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Before Bitcoin Pt.3 — 90s “Cryptowars” by pet3rpan (2018년 4월 13일)
3부를 시작하며
<비트코인은 어디에서 왔을까?> 는 암호화폐(Cryptocurrency)의 기술과 철학을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는 연재물입니다. 이 글은 그 세 번째 편입니다. 앞선 글을 아직 읽지 않았다면 먼저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그 첫 물결의 한가운데에는 데이비드 차움(David Chaum)이라는 암호학자가 있었습니다.
2부에서는 차움이 공개키 암호학 연구를 이어가며 익명 통신(Anonymous communication)과 결제, 탈중앙화 서비스(Decentralized services)를 어떻게 탐구했는지 살펴봤습니다. 그의 아이디어는 훗날 비트코인과 암호화폐라는 개념을 만들어낼 사이퍼펑크(Cypherpunk)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1부와 2부는 정부의 개인 자유 침해에 맞서 사이퍼펑크 운동이 어떻게 태동했는지를 다룰 3부의 배경이 됩니다. 이 운동은 훗날 토르(Tor)와 비트토렌트(BitTorrent), 위키리크스(WikiLeaks), 비트코인을 탄생시켰습니다. 사이퍼펑크를 이해하면 비트코인이 어떤 기술이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 뿌리부터 되짚어볼 수 있습니다.
80년대에서 이어지는 이야기
1980년대에는 기술과 소프트웨어, 컴퓨팅 분야가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1982년에는 어도비, 오토데스크, 선 마이크로시스템스가 설립됐습니다.
1983년에는 인튜이트가 설립되고 마이크로소프트 워드가 출시됐습니다.
1984년에는 시스코와 델이 설립됐고, 마이크로소프트 워드가 출시됐으며, 휴렛팩커드는 최초의 잉크젯 프린터를 내놓았습니다.
1985년에는 AOL이 설립됐습니다. 1987년에는 맥아피 안티바이러스가 설립됐습니다.
1989년에는 어도비 포토샵 1.0이 출시됐고, 애플은 매출 기준 미국 100대 기업에 진입했습니다.
기술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했지만, 삶과 법과 사회의 다른 영역은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인터넷이라는 서부 개척지는 곧 오늘날 열두 살짜리조차 듣고 몸서리칠 닉네임을 쓰는 해커들의 세상이 됐습니다. 범죄자들은 기술을 등에 업고 갈수록 치밀해졌지만, 미국 정부는 위험할 만큼 무지했습니다.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요원과 ‘전설적인 스타워즈 방산업체’ 오토데스크
1990년 4월 초, 록 밴드의 작사가였던 존 페리 발로(John Perry Barlow)에게 FBI가 전화를 걸어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인터넷을 사용했고 여러 온라인 공동체에서 활동했습니다. FBI가 왜 연락했는지는 몰랐지만, 요청을 거절하면 오히려 의심을 살 것 같았습니다.
며칠 뒤, 미 연방수사국의 리처드 백스터 특별수사관이 발로의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발로는 훔친 매킨토시 ROM 소스 코드를 유포한 해커 집단 ‘뉴프로메테우스’의 일원이라는 혐의를 받았습니다.[1] 백스터 요원은 혐의를 뒷받침할 증거를 거의 내놓지 못했고, 발로는 곧 그와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소프트웨어와 기술이 얽힌 범죄였으니, 그 분야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발로를 조사하러 왔으리라 생각할 법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발로의 말에 따르면…
“백스터 요원이 컴퓨터 기술을 거의 전혀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결백을 밝히려면 그보다 먼저 어떤 행위가 죄가 될 수 있는지부터 설명해야 한다는 걸 곧 깨달았다.”
심문은 세 시간이나 이어졌습니다…
“가령 백스터 요원은 오토캐드를 만든 오토데스크가 스타워즈 주요 방산업체이며, 그 회사의 CEO가 다름 아닌 ‘캡틴 크런치’로도 알려진 악명 높은 폰 프리커 존 드레이퍼(John Draper)라고 들었다는 것이다.[2] 웃음을 멈추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서툴고 어리석은 아들을 보며 처음에는 웃다가도 이내 걱정스러워지는 아버지처럼, 발로 역시 웃음을 거두고 미국의 앞날을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백스터 요원과 정부 전체의 무지가 모든 사람의 권리와 자유를 위태롭게 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세 시간이나 소득 없는 실랑이를 벌인 끝에, 리처드 백스터 특별수사관은 발로를 돌려보냈습니다. 발로는 자신이 겪은 일을 세계 최초의 온라인 공동체 포럼 WELL에 올렸습니다.[3] 1985년에 문을 연 그곳은 당대의 힙스터들이 모여들던 공간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일을 겪은 다른 회원이 발로에게 연락해왔습니다. 그는 1980년대 소프트웨어 업계의 거물 미치 케이퍼(Mitch Kapor)였습니다. 케이퍼는 메모 작성 프로그램을 만들고 최초의 스프레드시트 소프트웨어를 내놓은 로터스의 창업자였습니다. 로터스는 이후 1990년에 IBM에 35억 달러에 인수됐습니다.

케이퍼 역시 뉴프로메테우스가 저질렀다는 바로 그 범죄의 공범으로 몰렸습니다. 소프트웨어와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FBI를 보며 그도 크게 불안해졌습니다.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당국이 디지털 세계의 권리를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요?
일주일도 안 돼 케이퍼는 비행기를 타고 발로를 만나러 갔습니다. 발로의 사무실 밖에 눈보라가 몰아치는 동안, 두 사람은 자신들이 겪은 일과 최근 ‘선 데블 작전’에서 벌어진 비밀경호국의 압수수색을 이야기했습니다.
선 데블 작전은 빌 클린턴(Bill Clinton) 행정부가 사이버 범죄를 단속하려 벌인 작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보다 앞선 1월, 정부는 작전을 알리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우리가 겪어본 바에 따르면, 컴퓨터 해킹 용의자 가운데 상당수는 더 이상 자기 방에서 컴퓨터로 장난이나 치는 철없는 십 대가 아니다. 이제 일부는 컴퓨터를 이용해 불법 행위를 저지르는 고도의 기술자다.
..부당한 수색과 압수로부터 신체, 주거, 서류와 소유물을 보호받을 국민의 권리는 침해되어서는 안 되며, 상당한 이유가 있고 선서나 확약으로 뒷받침되며 수색할 장소와 체포할 사람 또는 압수할 물건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는 한 영장을 발부해서는 안 된다.”[4]
까놓고 말하면 “범죄와 싸워야 하니 이제 하고 싶은 건 뭐든 하겠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누구의 권리도 짓밟지 않도록 ‘노력’ 정도는 해보겠다…”라는 뜻입니다.
