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의 독자들

토니 모리슨의 부고에 새겨진 제인 오스틴

여성의 자중(自重)과 어떤 문학적 계보

2025.04.16 | 조회 9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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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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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편지함

탄생 250주년을 맞는 작가 제인 오스틴의 모든 것

 

2019년 토니 모리슨이 88세를 일기로 소천했다는 부고 기사들에는 뜻밖의 새로운 정보가 하나 실려 있었습니다. 그가 성장기에 가장 즐겨 읽고 사랑했던 작가가 제인 오스틴과 레오 톨스토이라는 짧은 언급이었지요. 하지만 제 인생의 작가들이 한 자리에 모인 이 문장을 읽고 얼마나 뭉클하게 벅차올랐는지 모릅니다. 이들은 제가 삶을 겪는 시간에 비례해 더욱더 사랑하게 되는 몇 안 되는 작가들이기도 한데요. 왜냐하면, 벌거벗은 삶의 진리는 환멸과 허무와 부조리일지라도, 그것을 알지라도, 무의미의 절망을 넘어 의미를 소생시키는 희망과 관용과 사랑의 힘, 그 실낱 같은 가능성을 기어코 붙잡아 우리에게 납득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문학적 거장은 물론 삶의 스승으로 삼아 마땅한 아름다운 사람의 향기를 풍기기 때문입니다. 시련과 역경의 바람이 조금만 불면 슬픔과 비관에 팔랑팔랑 휘둘려 쓰러지는 저 같은 사람이 그 거목처럼 단단한 자중에 꼭 매달려 삶의 파고를 넘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굳건하고 믿음직한 따스함이 강고하게 활자와 행간을 그득그득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 세상, 그 세상 속 사람들을 실체적으로 체감하고 사랑하게 하는 글쓰기의 양식, 펄떡펄떡 뛰는 심장의 뜨거움이 배어나는 관점, 치졸하고 졸렬한 구석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지성과 낙관의 배포, 나아가 전례없는, 독보적으로 고유한 문학적 언어와 인물과 형식을 발명해낸 작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제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가 죽음을 앞두고 제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들의 이름을 호명했을 때, 어쩐지 저는 그들을 향한 제 사랑으로 함께 손잡고 연대한 듯 벅찬 감정에 휩싸였더랍니다.

