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텍스트의 번역자가 문체를 결정하는 근거는 텍스트 속에서 깜박거리는 무수한 작은 신호들입니다. 이 번역자가 보는 신호를 저 번역자는 못 볼 수도 있고, 이 번역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호를 저 번역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 작은 신호들에 근거한 작은 판단들이 축적되다 보면 번역본마다 독특한 개성을 지니게 되지요. 오늘 저는 당신이 서로 다른 번역의 개성을 즐기고 차이를 구축하는 취향과 판단의 근거를 가늠하고 나아가 그 차이들 속에서 다채롭게 드러나는 원전의 매력을 풍요롭게 감상하는 새로운 재미를 알게 되면 참 좋겠다 바라며 이 편지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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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레터에서 말씀드렸듯 저는 『이성과 감성』『오만과 편견』의 화자를 갓 스물이 된 제인 오스틴과 크게 다르지 않은 소설 속 또 하나의 등장인물로 상정하고 입말에 가깝게 번역했는데요. 이 소설들의 화자가 편짓글에 등장하는 제인 오스틴 본인과 매우 비슷할 뿐 아니라, 당대의 여러 텍스트를 비교해 볼 때 이 서술이 ‘글ecrit’보다는 부유하는 ‘말parole’에 훨씬 가깝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에요. 이처럼 사람들의 연애 이야기와 뒷담화를 귓전에 속살거리는 듯한 로맨스 장르 속 숨은 화자의 전통은 「브리저튼」이나 가십걸>과도 이어지고요. 이렇게 문체를 결정하고 나면 번역하는 과정에서 텍스트의 작은 신호들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지 계속 점검하게 되는데, 아직은 다행히도 번역하는 과정에서 제 판단이 옳았다는 확신이 굳어지고 있어요. 특히 『이성과 감성』에서 “나I”라는 일인칭 대명사가 불쑥 튀어나왔을 때는 내심 기분이 좋았답니다.
"I" come now to the relation of a misfortune, which about this time befell Mrs. John Dashwood. It so happened that while her two sisters with Mrs. Jennings were first calling on her in Harley-street, another of her acquaintances had dropped in — a circumstance in itself not apparently likely to produce evil to her. But while the imagination of other people will carry them away to form wrong judgments of our conduct, and to decide on it by slight appearances, one’s happiness must in some measure be always at the mercy of chance.
제가 이제 한 가지 불행한 사연을 전할 때가 되었네요. 얼추 이 시기 존 대시우드 부인에게 있었던 일이지요. 하필 시누이들이 제닝스 부인과 함께 할리스트리트에 처음 방문했을 때, 또다른 지인이 왔다 간 거예요. 이 일 하나만 봐서는 부인에게 특별히 나쁠 것 같지 않은 일이지만요. 다른 사람들의 상상력이 우리 행실을 오판하고 사소한 겉모습으로 단정지으려 한다면 우리 행복은 언제나 어느 정도 우연에 좌우되기 마련이니까요.『이성과 감성』 2권 14장, 김선형 옮김
제인 오스틴의 초기작 두 권의 서술이 작가와 크게 거리가 없는 화자의 입말이라고 상정하고 나서, 오스틴이 문단을 구축하는 방식을 잘 들여다 보면 이 소설들이 지닌 엄청난 가독성의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문단을 쪼개 보면 문장sentence, 구절phrase, 단어word들이 지닌 정보값이 모두 작은 클리프행어들로 구성되어 있거든요. 문장도, 구절도, 심지어 단어들도 그 다음이 궁금해지게 만드는 질문들을 품고 있단 말이에요. 위의 문단을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이제 제가 한 가지 불행한 일을 이야기할 때가 되었네요. (아니, 무슨?) 얼추 이 시기 존 대시우드 부인에게 일어난 일이지요.(응, 누구?--작품의 악역이므로 독자는 그의 불행을 내심 바라는 터에) 하필 시누이들이 제닝스 부인과 함께 할리스트리트에 처음 방문했을 때, 또다른 지인이 왔다 간 거예요. (에잉, 그걸로 무슨 불행씩이나...)이 일 하나만 봐서는 부인에게 특별히 나쁠 것 같지 않은 일이지만요.(마치 독자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다른 사람들의 상상력이 우리 행실을 오판하고 사소한 겉모습으로 단정지으려 한다면 우리 행복은 언제나 어느 정도 우연에 좌우되기 마련이니까요. (호오, 그래서 무슨 일이?)
