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1: 국회의사당 앞, 계엄 탄핵 집회 종료 후 사람들이 이동하고 있다.]](https://cdn.maily.so/du/archivenews/202512/1767188801991664.jpg)
2025년 마지막 날. SNS에서는 새 해로 넘어가는 이 순간을 자축하고자 하는 무수한 사진 포스팅들이 쏟아진다. 그 행렬들 속에서 나는 허무함과 괴리감을 느낀다. 계엄 사태 로부터 1년.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망각할 것인가.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누구인가.
필자는 아카이브 연구자이자 예술가로, 아카이브를 작업의 시작 혹은 베이스로 작업하고 있다. 최근에는 70-80년대의 역사에 초점을 두고 연구하고 있는데, 이는 현재의 정세를 보다 내밀히 살피고 미래를 관측하기 위함이다. 리서치 중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한 선배 작가와 연이 닿게 되었는데, 덕분에 아카이브의 생성, 해석, 재현, 그리고 폐기를 포함한 전 과정의 복합적인 사회적 함의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이번 글은 아카이브 재해석과 민주적 실천으로서의 예술에 대해 후배인 필자와 한 세대 선배인 홍진훤 작가가 대화하는 형식의 에세이이다.
![[그림 2: 올해 북서울 미술관에서 열린 2인전 타이틀 매치 《장영혜중공업 vs. 홍진훤: 중간 지대는 없다》 전시 정경. 홍진훤, 〈랜덤 포레스트 2025〉 일부]](https://cdn.maily.so/du/archivenews/202512/1767186380102186.jpg)
2023년 미국에 아직 있었을 당시, 나는 홍진훤 작가의 작업을 웹서핑을 하다가 처음 알게 되었는데, 직접 보게될 기회를 막연히 고대하다 이번 해 북서울 미술관에서 열린 2인전에서 신작과 구작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나는 홍진훤 작가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마찬가지로 아카이브와 사회참여적 예술을 중점적으로 다루기에 교류하고 싶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홍진훤 작가 소개: 사진과 이미지를 둘러싼 권력관계를 관찰하고 개입하는 일을 즐긴다. 사진, 영화, 웹프로그래밍 등의 매체를 주로 다루며 《melting icecream》(d/p, 서울, 2021), 《랜덤 포레스트》 (Art Space Pool, Seoul, 2018) 등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동료들과 함께 〈공간 지금여기〉, 〈더 스크랩〉, 〈docs〉 등 여러 프로젝트를 운영-기획했고 지역 미술의 가능성을 고민하는 콜렉티브 〈세컨드 콤플렉스〉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출처: https://jinhwon.com/)
기록 재현의 간극
![[그림 3: 2021년작 “멜팅 아이스크림”의 스틸 이미지. 출처: 서울 인권 영화제]](https://cdn.maily.so/du/archivenews/202512/1767183856989113.png)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창고 한켠에서 ‘수해필름’이라는 표식을 단 정체를 알 수 없는 필름 더미가 발견된다. 작가는 이 필름을 하나의 단서로 삼아, 당시 현장을 기록했던 집단들을 추적하며 사라진 이미지와 기억을 다시 불러내는 과정을 펼쳐간다. 2021년 처음 공개된 홍진훤 작가의 독립영화 〈멜팅 아이스크림〉은 사진에 포착된 민주화운동의 과거, 2000년대 투쟁의 현장, 그리고 인터뷰와 사진 복원이 이루어지는 현재라는 서로 다른 세 개의 시간대를 오간다. 이 기억들 사이의 전환은 매끄럽기보다 어딘가 삐걱거리며 진행되는데, 그 불균형 속에서 무엇이 누락되었는지, 왜 그러한 누락이 발생했는지, 그리고 기억의 비대칭이 어떤 기억의 풍경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질문이 떠오른다. 민주주의는 어떤 방식으로 기억되는가. 민주주의의 형성과정에서 참여할 수 있었던, 혹은 기억될 수 있었던 존재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 기억들은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노해: 과거의 이미지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통해, 가시화되는 역사와 그렇지 못한 역사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불협화음에 대해 말씀하신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억의 경합’을 가시화하는 시도가, 기억과 기록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일정 부분 좁히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홍진훤: 해소에 대한 기대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제 작업의 주목적은 아닙니다. 저는 기억이나 기록이라는 것들이 그 자체로 믿을만한 무엇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기 때문입니다. 둘 모두 환경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기도 하고 시스템에 지나치게 종속적인 특징을 갖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신뢰하는 기록을 의심하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록은 많은 조직, 특히 국가에서 역사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하나임을 증명하기 위해 활용됩니다. 우리가 하나의 기록 안에 존재하는 혹은 그로 인해 존재하는 연속적 파생물 정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이런 식의 한 방향의 기록, 그로 인해 재구성된 기억을 의심하고 거부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인지는 통제된 환경에 너무도 미약하기 때문에 저는 인간보다는 기록물 그 자체에 관심을 더 많이 둡니다. 그래서 어떤 기록물이 기존의 의미를 벗어나 스스로 새로운 의미망을 생성할 수 있는 동력의 조건을 찾고자 합니다. 기록물 스스로가 자신에게 강제된 상징 규범을 벗어나 투쟁할 수 있는 매체적 토대를 만드는 일은 제 작업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특히 <멜팅 아이스크림>에서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박제된 사진들을 비정규직 투쟁을 탄압하고 운동을 과거화 하려는 힘의 상징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랜덤 포레스트>에서는 사진의 지시성을 극도로 제한하면서 사진의 연쇄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자립성을 실험해 보기도 합니다. 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관계를 독점하고 가시화를 통제하면서 결국 우리의 감각과 기억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이윤을 창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 듯합니다.