영국의 백인 여성 작가와 러시아의 백인 남성 작가를 가장 사랑했다는, 어찌 보면 도발적인 이 고백을 뜬금없이 자신의 부고에 꼭 남기고 싶었던 마음을 저는 가끔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제 기억으로 토니 모리슨은 단 한 번도 생전에 제인 오스틴을 논한 적이 없거든요. 고인의 허락이나 당부가 없었다면 그런 생뚱맞고 뜬금없는 내용이 부고에 포함될 리 없고요. 미국 흑인 여성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생전에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만 합니다. 얼마나 복잡하고 골치 아프고 불필요한 논쟁들에 휩쓸려야 했겠어요. 하지만 작품만 남겨놓고 영원한 침묵에 들어야 할 때가 왔다 느꼈을 때, 토니 모리슨은 이 고백을 부득불 부고에 새김으로써 이 작가들에게 특별한 찬사를 바쳤을 뿐 아니라 자신의 문학을 국적과 인종을 초월하는 어떤 특별한 문학적 계보에 놓고자 했던 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나아가 저는 왠지, 제인 오스틴이 묶여 있는 어떤 문학적 계보에서 그를 해방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왠지 저는 토니 모리슨의 선언 아닌 선언을 읽으며 영문학의 계보에서 제인 오스틴의 적통 후계자로 흔히 지목되는 헨리 제임스를 떠올렸는데요. 예전에 레터에서 다룬 적이 있는 조지프 러디야드 키플링의 단편 「제인 오스틴 비밀결사단」에서도 제인 오스틴은 자식이 없지만 “헨리 제임스”라는 후계자를 남겼다는 말을 한 인물이 한답니다. 하지만 저는 불경하게도 주류의 의견과는 달리, 이 두 작가의 세계관이 거의 대척점을 이루며 그 극명한 차이점이야말로 제인 오스틴을 특별하게 만든다고 오래 전부터 내심 고집스레 믿어왔습니다. 제인 오스틴은 여성 인물(당시의 사회에서 발언권을 박탈당한 소수자)을 당당한 ‘행위자agent’로 내세우지만 헨리 제임스(를 위시한 남성 소설가들 상당수)는 철저한 ‘감수자patient’로만 묘사한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제가 어렴풋이 느끼던 이 두 작가의 차이를 설명할 개념어를 준 책은 『신과 개와 인간의 마음』(청림출판)입니다. ‘마음’의 의미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이 책에서 저자 다니엘 웨그너는 지각된 마음에는 두 종류가 있고 각자 고유한 유형의 도덕성을 가진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사고하는 행위자thinking doer’이고 하나는 ‘상처받기 쉬운 감수자vulnerable feeler’입니다. 이 두 마음은 언제나 한 ‘쌍’을 이루어 행위의 선과 악에 개입합니다. 사고하는 행위자의 권능이 크고 의도성이 분명할수록, 상처받기 쉬운 감수자가 약하고 예민할수록, 이 한 쌍이 가해자와 피해자로서 구성하는 악의 수준이 높아집니다. 중년 남성 국회의원의 뺨을 다섯 살 아이가 아무리 세게, 아프게 때리더라도 폭행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거꾸로 국회의원이 다섯 살 여자아이를 추행한다면 ‘통증이 없었더라도’ 괴물 같은 악행이 성립되겠지요. 아이가 너무나 ‘약해서’ 적당한 대응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에요. 또한 피부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서 통증에 취약한 환자의 따귀를 때리는 것은 보통 사람의 뺨을 때리는 것과는 다른, 특별히 악한 가해입니다. 감수자가 ‘느끼는’ 통증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지요. 집단괴롭힘의 가해자들이 피해자가 폭력에 둔감해지면 재미가 없어졌다고 느끼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감수자가 ‘느끼지 않게’ 되어버리면 악행을 구성하는 행위와 경험의 쌍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감수자는 방어할 수 없을 정도로 무능하고 약하거나 고통에 유달리 민감할 때 도덕적으로 보호받을 권리를 얻습니다. 하지만 도덕적 책임은 언제나 감수자의 고통을 ‘사고할’ 수 있는 행위자의 몫입니다.

문학은 언제나 감수자, 말하자면 고통받는 사람의 입장에 섰습니다. 항상 폭력을 당하는 몸과 마음에 빙의해 왔습니다. 그러나 문학은 또한, 그처럼 원치 않는 ‘팍팍한 궁지’에 처한 감수자가 어떻게 압박하는 세계에 맞서 자기결정권을 기어이 확보하는가를 추적할 책무를 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햄릿이나 베르터는 자기 손으로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 속에서 심지어 죽음을 무릅써서라도 핵심적 앎을 쟁취하고 희생자(감수자)가 아닌 삶의 행위자라는 위치를 빼앗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유독 헨리 제임스의 소설이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되 지독하게 예민한 감수자의 역할에 잔인하리만큼 지독하게 묶어두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젊은 여인의 초상』과 『데이지 밀러』를 위시한 헨리 제임스의 소설들은 그 뛰어난 심리묘사와 아름다운 문체 때문에 오히려 동일시의 경험이 너무 쓰라리게 아파서 차마 다시 읽을 용기조차 나지 않았지요. 그 책들을 다 읽고 나서는 정말 기운이 쭈욱 빠져버리고 말았고, 정말 육성으로, 아, 그래서 어쩌란 말이야, 라는 투덜거림이 절로 나오더군요. 헨리 제임스만큼은 아니지만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남성 소설가의 작품들, 심지어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나 심지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처럼 위대한 소설들에서도, 세계와 삶의 압박에 맞서는 여성 캐릭터들이 “지와 사랑”의 중심을 자기 안에 무겁게 두고 험한 바다를 항해하다 좌초한다는 느낌은 받기 어려웠습니다. 오히려 무력감과 고통을 지독히도 예민하게 ‘느낀’ 나머지 자기 삶의 이야기를 허무하리만큼 쉽게 방기해 버린다는, 답답하고 안타까운 느낌에 가까웠지요.