선 데블 작전의 첫 표적 가운데 하나는 ‘리전 오브 둠’이라는 해커 집단이었습니다. 곧 ‘애시드 프리크(Acid Phreak)’, ‘파이버 옵틱(Phiber Optik)’, ‘스콜피온(Scorpio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회원들의 집도 급습당했습니다. 전화망을 해킹했다는 혐의로 비밀경호국이 문을 걷어차고 들어가 집 안을 뒤집어놓았습니다. 컴퓨터는 물론 책과 메모, 전화기, 오디오테이프, 수상해 보이는 전자 장비까지 닥치는 대로 가져갔습니다. 아직 부모와 살던 열여덟 살짜리들이었기에, 가족들까지 고스란히 거친 수사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대화가 끝나갈 무렵, 발로와 케이퍼는 시민의 기본권이 완전히 짓밟혔다는 데 뜻을 모았고, 그 권리를 지키려면 자신들이 나서야 한다고 깨달았습니다.

전자 프런티어 재단의 시작
사업으로 큰돈을 번 케이퍼는 세 해커의 변호 비용을 모두 대기로 했습니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발로와 케이퍼는 뉴욕에서 십 대 세 명을 위한 변호인단을 꾸렸습니다. 두 사람은 시민의 자유를 지키는 소송으로 이름난 법률회사 RBSKL(라비노위츠, 부댕, 스탠더드, 크린스키 & 리버먼)과 손잡았습니다. 이튿날 애시드 프리크와 파이버 옵틱, 스콜피온은 RBSKL 사무실에 들어서며 1990년대 첫 사이버 권리 분쟁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그 뒤 한 기자가 발로가 FBI에서 겪은 일을 후속 취재하겠다며 연락해왔습니다. 기자와 통화하던 발로는 자신과 케이퍼가 해커들을 변호하려 한다는 이야기도 무심코 꺼냈습니다. 뜻밖에도 며칠 뒤 신문에는 이런 제목이 대문짝만 하게 실렸습니다.
로터스 창업자, 해커들을 변호하다
그 한 줄짜리 제목은 삽시간에 세상으로 퍼졌습니다. 애플 공동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Steve Wozniak)이 먼저 연락해 고문으로 합류했고, 케이퍼와 발로의 법정 싸움에 필요한 돈을 아낌없이 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기술 사업가 존 길모어(John Gilmore)도 워즈니악과 함께 뛰어들었습니다.
길모어는 NSA 골탕 먹이기를 취미로 삼은 악명 높은 말썽꾼이었습니다. 바로 전 해인 1989년에는 NSA가 공개를 막은 암호학 논문을 세상에 풀어놓았습니다. 독학으로 코드를 배워 선 마이크로시스템스의 다섯 번째 직원이 된 그는 “옳은 일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어떤 일도 맡지 않는다”는 사람으로 통했습니다. 스톡옵션으로 부자가 된 뒤에는 1980년대 후반 내내 “무정부주의자, 광인, 테러리스트”의 소굴로 불리던 alt 포럼들을 운영했습니다. 1989년에는 표현과 소프트웨어와 암호화(Encryption)의 자유를 좇아 시그너스 서포트를 세웠습니다. 그런 길모어에게 발로와 케이퍼의 싸움은 자신의 신념이 그대로 걸어 나온 듯한 일이었습니다.
대중의 관심이 쏟아진 직후, 이들은 스티브 잭슨 게임스도 급습당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세 해커의 집에서 그랬듯, 비밀경호국은 게임 회사 사무실을 통째로 털다시피 했습니다. 당시 스티브 잭슨 게임스는 CIA가 “컴퓨터 범죄 교본”으로 오해한 《사이버펑크》라는 게임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회사 발표에 따르면 비밀경호국은 이메일을 모조리 뒤졌고, 상당수를 지우기까지 했습니다. 비밀경호국은 이미 통제력을 잃었고, 디지털 권리라는 말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습니다.
1990년 6월 8일, 발로는 훗날 널리 알려질 글 《범죄와 당혹감》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케이퍼와 워즈니악, 길모어가 합류해 세 해커의 변호에 나서기까지 벌어진 일을 모두 기록했습니다.
“미국은 정보 그 자체를 어떻게 보호하고 전달해야 할지 규정할 법도, 이를 설명할 적절한 비유도 갖추지 못한 채 정보화 시대로 들어서고 있었다.”
불의에 맞설 정식 조직이 필요하다고 느낀 발로는 글의 끝에서 전자 프런티어 재단(EFF)의 창립을 알렸고, 이 조직은 “디지털 표현의 자유를 지키고 헌법의 보호를 사이버 공간까지 넓히기 위한 교육과 로비, 소송에 쓸 자금을 모아 지원”할 예정이었습니다.
EFF 창립 소식은 빠르게 퍼졌고, 발로가 꺼낸 문제는 예상보다 훨씬 큰 대중의 공감을 불러냈습니다. 스티브 잭슨 게임스 사건은 훗날 중요한 판례가 되어, 이메일도 음성 통화처럼 들여다보려면 영장이 필요하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꽤 괜찮은 법안(A Pretty Good Bill)
이듬해 초인 1991년, 바이든(Biden) 상원의원은 테러 방지에 초점을 맞춘 266호 법안에 조항 하나를 끼워 넣었습니다. 적법한 허가만 받으면 정부가 “음성, 데이터 및 기타 통신의 평문 내용”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조항이었습니다. 사실상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이용 가능한 모든 통신을 감시할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모든 통신이었습니다.
그때 암호화 프로그램을 만들던 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필 짐머만(Phil Zimmerman)이라는 인물로, 지난 10년간 핵 동결 운동가로서 진보 정치에 깊이 관여하다 최근 기술 분야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습니다.[5] 그는 컴퓨터만 있으면 누구나 RSA 암호화 알고리즘으로 메시지와 파일을 암호화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군용 수준으로 여겨지던 RSA는 그전까지 상업 분야에서만 쓰였지만, 짐머만은 누구나 강력한 암호학 기술을 이용해 사적으로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프로그램의 이름은 ‘프리티 굿 프라이버시(Pretty Good Privacy, 꽤 괜찮은 프라이버시)’의 약자인 PGP였으며, ‘랠프의 꽤 괜찮은 식료품점’이라는 가게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PGP로 사업을 해볼까 막연히 생각하던 짐머만도 266호 법안만큼은 흘려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정부가 자신의 소프트웨어가 막으려던 행위, 곧 감시를 법으로 허용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법안이 통과되기 전에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PGP를 쥐여줘야 한다고 생각한 짐머만은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당시 주택담보대출금도 다섯 달째 밀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상업용 제품이 아니었다. 인권을 위한 프로젝트였다.”
버전 1.0은 허술했고 코드도 엉성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잠은 못 자고, 돈은 없고, 시간에는 쫓겼으니 좋은 프로그램이 나올 리 없었습니다.) 그는 1991년 5월 PGP를 공개하며 소프트웨어 문서에 훗날 유명해진 글 《내가 PGP를 만든 이유》를 함께 실었습니다.