『오만과 편견』에서는 독자를 단숨에 몰입하게 만드는 이런 서술적 기교가 한층 세련되게 정제되어서 그야말로 한 문단, 한 문장, 한 구절마다 독자를 쥐락펴락하는 위력적 페이지터너가 탄생하게 됩니다. 빙리 씨가 베넷 씨의 집에 방문한 후에 일어난 일들을 묘사하는 다음 문단을 보세요. 쉼표나 세미콜론으로 정보값이 끊어질 때마다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을 궁금하게 만드는 작은 질문들이 의도적으로 심겨 있습니다.
곧바로 저녁 만찬 초대장이 발송되었지요. (곧장? 베넷 부인의 마음이 급하구나) 베넷 부인은 벌써 살림 솜씨를 인정 받을 코스 메뉴를 머릿속에서 다 짰는데, (그런데?) 그만 거사를 미뤄야 한다는 답장이 왔어요. (아니 왜?) 빙리 씨가 다음 날 런던에 갈 일이 있어서 초대를 수락할 수 없다 어쩌고저쩌고 그런 얘기였지요. (마음이 없나? 아니나다를까) 베넷 부인은 몹시 마음이 심란해졌어요.(그랬겠지.) 허트퍼드셔에 온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시내에 무슨 볼 일이 있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어요. 빙리 씨는 네더필드에 꼭 정착해야 하는데, 영영 그러지 않고 늘 이곳저곳 정신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일까 봐 너무 걱정이 되었어요.(베넷 부인의 김칫국 드링킹이 어느 수준인지 예측도 못한 독자가 뒤통수를 맞음) 빙리 씨가 연회에 대동할 대규모 일행을 모으느라 런던에 갔을 거라는 생각을 레이디 루카스가 처음 해내서 베넷 부인의 근심을 다소 가라앉혀 줬지요. (이것도 기발한 발상인 걸. 하지만?) 아니나다를까 곧 빙리 씨가 연회에 열두 숙녀와 일곱 신사를 데리고 올 거라는 소식이 전해졌답니다. (흥미진진) 젊은 아가씨들은 숙녀의 수가 너무 많다고 속상해했지만(했지만?), 무도회 바로 전날 12명이 아니라 6명만 데려왔다는 소식이 전해져 한결 마음을 놓았어요.(오오) 숙녀는 누이 다섯과 친척 한 명이라더군요. 하지만 정작 실제로 연회장에 입장한 일행은 다섯 명뿐이었어요. 빙리 씨, 두 누이, 큰누나의 남편, 그리고 또 다른 청년 한 명이었죠.
An invitation to dinner was soon afterwards despatched; and already had Mrs. Bennet planned the courses that were to do credit to her housekeeping, when an answer arrived which deferred it all. Mr. Bingley was obliged to be in town the following day, and consequently unable to accept the honour of their invitation, etc. Mrs. Bennet was quite disconcerted. She could not imagine what business he could have in town so soon after his arrival in Hertfordshire; and she began to fear that he might always be flying about from one place to another, and never settled at Netherfield as he ought to be. Lady Lucas quieted her fears a little by starting the idea of hisbeing gone to London only to get a large party for the ball; and a report soon followed that Mr. Bingley was to bring twelve ladies and seven gentlemen with him to the assembly. The girls grieved over such a number of ladies; but were comforted the day before the ball by hearing that, instead of twelve, he had brought only six with him from London, his five sisters and a cousin. And when the party entered the assembly-room, it consisted of only five altogether: Mr. Bingley, his two sisters, the husband of the eldest, and another young man.『오만과 편견』 1권 3장, 김선형 옮김
놀라운 것은 반전과 반전을 거듭하는 사건이 연속되는 이 문단이 결국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또 다른 청년 another young man”, 즉 다아시 씨로 귀결된다는 점입니다. 이 다음 문단은 물론 독자의 궁금증을 따라 바로 이 청년, 다아시 씨를 다루게 될 테고요. 그러니 독자가 다급히 다음 문단을 읽지 않을 수가요.