여담일지 모르지만, 헨리 제임스에게는 뛰어난 글재주와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여동생 앨리스가 있었는데, 앨리스 제임스는 우울증에 빠져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은둔생활을 하다가 사망했습니다. 수전 손택은 헨리 제임스의 이 불운하고 명민하고 예민하고 수수께끼 같은 천재 여동생 앨리스 제임스의 이야기를 희곡 『앨리스 인 베드Alice in Bed』에서 다룬 적이 있는데요. 이 희곡 속에서 헨리 제임스는 앨리스를 “가엾어 하면서” 병문안을 올 때마다 끝없이 눈물을 흘리는 오빠로 등장하지요. 수전 손택 역시 저처럼 앨리스 제임스(를 비롯한 지적이고 감수성이 뛰어난 여성들)가 내몰린 궁지를 바라보는 헨리 제임스의 연민이 무력하고, 어쩌면 무례하다고까지 느꼈나 봅니다.

*

그러니 제가 영문학의 계보를 학생으로서 공부하던 시절 제인 오스틴에게 “꽂힌” 이유는 그냥 재미있어서만은 아니었던 거예요. 돌아보면 80년대 후반 한국의 여성 독자로서 영문학의 정전을 읽는 경험은 막막하고 기묘한 소외의 내면적 체감이었거든요. 비비언 고닉도 이 비슷한 경험을  고백한 적이 있지요.

 

성장기를 함께한 책들을 펼쳐 들고, 그제야 처음으로 보았다. 그 책들에 나오는 대다수 여자가 피도 살도 없는 뻣뻣한 막대기이고, 오로지 주인공의 운명에 좌절을 안기거나 행운을 선사하기 위해 등장할 뿐이라는 걸. 그때 비로소 깨달은바, 주인공은 거의 언제나 남자였다. 그들이 헤치고 나아가는 삶의 행보는 내가 언감생심 꿈꿀 수 있는 삶과는 결정적인 단절이 있거니와 어느 한구석 닮은 데도 없는데, 독자로 살아온 일평생 나는 그 남자들과 나를 동일시해 왔던 것이다. 

비비언 고닉, 『끝나지 않은 일』 김선형 옮김

 