“사생활 보호가 불법이 된다면, 오직 범법자만이 사생활을 누릴 것이다. 정보기관은 뛰어난 암호학 기술을 이용할 수 있다. 거대 무기상과 마약 밀매상도 그렇다. 방산업체와 석유회사, 그 밖의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과 풀뿌리 정치 조직은 대부분 공개키 암호학을 활용한 군용 수준의 기술을 저렴하게 이용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PGP는 사람들이 자기 사생활을 스스로 지킬 힘을 준다. 사회는 갈수록 이런 힘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내가 PGP를 만든 이유다.”
그는 PGP를 여러 포럼과 사이트에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소스가 공개돼 있었고, 무료였으며, 상업적으로 써도 별도 허가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정부의 감시망이 닫히기 전에 평범한 사람들도 군용 수준의 암호화 기술을 쓸 수 있게 하고 싶었습니다. 활동가 친구들이 힘을 보태자 PGP는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전체주의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는 으레 총기를 거둬들이고 소유를 금지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을까요? 나치 독일과 소련, 제2차 세계대전기의 이탈리아가 그랬습니다.)
일주일 만에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PGP를 쓰기 시작했고, 한 달 안에 이미 수천 명이 내려받았습니다. 얼마 뒤 미얀마의 자유 투사들이 사용하고 동유럽까지 퍼지자, 그곳의 한 사용자는 짐머만에게 “독재 정권이 러시아를 장악하더라도, 당신의 PGP는 이제 발트해에서 극동까지 널리 퍼져 있으니 필요할 때 민주주의를 지키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짐머만이 그토록 서두르는 사이, EFF를 비롯한 시민자유 단체들도 바이든 상원의원에 맞서 결집했고 결국 추가 조항은 266호 법안에서 삭제됐습니다. 돌이켜보면 PGP를 서둘러 대중에 공개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는 바이든이 제공한 셈입니다.
티머시 C. 메이(Timothy C. May)와 에릭 휴스(Eric Hughes), 제대로 별난 두 사람
이듬해 초, 길모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암호학자들을 초대해 함께 술을 마시는 파티를 열었습니다. 에릭 휴스와 티머시 C. 메이는 바로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휴스는 암스테르담에서 데이비드 차움이 세운 디지캐시에서 일하다 막 돌아온 젊은 수학자였습니다. 메이는 인텔의 하드웨어 엔지니어 출신으로, 지난 3년 동안 데이비드 차움의 아이디어를 다룬 논픽션 소설을 쓰려 애쓰고 있었습니다.
에릭은 20대 중반, 메이는 30대 후반이었지만 둘은 급진적인 자유지상주의 덕분에 단숨에 말이 통했습니다. 게다가 둘 다 데이비드 차움의 연구에 단단히 빠져 있었습니다.
티머시 C. 메이는 해군 장교인 아버지 아래에서 자란 거친 사람이었습니다. 열두 살 때부터 자유지상주의에 끌린 그는 총도 무척 좋아했고, “묵직하고 차가운 금속 총기를 손에 쥐면 해방감과 힘이 느껴졌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차움이 어릴 적 자물쇠와 금고를 장난감 삼았다면, 메이의 장난감은 AR-15 돌격소총과 .357 매그넘이었습니다. 훗날 메이는 하드웨어 엔지니어가 됐습니다.
1980년대가 되자 자유지상주의자 메이의 눈은 사이버 공간이라는 새 서부로 향했고, 그는 “암호화를 쓰면 사이버 공간의 행동을 규제하는 지역 법률 대부분을 쉽고 안전하게 무시할 수 있다”고 상상했습니다. 1986년 데이비드 차움의 논문 《신원 확인 없는 보안: 빅 브라더를 쓸모없게 만들 카드 컴퓨터》를 읽은 그는 직장을 그만뒀습니다. 차움의 아이디어를 글로 써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인텔 스톡옵션으로 이미 부자가 된 그는 회사를 나와 《자유의 정도(Degrees of freedom)》라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디지털 화폐(Digital money)와 데이터 은신처(Data haven) - 블록체인?(Blockchain), 타임스탬프(Timestamp), NSA의 감시가 지배하는 세계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첩보 소설을 끄적이는 십 대들처럼, 메이도 끝내 소설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뼛속까지 엔지니어였던 그는 3년 동안 작가 노릇과 씨름한 끝에 상상만 하는 데 질렸습니다. “이 멍청한 소설을 붙들고 있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에 그리던 정교한 세계를 진짜로 만들고 싶었다.”
에릭 휴스는 버클리에서 수학을 공부했습니다. 재학 중 한 암호학 학회(CRYPTO ’86?)에서 데이비드 차움의 연구를 처음 접했습니다. 차움은 점점 디지털화되는 세계에서 익명 결제가 왜 중요한지 설명하며 디지털 화폐 시스템을 소개했습니다. 다른 참석자들과 달리 휴스는 기술과 암호학이 품은 정치적 의미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잠시 컨설턴트로 일한 뒤에는 암스테르담으로 건너가 차움의 디지캐시에 합류했습니다. 연구에는 흠뻑 빠졌지만 차움이라는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훗날 털어놓았는데, 디지캐시에서 일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놀라지 않을 이야기였습니다. 디지캐시에서 잠시 일한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버클리 대학원에 지원하려고 그는 1991년 5월 일찌감치 돌아와 있었습니다. 집을 구하는 동안 묵을 곳이 필요하다고 하자 메이는 자기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휴스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잠시 메이와 함께 살았습니다.
하지만 도착한 뒤 그는 원래 하려던 일, 즉 살 집을 찾는 일은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휴스와 메이는 꼬박 사흘 동안 암호학 얘기만 했습니다. 남들은 출근해야 했지만, 메이는 돈 많은 실패한 작가였고 휴스는 어디에도 매인 데 없는 스물몇 살 청년이었습니다.
“우리는 사흘 동안 수학과 프로토콜, 도메인 특화 언어[6], 안전한 익명 시스템을 놓고 숨 가쁘게 이야기를 나눴다.”
“세상에, 정말 재미있었다.” 메이가 말했습니다.
첫 모임
1991년 9월, 휴스와 메이, 길모어는 기술계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정기적으로 만날 자리를 만들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세 사람 모두 찬성했고, 막 집을 얻은 휴스가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9월의 어느 토요일 아침, 학자와 엔지니어와 암호학 옹호자 서른 명쯤이 가구 하나 없는 새집 바닥에 둘러앉았습니다. 사이퍼펑크의 첫 모임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메이는 토론에 필요한 암호학 개념과 배경 지식을 정리해 57쪽짜리 자료를 준비했습니다. 자료에는 일주일 전에 출시된 PGP 2.0을 담은 디스켓도 딸려 있었습니다.
메이는 5년 전에 쓴 글에 《암호 무정부주의자 선언(Crypto Anarchist Manifesto)》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료 묶음을 의식을 치르듯 한 부씩 나눠준 뒤 이를 소리 내 읽으며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메이가 작가로 잠깐 활동하던 1988년에 쓴 정치 선언문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암호학과 수학의 법칙이 세계의 데이터 처리 방식과 자유, 통치 질서를 좌우하는 미래가 담겨 있었습니다. 원래 암호학 학회 CRYPTO ’88에서 나눠주려고 썼습니다. 수백 부를 인쇄해 돌렸지만, 암호학의 정치적 함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CRYPTO ’88의 청중과 달리, 빈집 바닥에 둘러앉은 이 괴짜 암호학도들은 선언문을 듣는 내내 고개를 끄덕였고, 곳곳에서 낮은 탄성이 새어 나왔습니다.