따라서 제인 오스틴의 문단을 번역할 때 이 엄청난 가독성을 해치지 않으려면, 궁금증을 유발하는 이런 정보값의 잘 계산된 순차성을 지키는 것이 구두점이나 문법적 정확성, 즉 축자적 정합성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번역에서 정보의 순차성을 지키려 하다 보면 이 두 가지 목표가 상충해서 우선순위를 정해야 할 때가 오거든요. 보석상에 간 엘리너가 자기 앞에서 이쑤시개 케이스 하나를 사면서 꼬치꼬치 따지며 시간을 끄는 허영심 강한 남자 때문에 짜증이 잔뜩 난 상황을 그린 후 자기만의 상념에 빠져 있는 메리앤에게로 시선을 옮기는, 다음 대목처럼 말이지요.
Marianne was spared from the troublesome feelings of contempt and resentment, on this impertinent examination of their features, and on the puppysim of his manner in deciding on all the different horrors of the different toothpick-cases presented to his inspection, by remaining unconscious of it all.
1. 메리앤은 이 모든 게 아예 안중에 없었기에, 외모를 관찰하는 무례한 시선이나 구경하라고 내놓는 온갖 흉물 이쑤시개 케이스들을 놓고 결정하는 허세 가득한 태도를 보고 괜히 번거롭게 사람을 경멸하거나 원망하는 감정을 면할 수 있었어요.
2. 메리앤은 괜히 번거롭게 사람을 멸시하거나 원망하는 감정을 면할 수 있었어요. 노골적으로 외모를 관찰하는 무례한 시선도, 구경하라고 내놓는 별별 흉물 이쑤시개 케이스들을 잔뜩 허세를 부리며 따져보고 결정하는 그의 태도도, 아예 안중에 없었거든요.『이성과 감성』 2권 11장, 김선형 옮김
번역자의 우선순위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번역이 가능하겠지만 일단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비교해 보겠습니다. 1은 마침표로 끝나는 문장을 하나의 의미 단위로 보고 축자적 정합성을 중심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2는 문체의 속도감을 더 중시해서, 구절 단위의 정보값을 순차적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물론 1이 무난한 선택입니다. 하나 제인 오스틴의 경우, 18세기 말 19세기 초 영국의 구두점 활용법이 지금과 좀 다르다는 점을 감안하면 마침표보다는 쉼표와 세미콜론을 기준으로 정보값을 나누어 앞서 설명한 대로 경쾌한 읽기의 속도를 지키는 쪽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는 정보가 문단의 맨 마지막에 위치하게 되면 메리앤의 몽상가적 성격을 설명하는 다음 문장과 자연스레 이어지게 되니까요. 그러면 오스틴 소설의 가장 큰 힘, 별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책을 놓기 어려울 정도로 독자를 휘어잡는 페이지터너의 속성이 조금 더 잘 살아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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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문학을 번역하는 사람이 맞닥뜨리는 딜레마를 구체적인 고민과 선택의 사례로 풀어 보았어요. 번역가는 뭐니 뭐니 해도 문학 텍스트를 읽는 사람이고 제가 읽은 제인 오스틴은 뭐니 뭐니 해도 단어, 구절, 문장 단위로 클리프행어를 촘촘히 심어놓는 작가, 독자가 허겁지겁 다음 이야기를 갈구하게 만드는 이야기꾼입니다. 이 강력한 추진력 -- 제인 오스틴의 초기 소설이라는 문학 텍스트의 핵심 속성 --을 재현하기 위해 저는(문학 텍스트를 번역하는 우리 모두는) 오늘도 이런 저런 고민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2025년 4월 23일에
김선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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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와.. 오늘 글에서 번역 일의 정수를 엿본 것 같아요! 원서를 통한 감동을 고스란히 전하기 위한 노력이 상상 이상입니다~ 그저 두가지 어휘를 알기만 해선 번역이 밋밋하겠구나 싶어요~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느끼고 이해하기 위해선 시대 배경이나 문화도, '말의 늬앙스'에도 민감하고, 모국어 활용도 능통해야 제대로 전할 수 있겠군요^^ 이렇게 잘 전달하기 위해 몇 번을 읽고, 작품 속에 들어가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번역가 선생님들이 계셔서 저희는 즐겁게 문학을 즐길 수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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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
읽지 않은 뉴스레터들이 쌓이니 부담이 되기도 하는데 제인 오스틴의 편지함은 늘 행복한 마음으로 신나게 열어보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편지에 대한 감사인사를 언제나 드리고 싶었는데 오늘 편지가 또 어찌나 재밌던지 불쑥 달려왔습니다. 좋아하는 작가가 더욱 풍성하게 와닿는 이 모든 노력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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