저 역시 영국 백인 남성 작가들의 문학에 강렬하게 매혹되는 한편, 읽기의 체험에서 ‘나’의 자리를 정하는 데 크나큰 어려움을 겪었어요. 텍스트를 읽으면서 중심으로 나아가 깃발을 꽂지 못하고 변두리의 변두리만 돌면서 동일시의 갈고리를 꽂을 틈새를 찾아 헤매야 했던 거죠. 그렇게 찰스 디킨스와 제임스 조이스와 D.H. 로런스와 헨리 제임스를 읽다가 제인 오스틴을 발견했을 때 그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제인 오스틴은 소설 속 주인공들을 집도 없고 자산도 없고 뛰어난 지성을 발휘할 기회도 없고 자칫 사회적으로 추방될 뻔하는 팍팍한 궁지에 몰아넣고도 결코 그들로부터 비길 데 없는 자중감을 빼앗지 않았어요. 사랑을 하든 하지 않든,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자기한테 주어진 협소한 선택지 속에서도 늘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또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위한 힘 있는 선택을 하는 여자들을 그려냈어요. 세상의 폭압을 몸으로 받아내고 스러지는 것 밖에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비참한 감수자가 아니라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고서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끝끝내 삶을 자기 이야기로 써내는 행위자로 내세웠어요. 핵심적인 앎을 쟁취하지도 못한 채 허무하게 짓밟혀 죽거나 추방되지 않고 당당히 세계 속에 자기 자리를 새겨넣을 길이 분명히 어딘가에는 있다고, 꿈을 꾸어도 좋다고 말해줬지요. 제인 오스틴 소설의 주인공들은 에드워드 페러스나 피츠윌리엄 다아시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아무도 자살하거나 비참한 불행 속에서 한 번 뿐인 자기 삶을 방기하지 않았을 거예요.『이성과 감성』의 엘리너 대시우드가 페러스 가문의 여자들에게 공공연히 모욕당할 때 자기 마음을 차분히 분노로부터 보호하고 모멸을 단호히 거부했던 것도, 엘리자베스 베넷이 캐서린 드 버그 부인 앞에서 조금도 기죽지 않고 당돌하게 “그도 신사고 나 역시 신사의 딸이다”라고 맞받아쳐 선언한 것도, 문학의 정전을 읽는 후대의 모든 여성 독자들에게 작은 기적과 다름없는 순간이었습니다. 여성 독자들이 이처럼 귀한 선물을 받는 순간은, 20세기 이전의 문학사에서 그리 흔치는 않아요. 자기와 맞지 않는 세계의 기준에 휘둘리지 않는 이런 단단한 마음이란, 19세기 영국에서는 세계를 장악한 모든 담론에 코웃음을 쳐야만 다다를 수 있는 경지였으니까요.

그러니 20세기 후반 미국의 한 흑인 여자아이가 이 단단한 마음을 딛고 도약해 ‘흑인 여성’에게 씌워지는 모든 굴레에 코웃음치며 날아가는 상상을 조금쯤 해도 좋지 않을까요. 토니 모리슨의 여자들, 덴버와 파일러트, 세서...평범한 사람은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고난의 삶을 통과하는데도, 이상하게 이 여자들은 무기력한 감수자로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엄청나게 단단한 자중을 바탕으로 온 세상에 사랑을 질펀하게 쏟아내는, 마르지 않는 샘 같고 기어이 세상의 주인 같습니다. 

 

2025년 4월 16일에

김선형 드림

 

토니 모리슨, 종이에 유화, 김선형 그림 (2024)
토니 모리슨, 종이에 유화, 김선형 그림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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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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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환의 프로필 이미지

    오환

    0
    20 days 전

    잘 읽었습니다 수고로움이 너무 감사하게 다가왔습니다 좋은 글 고마운 마음 빛이 나네요

    ㄴ 답글 (1)
  • 남소의 프로필 이미지

    남소

    0
    19 days 전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제인오스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편이 아니지만 작가님의 애정은 매번 글에서 흠뻑 느끼고 있어요~~이번 글에 댓글 달 용기를 낸건 토니모리슨을 사랑하신다해서~그림도 직접 그리신걸 보고~'비러브드'단 한권 읽었지만 단번에 존경하게 됐거든요~ 이 위대한 두 작가의 코웃음의 경지....시대속에서 더 멋지게 느껴집니다! 작가님의 글덕에 알게 됐네요^^

    ㄴ 답글 (1)
  • 추천영화의 프로필 이미지

    추천영화

    0
    11 days 전

    저도 빌러비드 한 권 읽자마자 사랑에 빠진 작가라서 더욱 이 글이 와 닿습니다. 번역가님 그림까지 잘 그리시다니 사기캐!

    ㄴ 답글
  • 송지연의 프로필 이미지

    송지연

    0
    7 days 전

    와! 토니 모리슨 그림까지! 오늘도 풍성한 읽기였습니다. 문장 하나하나 곱씹으면서 읽었어요. 감사합니다.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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