“정부가 당신을 감시할 수 없다면, 통제할 수도 없다… 정치는 누구에게도 지속되는 자유를 준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주지 못할 것이다…”
메이는 기업이 사람들의 사생활과 자유를 지켜주리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대신 수학의 법칙이 그 역할을 하리라 믿었습니다.
메이는 2017년 화상회의에서 당시 모임에 있던 사람 가운데 적어도 한두 명은 아마 비트코인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들이 사는 세상을 놓고 첫 토론을 마친 뒤, 이들은 암호학 개념을 직접 시험해보는 여러 역할극을 시작했습니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이들이 보통 괴짜는 아니었다는 사실쯤은 이미 눈치챘을 것입니다.
그날 오후부터 밤까지 이들은 종이와 봉투(envelop)로 디지털 화폐와 정보 시장, 가명, ‘가상’ 마약 거래, 평판 시스템을 만들며 놀았습니다. 놀이를 거듭하다 보니 차움이 처음 부딪혔던 문제, 곧 메타데이터(Metadata)가 악용될 위험과 마주쳤습니다. 1980년대 이후 암호학이 제자리걸음이라는 사실에 답답해하며 차움의 믹스 네트워크(Mix network)를 실제로 구현할 방법을 놓고 머리를 맞댔습니다. 토론은 밤새 이어졌고, 많은 사람이 텅 빈 휴스의 집 바닥에서 그대로 잠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휴스와 메이는 베이글을 사다가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암호학에 미칠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사이버 공간에 있는데, 이 모임을 굳이 현실의 거실 안에만 가둬둘 이유가 있을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가 누군가의 거실이 아니라 인터넷 위에서 자라야 한다고 깨달았습니다. 일주일도 안 돼 휴스는 일종의 이메일 대화방인 리메일러(Remailer) 목록, 이른바 ‘메일링 리스트 1.0’을 만들었습니다.[7] 이 목록은 여러 사람의 메일을 중계하면서 원래 보낸 이의 신원을 가명 뒤에 감췄습니다. 할 피니(Hal Finney)는 PGP 2.0을 리메일러에 결합했고, 코트렐(Cottrell)이라는 또 다른 사이퍼펑크는 메시지 전송 시각까지 감추도록 일괄 처리 기능을 더했습니다.
기술 잡지 편집자이자 휴스의 여자친구였던 주드 밀혼(Jude Milhon)은 “당신들은 한 무리의 사이퍼펑크야(You guys are just a bunch of cypherpunks)”라고 평했습니다.
‘사이버펑크’와 ‘사이퍼’를 합친 이 말은 곧 자긍심과 정치적 저항을 드러내는 이름이 됐습니다. 첫 모임이 열린 지 한 달 만에 메일링 리스트가 가동됐고, 사람들은 다음 주소로 이메일을 보내 가입할 수 있었습니다.
cypherpunks-request@toad.com
13년 만에 데이비드 차움의 믹스 네트워크 개념이 마침내 현실이 됐습니다.
사이퍼펑크의 탄생
이 메일링 리스트는 암호학과 마약 시장, 암살, 정부 정책을 둘러싼 미국 내 가장 은밀한 토론이 모여드는 곳이 됐습니다. 줄리언 어산지(Julian Assange)를 비롯해 토르와 비트토렌트 개발자들, 그리고 십중팔구 비트코인을 만든 인물까지도 초창기부터 이 리스트에 참여했습니다.
일주일 만에 구독자는 100명으로 불어났고, 그해 말에는 비슷한 리메일러가 전 세계에서 2,000개 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초기 메시지 가운데 하나가 1992년 10월 10일 공개됐는데, 두 번째 사이퍼펑크 오프라인 모임의 세부 내용을 알리는 글이었습니다. 이번 모임은 오늘날 구글이 자리한 마운틴뷰에 있던 길모어의 회사, 시그너스 서포트 사무실에서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두 번째 모임 — 1992년 10월 10일
두 번째 모임은 시그너스의 새 사무실에서 열립니다. 정확한 주소와 찾아오는 길은 추후 알려드리겠습니다.
아직 정확한 의제는 없지만, 며칠 안에 마련될 것입니다. 지금 달력에 표시해두고 친구들에게 알려주세요.
이번 모임부터 별도 공지가 있을 때까지 초대에는 전이 신뢰 체계를 적용합니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초대하고, 그 사람도 원하는 사람을 초대하는 식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첫 모임에서 시도한 암호 무정부주의 게임은 검증되지 않은 아이디어라는 점을 생각하면 기대 이상으로 성공적이었습니다. 계속 진행하고 시험해볼 만큼 쓸모 있고 재미있는 게임으로 보이므로, 이번 모임부터 계속 해볼 생각입니다.
첫 번째 세션에서는 재판매상이 생기고 평판이 형성되는 모습 등 몇 가지 흥미로운 창발적 행동을 관찰했습니다. 이번에는 두 시간 동안 게임을 한 뒤 결과를 함께 논의하겠습니다.
사이퍼펑크 리스트는 디지털 영역에서 사생활을 지킬 기술적 방어책을 논의하는 장입니다.
사이퍼펑크는 사생활이 소중하며 우리에게 더 많은 사생활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생활을 원하는 사람은 정부나 기업, 얼굴 없는 거대 조직이 호의로 베풀어주기를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사이퍼펑크는 믿습니다. 인류가 수백 년 동안 속삭임과 봉투, 닫힌 문, 전령을 이용해 자신의 사생활을 지켜왔음을 사이퍼펑크는 압니다. 사이퍼펑크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이나 의견을 말하지 못하도록 막으려 하지 않습니다.
사생활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암호화입니다. 암호화한다는 것은 사생활을 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허술한 암호학을 쓴다는 것은 사생활을 그다지 원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이퍼펑크는 사생활을 원하는 모든 사람이 이를 가장 잘 지키는 법을 배우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이퍼펑크는 암호학에 헌신합니다. 암호학을 배우고 가르치며, 직접 구현하고 더욱 발전시키기를 원합니다. 암호 프로토콜이 사회 구조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사이퍼펑크는 압니다. 시스템을 공격하는 법과 방어하는 법도 압니다. 좋은 암호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압니다.
사이퍼펑크는 직접 해보기를 좋아합니다. 공개키 암호학을 직접 적용하고 실험하기를 좋아합니다. 익명·가명 메일의 중계와 배달을 실험하기를 좋아합니다. DC-net을 실험하기를 좋아합니다.[8] 온갖 종류의 보안 통신을 시험하기를 좋아합니다.