권력 역학과 민주주의적 실천으로서의 예술
![[그림 4: 2025 2인전 홍진훤 작가 인터뷰 중/ 출처: 서울 시립 미술관]](https://cdn.maily.so/du/archivenews/202512/1767188108413091.png)
그렇다면 아카이브 예술은 사회와 어떻게 약동하는가. 아카이브는 그 자체로 정치적이며, 이를 다루는 예술 역시 정치적인 선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에 작가가 선별하고 재배열한 아카이브는 일종의 정치적인 선언 (political manifesto)이자 아고라인 것이다.
노해: 전 세계적으로 우경화가 심화되면서 공동체적 가치가 점점 모호해지고, 사실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입장과 이해관계가 더 앞서는 상황처럼 느껴집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작가님께서 한 사람의 작가이자 인간으로서 스스로에게 기준점으로 삼고 계신 가치가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홍진훤: 너무 크고 무거운 질문이라 간단히 답변드리긴 힘들지만 우선 선험적 ‘진실’이란 것이 존재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그것은 언제나 권력에 의해 재구성되고 투쟁과 혁명으로 전복되는 가변적인 것이라는 생각에 가깝습니다. 작가님의 우려에 저도 충분히 동의하고 있습니다. 특히 ‘진실을 둘러싼 입장들과 이해관계’라는 부분에서 제가 문제라 생각하는 부분은 과연 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입장’이라는 것이 있는가 하는 의심입니다. 입장이 있어야 이해관계도 의미가 있을 텐데요. 저는 공동체가 성립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자립한 개인’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자신의 환경에 대한 인식과 그에 대한 세계관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서로 다른 개인들의 연합과 연대가 동시대의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믿는데 그것이 점점 불가능해지는 사회가 되어간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 노동계급이 트럼프에게 절대적 지지를 보내는 상황이나 사회에서 차별받는 대상들이 더 약한 존재들을 혐오하고 차별을 재생산하는 현실들을 보면 그런 의심들이 더해갑니다. 종종 사람들이 저에게 ‘미술은 세계를 변화할 수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럼,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답은 ‘미술이 여전히 누군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한다면, 자신의 믿음에 대한 의심을 지속시킬 수 있다면 미술은 분명 지금과 다른 세계를 향하게 할 것입니다.’ 정도입니다. 이것을 작가님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해보자면 ‘자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가이자 인간인 누군가에게 이 사회를 살아가는 가장 근본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면 말입니다. 특정한 답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스스로의 답이 되어 살아가는 세계를 꿈꿉니다. 그런 욕망만이 그것을 통제하는 수많은 권력과 제도에 저항할 수 있는 투쟁과 연대의 근거가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림 5: 흑백의 사진 속에는 한 무리의 군중이 깃발들을 세우고 고층 빌딩들 앞의 광장에 모여있다.]](https://cdn.maily.so/du/archivenews/202512/1767184189985597.jpg)
홍진훤 작가의 답변을 읽으며 문득 아주 예전에 읽었던 한나 아렌트의 글귀들이 생각났다. 그녀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권리를 가질 권리 (right to have rights)”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는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을 (rightless people) 다루는 데 있어 핵심적인 이론적 틀을 제공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민족-국가는 권리를 수호하면서도 권리를 억압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인다. 아렌트는 권리가 위로부터 하달되는 매커니즘을 넘어서, 권리를 갖지 못한 것으로 명명된 소외된 존재들을 포함한 사회 주체들이 스스로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다.
하나의 답이나, 하나의 사유, 하나의 공동체로 수렴되지 않는 다변화된 사회에서, 아카이브는 더 이상 수동적인 기록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선별과 재맥락화의 과정을 통해 현재를 진단하고 재기억하는 동시에, 미래를 그려나가는 도구로서 끊임없이 확장한다. 나는 예술이 이러한 과정을 지지하고, 촉진하고, 더 나아가 민주화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아닌, 우리가 계속해서 사유하고 투쟁해야할 삶의 현장이다. 그리고 이러한 궤적들은 휘발적인 SNS에서 즉각적으로 가시화되거나 기록되지 않더라도, 또 다른 발화로 이어질 원동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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