 단어들과 요렇게도 붙여보고 저렇게도 붙여보았다. 무려 한 달이 넘도록 그러고 다니다 포기했다…
친구들에게 SOS를 쳤다. 제발 이름 좀 지어달라고, 그럼 출판사를 차리거든 사외이사로 임명하겠다고 했다. 내가 그 빛나는 아이디어와 넘치는 창의력을 높게 사는 이경란 디자이너가 이런 말을 툭 던졌다. “선배, 누가 그러는데 그럴 때는 사전을 펼쳐보래요. 혹시 알아요? 생각지도 못했던 게 튀어나올지.”
오호! 다행히 나에겐 좋은 국어사전이 있다. 《보리 국어사전》이다. 아동용으로 제작된 이 사전은 중간중간에 귀여운 일러스트가 삽입된 쉬운 우리말 사전이다. 나는 이 두꺼운 《보리 국어사전》을 한 장 한 장 넘겨보기에 이른다. 가, 나, 다, 라, 마…
그러다 발견한 것이 ‘마름모’라는 단어다. 음? 마름모? 마름모? 귀여운데? 꽤 귀여운데? 로고는 그냥 마름모로 하면 되겠네? 이 이름을 쓰는 출판사가 있는지 바로 검색에 들어갔다. 세상에나! 이 한국 땅에 ‘마름모’라는 이름을 쓰는 출판사가 한 군데도 없다니. 드디어 블루오션을 발견한 것이다!
이름을 짓고 나니 그럴듯한 ‘슬로건’ 같은 것을 갖다 붙여야만 할 것 같았다. 이를테면 ‘지식이 지혜로 바뀌는 순간’(어크로스)이라든지, ‘경계를 허무는 콘텐츠 리더’(북21)라든지, ‘작고, 단단하게, 재미있게’(유유)라든지…. 마름모 로고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마름모 모양이다. 네 변의 길이가 같다. 마주 보는 두 쌍의 변이 서로 평행하다. 평행, 평행, 평행...
"평행하는 선들은 결국 만난다."
마름모의 슬로건은 “평행하는 선들은 결국 만난다”가 되었다. L작가님이 말씀하시길, 내가 언젠가 노벨 수학상을 받을 것 같다는 거다. 평행하는 선들이 어떻게 만나느냐고, 만나지 않는 선들을 만나게 했으니까 말이다. “왠지 마름모에선 수학책이 많이 나올 것 같은데요?”라고 작가님은 나를 끈덕지게 놀리신다. 그렇다. 나는 이렇게 뜬금없는 출판사 이름에 말도 안 되는 슬로건을 갖다 붙여놓은 마름모 출판사의 대표다. 평행하는 선들은 만나지 않지만, 마름모의 세계관 안에선 만나게 된다. 서로 팽팽하게 평행선을 달리던 대결 구도들이 마름모의 세계관 안에서는 합의점을 찾게 된다. 이것은 나의 고급 유머이자 도도한 아이러니의 발현이다!
전 문학동네 대표이사인 K사장님이 ‘문학동네’라는 이름을 지을 때는, 사람들이 무슨 문학‘동네’냐고, ‘세계’도 아니고, ‘세상’도 아니고. 이랬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문학동네’라는 이름은 고유한 이미지가 있다. 그만의 정체성이 있다. 이름이 회사의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회사가 그 이름에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준 것이다. 이름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
마름모? 마름모… 마름모가 무슨 뜻이에요? 이따금 이런 질문을 받는다. 그럼 나는 그냥, 아무 뜻도 없어요 하고 대답한다. 진짜 아무 뜻도 없다. 이름은 그냥 이름일 뿐이다. 그 이름이 뜻하는 바는 지금부터 만들어가려고 한다. 나는 그게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다.
*글쓴이 고우리
마름모 출판사 대표. 노는 게 제일 좋은 탱자탱자 편집자. 2006년 여름에 편집자가 되었다. 문학동네, 김영사, 한겨레출판 등 대여섯 군데 출판사를 돌아다녔다. 16년차가 되던 어느 날, 회사 가기 싫어서 덜컥 출판사를 차렸다. 출판에 목숨 걸진 않았는데, 어쩌다보니 책 만드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출판사를 차려놓고 1년째, 막막하긴 하지만, 설마 까무러치기야 하겠어 정신으로 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편집자의 사생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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