사이퍼펑크는 코드를 씁니다. 사생활을 지키려면 누군가 코드를 써야 하며, 지켜야 할 것이 자신들의 사생활인 만큼 직접 코드를 써야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동료 사이퍼펑크들이 직접 써 보고 실험할 수 있도록 코드도 공개합니다. 보안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작은 진전도 인내심 있게 쌓아갑니다.
사이퍼펑크는 자신들이 만든 소프트웨어를 여러분이 싫어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소프트웨어를 완전히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널리 분산된 시스템을 강제로 멈출 수 없다는 사실도 압니다. 사이퍼펑크는 사생활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네트워크를 만들 것입니다.
공지
두 번째 모임
1992년 10월 10일 토요일 정오 12시 - 오후 6시
시그너스 서포트 사무실 1937 랜딩스 드라이브 마운틴뷰
두 번째 사이퍼펑크 모임은 토요일 정오에 열립니다. 존 길모어가 시그너스 서포트의 새 사무실을 모임 장소로 기꺼이 내주었습니다. 사실 이 사무실은 너무 새것이라 시그너스도 아직 입주하지 않았습니다. 거의 텅 빈 공간에서 열리는 만큼, 이번 모임에는 각자 베개(또는 의자)를 가져와야 합니다. 찾아오는 길은 메시지 끝에 있습니다.
참석자는 단계 제한 없이 전이 신뢰 방식으로 초대합니다. 원하는 사람을 초대하고, 초대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식으로 계속 이어가세요. 메일링 리스트 가입도 권해주세요. 다만 아직 공지를 아무 곳에나 올리지는 마세요. 공개적으로 알릴 때가 곧 올 것입니다.
모임에 참석할 분은 모두hughes@soda.berkeley.edu로 참석 여부를 알려주세요. 토요일 전에 게임을 준비할 수 있도록 대략적인 참석 인원을 파악하고 싶습니다.
많은 분의 요청에 따라 정오에 시작합니다. 미리 식사하고 오거나 부리토 같은 것을 가져오세요. 첫 순서에는 먹어도 괜찮은데, 어차피 게임도 그만큼 부산스러울 테니까요.
현장에서 서로 키를 교환할 수 있도록 PGP 공개키를 가능하면 디스켓에 담아 가져오세요. 키를 나누려면 휴대용 PC가 한 대, 아니 서너 대쯤 필요하니 가져올 수 있는 분은 리스트에 글을 올려 알려주세요.
첫 모임을 치른 뒤 엄격한 일정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번 모임은 대략적인 순서만 정해두겠습니다.
일정
정오부터는 다른 참가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래를 시도하는 암호 무정부주의 게임의 두 번째 세션을 진행합니다. 두 시간 동안 게임을 한 뒤 한 시간쯤 서로의 경험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지난번과 달라지는 점은 좀 더 단순해진 화폐 단위, 더 고른 상품 배분, 더 많은 감시자(정부 관계자와 그 밖의 사람들), 그리고 아마도 미리 인쇄한 양식입니다.
10분에서 20분 정도 쉬며 재정비합니다.
후반부에는 리메일러의 보안을 이야기합니다. 토론은 제가 이끌겠습니다. 프로토콜을 설계하고 공격과 방어 방법을 분석할 것입니다. 디지캐시에서 전자화폐 프로토콜을 설계할 때도 같은 작업을 해봤고, 리메일러가 훨씬 단순하기는 하지만 오후 한나절의 토론만으로 끝낼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할 오후 6시쯤까지 진행합니다.
원하는 사람은 모두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갑니다. 그 동네 식당을 잘 모르는데, 누가 괜찮은 곳을 하나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
찾아오는 길
주소는 마운틴뷰 랜딩스 드라이브 1937입니다. 101번 도로에서 앰피시어터 파크웨이(렝스토프 애비뉴의 만 쪽)로 빠져나온 뒤 첫 신호에서 우회전하고, 오른쪽 갈림길을 하나 지나 작은 언덕마루에 닿기 직전에 다시 우회전해 랜딩스 단지로 들어오세요. H동입니다.
- 사이퍼펑크는 사생활이 소중하며, 우리에게 더 많은 사생활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그러므로 사이퍼펑크는 암호학에 헌신합니다.
- 사이퍼펑크는 직접 해보기를 좋아합니다.
- 사이퍼펑크는 코드를 씁니다.
역사 속 다른 정치운동과 달리, 사이퍼펑크는 직접 행동에 나서 정부와 맞붙었고 끝내 승리했습니다.
주고받은 메시지는 온라인 아카이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해 메시지 아카이브는 이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존 길모어의 장난질
길모어는 회사를 운영하고 암호 반역자들의 모임을 꾸리면서도 NSA를 골탕 먹이는 또 다른 취미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NSA와 법정에서 싸워 사이퍼펑크에게 또 한 번 승리를 안겼습니다.
그해 6월, 길모어는 암호학자 윌리엄 프리드먼(William Friedman)이 쓴 책들을 알게 됐습니다. 프리드먼은 NSA의 전신인 미국 신호정보국을 세운 인물이었습니다. 프리드먼의 저서 두 권을 읽은 길모어는 나머지 네 권이 기밀로 묶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는 기밀 해제를 요청했습니다. NSA는 거절했습니다.
NSA가 거절한 것은 단순히 길모어를 골칫거리로 여겨서가 아니라, 그가 우연히 NSA의 창립 문서 가운데 하나를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동화 속 ‘호기심쟁이 조지(Curious George)’처럼 길모어는 문서의 행방을 추적하기 시작했고, 친구의 제보를 따라 버지니아까지 갔습니다. NSA가 기밀로 지정한 바로 그 책들을 찾아낸 그는 자신의 집으로 우편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길모어를 감시하던 NSA는 책을 넘기라고 요구했습니다. 길모어는 “비교적 단순한 암호학 기법을 다룬 교과서일 뿐”이며 합법적으로 입수했다고 맞섰습니다. NSA를 따돌리려고 언론에 이야기를 제보했고, NSA를 정면으로 다룬 기사가 신문 1면에 실리자 당국은 길모어와 책을 쫓는 일을 접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책들은 기밀에서 해제됐습니다. NSA는 세간의 이목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물러났습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수고 끝에 찾아낸 책은 길모어와 사이퍼펑크에게 얼마나 쓸모가 있었을까요?
놀랍게도 아무 쓸모도 없었습니다. 길모어는 그저 NSA에 맞서 정부도 패배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길모어 1, NSA 0.
말썽에 휘말린 PGP 2.0
이듬해 초인 1993년, PGP는 미국 정부의 표적이 됐습니다. RSA의 지식재산권 분쟁으로 짐머만에게 이목이 쏠리자 규제 당국은 무기수출통제법 위반 혐의로 형사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암호학은 줄곧 군수품으로 간주돼 탄약과 같은 등급으로 통제받았습니다. 돌과 분필이 전부이던 옛날과 달리, 1990년대는 소프트웨어와 컴퓨팅이 미국 경제를 이끄는 디지털 시대였습니다.
