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운동의 시초,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Artemisia Gentileschi, 1593.07.08~1653)

2021.12.28 | 조회 1.23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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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여성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익명이었던 여성들 - 우리의 불만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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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여성들 첫 뉴스레터는 미투 운동의 시초,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입니다. 바로크 시대를 평정한 위대한 예술가를 만나보세요.


여성들이 미술을 공부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던 초기 바로크 시대에 태어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23세의 나이로 권위 있는 미술 기관인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의 최초 여성 회원으로 임명받을 만큼 재능 있는 천재 예술가였습니다.

아르테미시아는 1593년 7월 8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찍이 아르테미시아의 가능성을 알아본 그의 부친은 드로잉과 유화뿐만 아니라 당시 유행하기 시작했던 카라바조풍의 강렬한 명암법과 색감을 전수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르테미시아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미술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고, 그의 부친은 자신과 벽화작품을 함께하던 아고스티노 타시(Agostino Tassi)에게 아르테미시아의 원근법 교습을 맡겼습니다.

타시는 18살이었던 아르테미시아를 상습적으로 성폭행했고, 주변 사람들이 눈치채 일이 커질 것 같으니 결혼을 하자고 밤낮으로 졸라댔습니다. 성범죄를 저지른 남성이 피해자와 결혼하게 되면 벌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아르테미시아는 집안에서 밀어주는 최초의 여성 화가였고, 빛을 발하기 시작한 신예 예술가로서 불명예스러운 일로 유명세를 치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결혼을 결심하였고 몇 차례의 만남을 이어나갔습니다.

타시와 결혼을 약속한 지 9달이 지나고 있었지만, 타시는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보다 못한 아르테미시아의 부친은 타시를 로마 법정에 고발했고, 1612년 3월 16일, 타시는 성폭행이 아닌 ‘처녀성 강탈’이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아르테미시아가 ‘처녀’가 아니라면 타시는 무죄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아르테미시아는 강간을 당하기 전에 자신이 ‘처녀’였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수치스러운 검사를 여러 번 받고, 손톱 비틀기라는 끔찍한 고문도 당했습니다. 아르테미시아가 9달이 넘는 외로운 싸움을 이어나가던 중, 타시가 아르테미시아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협박했다는 증언이 나왔고, 순식간에 상황이 반전되어 마침내 타시의 성폭행 혐의가 유죄로 판결 나게 되었습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Judith Beheading Holofernes)>(1620, 캔버스에, 199x162.5cm) *출처: WikiArt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Judith Beheading Holofernes)>(1620, 캔버스에, 199x162.5cm) *출처: WikiArt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명작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가 지금까지 너무나도 많은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이유가 있습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는 재판 건으로 이래저래 마음이 상했던 아르테미시아가 내놓은 첫 그림으로 그림이 공개되자 로마는 다시 한번 떠들썩해졌습니다. 목을 베는 유디트의 얼굴은 아르테미시아와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은 타시와 판박이였기 때문입니다. 화가들이 제 얼굴을 성서 그림이나 역사화에 그려 넣는 건 르네상스 이후 흔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자가 주인공이면서 이처럼 잔인한 역할로 그려진 적은 없었지요. 아르테미시아가 유디트에 자신을 투영해 적장의 목을 베는 장면의 주인공으로 등장함으로써, 아르테미시아는 이제까지 남성 중심적이었던 역사와 종교의 주제의 위계를 무너뜨린 최초의 여성이 됐습니다. 그림 속 유디트는 적장의 멱을 베는 데에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습니다. 아르테미시아는 보는 이마다 넋을 잃을 만큼 빼어났다는 성서 속 유디트의 아름다움을 지혜, 용기, 자신을 의지를 실행하고 관철할 수 있는 결단력 그리고 건장한 육체로 해석하여 표현하였습니다.

이 그림은 카라바조의 그림과 자주 비교되는데요. 다음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Judith Beheading Holofernes)>(1598~1599)와 함께 보죠.

카라바조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Judith Beheading Holofernes)>(1598~1599) *출처: WikiArt
카라바조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Judith Beheading Holofernes)>(1598~1599) *출처: WikiArt

분노 가득하고 강인한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 그리고 연대로 동참하는 하인의 모습은 남류 화가의 작품에서 온순한 여성과 수동적인 노파로 대체됩니다. 게다가 위 그림 속 여성은 근육마저 부자연스럽습니다. 적장의 목을 베더라도 여성은 얌전하고 위태로워야 했던 것입니다. 또한 미켈란젤로처럼 해부학에 조예가 깊다는 사람도 여성의 신체를 표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당시 여성 모델을 채용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수많은 여성 나신들이 이상한 형상을 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하지만 아르테미시아는 남류 화가들과 달리 자신의 신체는 물론, 여성 모델들의 신체에도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봐도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여성의 모습을 구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장점을 활용하고 카라바조 특유의 과장된 분위기를 적절히 곁들여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을 탄생시켰고,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서 풍겨오는 한층 고양된 감성에 감탄했습니다.

<회화의 알레고리로서의 자화상(Self-portrait as the Allegory of Painting, 캔버스에 유채, 98.6x75.2cm)>(1639) *출처: WikiArt
<회화의 알레고리로서의 자화상(Self-portrait as the Allegory of Painting, 캔버스에 유채, 98.6x75.2cm)>(1639) *출처: WikiArt

 

아르테미시아는 로마에서 화가로서 부와 명성을 누렸습니다. 그러다 37세에 나탈리로 이주하여 여생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작업실도 가지고, 남성 화가들보다 작품 가격을 더 높게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주문했던 한 고객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 보냈다고 하는데요.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은 시저의 용기를 가진 한 여자의 영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르테미시아의 재판 과정, 다른 작품들의 이야기도 궁금하다면?

도서 <잊혀진 여성들>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잊혀진 여성들 - 도서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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