짐머만의 재판 기일이 잡히자 EFF와 대중은 그의 편에 섰습니다. 그는 정부에 맞서는 정치적 퍼포먼스로 PGP 소스 코드를 양장본으로 펴냈습니다. 책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수정헌법 제1조의 보호를 받았지만 암호학은 불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암호화 소스 코드를 담은 책은 어떨까요? 법은 이것을 책으로 봐야 할까요, 암호학으로 봐야 할까요?
그러나 대중이 정부를 아무리 조롱해도 한 가지 사실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짐머만은 군수품법을 어겼다는 혐의를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9]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에서 히피로 변신한 그의 앞날은 암담해 보였습니다.
“변호사 열 명이 한목소리로 가망이 없다고 말하는 걸 듣는 건…… 벽돌 더미에 짓눌리는 기분이었어요. 최악의 날이었죠”라고 짐머만은 말했습니다.
내로라하는 변호인단은 패배를 확신했지만, 그중 한 명이 묘안을 떠올렸습니다. 필 뒤부아(Phil Dubois)는 범죄자와 유명인,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친 별난 사람들을 기발한 방식으로 변호하며 이름을 알린 인물이었습니다. 혐의를 부인하며 선처를 호소하는 대신 공세로 돌아서 정부를 자유의 적으로 몰아붙이자고 제안했습니다. 이 전략은 짐머만 변론의 핵심이 됐습니다. 다행히 정부는 곧 제 발로 올가미에 들어갔습니다.
짐머만 사건 직후인 1993년 4월, 266호 법안은 다른 모습으로 되살아났습니다.
클리퍼 칩.
클리퍼 칩을 침몰시키다
NSA가 연방·주·지방 법 집행기관에 “가로챈 음성 및 데이터 전송을 해독할 능력”을 주는 감시 장치를 내놓은 시점은 기막혔습니다. 이미 짐머만 편에 서서 잔뜩 성난 국민에게 기름을 들이붓는 꼴이었습니다.
클리퍼 칩셋은 기기에 암호화 기능을 넣기 위한 표준이었습니다.[10] 1970년대 DES처럼 클린턴 행정부가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암호화 기술을 통제하려 한 시도였습니다. 정부의 바람은 단순했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모든 통신을 들여다보며 ‘모두를 보호’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DES는 백도어가 있다는 의심만 받았지만, 클리퍼 칩은 아예 숨길 생각도 없이 백도어가 칩 설계에 박혀 있다는 사실을 제안서에서 대놓고 밝혔습니다.
DES의 56비트 키보다 조금 나은 80비트 키를 썼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수많은 정부 사업처럼, 당시에도 결과물의 품질만큼은 믿고 맡길 만했습니다! (눈치채지 못하셨다면, 저는 반어법을 쓰고 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정부가 벌인 일을 생생히 기억하던 대중은 클리퍼 칩 발표에 거세게 들고일어났습니다. 정부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건드렸습니다.

잔뜩 들뜬 사이퍼펑크 무리
EFF 같은 시민자유 단체는 이 제안이 자유를 어떻게 위협하는지 차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일반 대중 사이에서는 광기와 편집증이 들끓었습니다. 오웰(Orwell)의 디스토피아 소설 《1984》가 곧 현실이 될 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위기감에 휩싸일수록 사이퍼펑크들은 오히려 신이 났습니다.
이런 장면을 떠올려보세요. 종말을 예견하고 대비해왔는데, 10년 뒤 정말 종말이 닥칩니다. 세상이 무너질 판인데도 사람들이 허둥대며 당신이 오래전에 내린 결론에 이제야 도달하는 모습을 보면, 묘하게 신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이퍼펑크들은 바로 이날을 예견했고 오래 기다렸습니다.
“전쟁이 우리 앞에 닥쳤다”라고 티머시 C. 메이가 선언했습니다. “클린턴과 고어(Gore) 패거리는 자신들이 ‘빅 브라더’의 열성적인 지지자임을 드러냈다.”
티머시 C. 메이와 에릭 휴스, 존 길모어를 비롯한 사이퍼펑크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즉시 결집했습니다. 공개적으로 칩에 반대하고 철회를 외치며 격렬한 논쟁을 벌였지만, 정작 메이를 비롯한 많은 이는 클리퍼 칩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칩 설계가 허술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소유자가 아닌 누군가가 개인키(Private key)를 손에 넣는 순간 공개키 암호학은 근본부터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칩에 박힌 백도어(Backdoor)는 그들에게 고약한 농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칩이 공개된 날, 메이는 이렇게 썼습니다.
보낸 사람: tcmay@netcom.com (Timothy C. May)
날짜: Fri, 16 Apr 93 21:19:43 PDT
받는 사람: cypherpunks@toad.com
제목: 중요--우리가 이겼다……가 아니네!
메시지-ID:9304170419.AA26923@netcom.netcom.com
MIME 버전: 1.0
콘텐츠 유형: text/plain
먼저, 나쁜 소식부터--정부가 암호화를 통제하려 한다. 그들은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결국에는 “제대로 된 암호화 기술”을 금지하려 들 게 분명하다. 짐머만과 다른 이들이 정부의 눈길을 끈 것이 확실하다.
이제 좋은 소식--아 무 상 관 없 다. 게임은 끝났다. 우리가 이겼다. 정부가 시간을 끌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아무 상관 없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불리해진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하려는 국가의 가련한 몸부림이다. 이 놀라운 “정책” 발표는 패배를 암묵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까요. 무료로 쓸 수 있는 군용 규격의 데이터 암호화 기술을 이제 누구나 손쉽게 구할 수 있다. 1년 안에 그에 맞먹는 무료 음성 암호화 소프트웨어도 등장할 것이다. 이미 세상에 퍼진 암호화 기술을 정부가 다시 거둬들일 방법은 없다. 그들이 법을 통과시키도록 내버려두세요. 우리는 원하는 대로 할 것이다--그리고 결국 그들 스스로 우리를 돕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시그너스 서포트 사무실에서 긴급회의를 열었습니다. 사이퍼펑크 50명이 방 안을 빽빽이 채운 채 정부에 맞서 판을 뒤집을 방법을 짜냈습니다.
영화 《파이트 클럽》의 타일러 더든(Tyler Durden)이 임무를 나눠주듯, 사이퍼펑크들은 메이가 화이트보드에 장난삼아 그린 “Big Brother Inside”의 패러디 문구 “Intel INside”를 스티커로 찍어 컴퓨터 매장 곳곳에 붙였습니다.

다른 이들은 “클리퍼에 맞서 싸워라”라는 문구와 메이의 〈암호 무정부주의자 선언〉 구절을 넣은 티셔츠를 디자인했습니다.
휫필드 디피는 클리퍼 칩 논쟁에 큰 영향을 미쳤고, 훗날 클린턴 행정부에 보내는 유명한 공개서한을 썼습니다.
“헌법에는 사적인 대화를 나눌 권리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누군가 그 권리를 막을 수 있으리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전자 통신은 매우 뛰어나고 저렴해져, 직접 만나는 사치를 어쩌다 한 번밖에 누릴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긴밀한 사업 관계와 인간관계가 꽃피는 세상이 눈앞에 와 있습니다. 이들이 통신 내용을 사적으로 지킬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사생활이 오직 부유한 사람들만의 특권이 되는 세상으로 성큼 다가서게 됩니다. 함의는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통신 보안을 두고 내리는 결정이 내일 우리가 살아갈 사회를 결정할 것입니다.”
이듬해 초인 1994년, 전문가와 업계 주요 인사, 학자 40명으로 구성된 국가위원회가 클린턴 행정부에 공개서한을 보내 클리퍼 제안을 철회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서명자 명단에는 다음 인물들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 공개키 암호학을 처음 개척한 세 사람 모두: 마틴 헬먼, 휫필드 디피, 랠프 머클
- RSA 암호 체계를 공동 개발한 세 사람 중 한 명인 로널드 리베스트(Ronald Rivest)
- 디지캐시 창립자 데이비드 차움
- PGP 개발자 필 짐머만
“클리퍼 제안은 채택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제안과 관련 표준이 자발적 선택이라는 형태로라도 추진된다면, 사생활 보호는 약화되고 혁신은 더뎌지며 정부의 책임성은 낮아지고 국가 통신 기반시설의 성공적인 발전에 필요한 개방성은 위협받으리라 믿습니다.”
정부: “걱정 마, 우리가 다 알아서 해”
이듬해인 1995년 5월, NSA가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은 채 클리퍼 칩이 안전하다고 대중을 안심시키려는 보도자료를 내놨지만, 내용은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클리퍼’ 알고리즘은 암호학적으로 매우 강력하다는 점을 강조해야 합니다. AT&T TSD 3600을 비롯한 유사 장치의 제조사들은 거의 예외 없이 DES 암호화를 사용합니다. DES는 56비트 키를 사용합니다. 반면 ‘클리퍼’는 80비트 키를 사용하는 알고리즘입니다. 불과 24비트 차이지만 가능한 조합 수는 1,600만 배나 늘어나므로 해독하기가 기하급수적으로 어려워집니다. 이 점은 암호화 방식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이며 ‘클리퍼’ 암호화를 매력적인 선택으로 만듭니다.”
1994년 무렵 통신 장비 제조사 AT&T는 클리퍼 칩을 탑재한 하드웨어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통신사들도 칩을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사이퍼펑크의 이념이 세상 곳곳에 퍼진 뒤였습니다. 칩이 상업 제조사에 배포되자 사이퍼펑크들은 베일에 싸여 있던 설계를 곧바로 파고들었습니다.
AT&T의 임베디드 시스템 엔지니어 맷 블레이즈(Matt Blaze)는 생산용 칩을 시험하는 일을 맡아 설계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암호 자체는 비교적 안전하지만, 암호화된 백도어에 접근할 때 NSA가 쓰는 키의 검증값이 고작 16비트라 무차별 대입 공격(Brute-force attack)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알고 보니 블레이즈 역시 사이퍼펑크이자 메일링 리스트 회원이었습니다. 그는 연구 결과를 정리해 1994년 8월 공개했고, 칩 설계에 치명적인 허점이 있음을 입증했습니다. 이 결과가 나온 직후 정부와 상업 제조사 모두 클리퍼 칩은 실용성이 없다고 판단해 폐기했습니다.
마침내 암호 전쟁의 흐름이 사이퍼펑크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에도 사이퍼펑크의 싸움은 계속됐고, 무대는 법정으로 옮겨갔습니다…
필립 R. 칸(Phillip R. Karn) 대 미국
클리퍼 칩의 취약성이 공개된 직후, 프로그래머 필립 R. 칸은 암호학을 군수품으로 분류한 정부 결정에 도전했습니다. 그는 암호화 알고리즘의 소스 코드가 실린 책도 규제 대상인지 정부에 판정을 요청했습니다. 정부는 책까지 군수품이라고 볼 근거를 대지 못했고, 결국 이 책은 군수품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결론이 났습니다.
칸은 책 속 소스 코드를 그대로 담은 부록 CD도 따로 판정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CD가 곧바로 실행될 수 있다는 이유로 군수품법의 적용 대상이 됐습니다. 종이에 인쇄된 코드와 디지털 매체에 담긴 코드를 가른 기준은 실행하거나 악용하기가 얼마나 쉬운가였습니다. 그래도 칸의 싸움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대니얼 J. 번스타인(Daniel J. Bernstein) 대 미국
이듬해인 1995년, 칸의 소송은 또 다른 도전의 발판이 됐습니다. 버클리 학생 대니얼 J. 번스타인은 자신이 만든 암호 프로토콜을 설명한 논문과 소스 코드를 발표하려 했고, 출판을 막는 군수품법을 상대로 캘리포니아 북부 연방지방법원에 소송을 냈습니다. 법원은 ‘칸 대 미국’을 선례로 삼아 논문에 담긴 소스 코드도 수정헌법 제1조가 보호하는 표현이라고 판결했습니다.[11] 칸 사건이 문자로 적힌 소스 코드는 군수품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봤다면, 번스타인 사건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스 코드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수정헌법 제1조의 보호를 받는다고 인정했습니다. 암호학과 표현의 자유를 잇는 법리가 서서히 모습을 갖췄습니다.
피터 융거(Peter Junger) 대 미국
다음으로 군수품법에 도전한 사람은 피터 융거였습니다. 기초 원리부터 차근차근 가르치기를 좋아한 법학 교수인 그는 학생들이 개념만 공부하지 말고 직접 그 개념을 다뤄 보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강의 교재에 암호화 프로그램을 넣었다가 이것이 암호학의 ‘수출’로 분류되면서, 미국 시민이 아닌 학생은 수업을 들을 수 없게 됐습니다. 제대로 가르칠 길이 막히자 융거는 군수품법이 수정헌법 제1조에 어긋난다며 소송을 냈습니다.
칸과 번스타인 판례를 발판으로 삼은 융거는 1999년 소송에서 이겼고, 법원은 소프트웨어도 수정헌법 제1조의 보호를 받는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러나 융거가 처음 문제를 제기한 직후 클린턴 행정부는 먼저 물러섰습니다. (융거 사건 자체가 종결된 것은 훨씬 뒤의 일입니다.)
그해 말인 1996년 10월 12일, 빌 클린턴 대통령은 행정명령 13026호에 서명했습니다.[12] 암호학은 공식적으로 군수품 목록에서 제외되고 규제가 한층 느슨한 통제 목록으로 옮겨졌습니다. 암호학의 수출은 더 이상 금지되지 않았습니다.
이 명령으로 수출 처벌의 근거가 사라지면서 짐머만 사건도 기각됐습니다. 한 차례 전투에서는 이겼습니다. 하지만 전쟁까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헬먼, 디피, 머클에서 시작된 싸움이 다시 돌아오다
암호학을 둘러싼 나머지 소송들이 마무리되던 1998년, 길모어는 정부가 앞으로도 암호학에 개입할 여지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 공세를 이어갔습니다.
사이퍼펑크 공동체는 DES를 겨냥했습니다.
1976년에 처음 공개된 DES는 상업용 암호화 표준이었습니다. 마틴 헬먼과 휫필드 디피가 반대했던 기술이자, 두 사람이 공개키 암호학을 세상에 공개하게 만든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DES의 56비트 키가 이론상 무차별 대입 공격에 취약하다고 비판했지만, 1970년대의 컴퓨팅 성능으로는 그런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1998년에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그해 말 RSA 데이터 시큐리티는 DES로 암호화된 메시지를 해독하는 사람에게 상금을 걸었습니다.
5개월 뒤 암호는 풀렸습니다. RSA는 누가 더 빨리, 더 깔끔하게 해낼 수 있는지 보려고 상금을 1만 달러로 올렸습니다. 첫 도전을 놓친 길모어는 그 무렵 성공한 사업가가 돼 있었고, 암호학자 폴 코처(Paul Kocher)와 함께 새 도전에 뛰어들었습니다. 코처는 공개키 암호학의 선구자 가운데 한 명인 마틴 헬먼에게 직접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역사가 한 바퀴 돌아 출발점으로 되돌아온 듯한 조합이었고, 길모어와 코처는 22만 2,000달러를 들여 ‘딥 크랙’이라는 컴퓨터를 만들었습니다.
56시간 만에 DES가 뚫렸습니다.

20년 가까이 이어진 논쟁 끝에 DES는 마침내 깨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식 표준의 자리에서도 밀려났습니다.[13]
2000년 무렵, 정부는 암호학을 둘러싼 모든 제한과 규제를 철폐했습니다.
오픈 소스(Open source) 암호학 기술도 마침내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1990년대 초만 해도 세상은 암호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지만, 정부가 나서서 사람들에게 왜 암호학이 중요한지 몸소 가르쳐 줬습니다.
사이퍼펑크는 싸웠고, 이겼습니다. 암호학을 통해 사생활과 자유를 지킬 권리를 지켜냈습니다. 이들의 질주는 2000년대에도 멈추지 않았고, 그 궤적 위에서 토르와 딥 웹, 토렌트와 불법 복제, 위키리크스와 투명성 운동, 그리고 이 글의 핵심인 비트코인과 암호화폐가 솟아났습니다.
다음 4부에서는 토르와 비트토렌트, 위키리크스가 어떻게 등장했고 그 흐름 끝에서 비트코인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살펴봅니다.









2000년대의 시작과 함께 한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며, 이야기는 4부 〈새천년〉으로 이어집니다.
- 번역 및 각주: GPT 5.6 Sol
- 검수: 나!
각주
- [1] **ROM 소스 코드** — ROM은 기기가 켜질 때 필요한 저수준 프로그램을 담는 읽기 전용 메모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스 코드는 매킨토시 ROM의 동작을 구현한, 사람이 읽을 수 있는 프로그램 원문을 뜻합니다.
- [2] **폰 프리킹(Phone phreaking)** — 전화망의 신호 체계와 교환 장치를 연구하거나 악용해 무료 통화·우회 접속 등을 시도하던 해커 문화입니다. 존 드레이퍼의 별명 ‘캡틴 크런치’는 시리얼 상자 사은품 호루라기가 당시 전화망 제어 주파수와 맞아떨어진 일에서 비롯됐습니다.
- [3] **WELL** — Whole Earth ’Lectronic Link의 약자입니다. 1985년에 출범한 초기 온라인 공동체로, 인터넷 문화와 디지털 시민권 담론이 형성된 주요 공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 [4] *수정헌법 제4조** — 인용문은 부당한 수색과 압수를 막는 미국 수정헌법 제4조입니다.
- [5] **PGP와 RSA** — PGP는 공개키 암호학을 이용해 키를 교환하고 대칭키 암호로 실제 데이터를 처리하는 혼합 방식을 사용합니다.
- [6] **도메인 특화 언어(Domain-specific language)** — 범용 프로그래밍 언어와 달리 특정 분야의 문제를 표현하고 해결하는 데 맞춰 만든 언어입니다. 데이터베이스 질의를 위한 SQL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 [7] **믹스 네트워크와 익명 리메일러** — 믹스 네트워크는 여러 사용자의 메시지를 모아 순서와 형태를 뒤섞은 뒤 전달함으로써 발신자와 수신자의 연결을 추적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익명 리메일러는 이 발상을 이메일에 적용해 원래 발신자의 주소와 전송 흔적을 감춥니다.
- [8] **DC-net** — ‘Dining Cryptographers network’의 약자입니다. 참여자들이 암호학적 정보를 나눠 발신자의 신원을 밝히지 않은 채 메시지를 보낼 수 있도록 데이비드 차움이 제안한 익명 통신 방식입니다.
- [9] **암호학과 군수품 수출통제** — 당시 미국은 무기수출통제법, 국제무기거래규정, 미국 군수품 목록을 통해 강력한 암호 소프트웨어의 수출을 규제했습니다. 짐머만은 수사를 받았지만 기소되지는 않았습니다.
- [10] **클리퍼 칩과 키 에스크로** — 클리퍼 칩은 장치별 복구 키 정보를 여러 기관이 나눠 보관하는 ‘키 에스크로’ 체계로, 정부가 하나의 개인키를 쥐는 구조가 아니었습니다. 맷 블레이즈가 찾아낸 핵심 문제는 16비트 키를 무차별 대입해 암호문을 푸는 것이 아니라, 16비트 검증값을 조작해 정부의 복구 접근을 우회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EFF의 당시 기술 설명](https://www.eff.org/effector/5/14)
- [11] **소스 코드도 표현인가** — 번스타인 사건은 컴퓨터 소스 코드가 단순한 기계 기능을 넘어 수정헌법 제1조가 보호하는 표현에 해당하는지를 다퉜습니다. 1996년 연방지방법원은 소스 코드를 표현으로 인정했고, 이후 항소심도 그 보호를 재확인했습니다. [EFF의 사건사](https://www.eff.org/about/history)
- [12] **행정명령 13026호** — 이 명령은 1996년 11월 15일 자이며 암호 수출통제를 없애지 않았습니다. 암호 제품을 국무부의 군수품 목록에서 상무부의 통제 목록으로 옮겨 계속 관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미국 정부 원문](https://www.govinfo.gov/content/pkg/CFR-1997-title3-vol1/pdf/CFR-1997-title3-vol1-eo13026.pdf)
- [13] **DES와 딥 크랙** — 무차별 대입 공격은 가능한 키를 하나씩 모두 시험하는 공격입니다. EFF의 딥 크랙은 1998년 DES의 56비트 키를 현실적인 시간 안에 깰 수 있음을 보였고, NIST가 DES를 승인 알고리즘에서 공식 철회한 해는 2005년입니다. [NIST 암호 표준 지침](https://nvlpubs.nist.gov/nistpubs/specialpublications/nist.sp.800-175b.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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