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지난 레터에서 예고한(?) 대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오만과 편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이야기는 1789년의 프랑스로부터 시작되어요. 프랑스혁명의 후폭풍으로 피비린내 나는 숙청과 공포정치가 이어지고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유럽 전역이 요동치는 사이, 과거의 가치 체계와 세계관은 갈라지고 허물어졌습니다. 혁명을 지지하든 반대하든, 나폴레옹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이제는 그 누구도 앙시앵레짐이 버티고 있던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어요. 신분제 사회에서 구조적 불평등을 체감하던 지식인들에게 “자유, 평등, 박애”라는 기치의 울림은 떨쳐내기 힘든 매혹적인 울림이었으니까요. 특히 1791년, 로마가톨릭교회와 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던 교육이 시민 모두가 받을 수 있는 제도로 선포되었을 때, 평민 남성들뿐 아니라 여성 지식인들 또한 기대감에 부풀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프랑스혁명에서 시민들이 내세운 ‘자유’와 ‘평등’이 특정 젠더에만 적용된다는 것이었어요. 실제로 우리가 흔히 ‘박애’ ‘우애’ ‘연대’로 번역하는 ‘fraternité’가 ‘형제애’라는 뜻에 가까운 단어이기도 하고요. 이를 교육 이야기로 한정해보자면, 혁명정권이 신속하게 이행한 주요 과제 하나가 바로 공화국의 시민을 양성하는 보편교육의 시행이었는데, 이 보편교육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장자크 루소부터가 시민교육의 대상을 남자아이로 제한합니다. 그 유명한 『에밀』에서요. 이 책에서 루소는 남성인 야만에 가까운 자연 상태에 놓여 있던 에밀을 사회 구성원인 시민으로 성장시키는 한편, 여성인 소피는 가부장제에 종속된 가정 내에서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여성을 교육시킬 때는 이성이나 도덕이 아니라 순종과 겸양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요. 자, 루소의 말을 직접 들어보시죠. “여성은 결코 스스로를 독립적인 존재라고 느껴서는 안 되며, 남자가 쉬고 싶어할 때는 언제든 한결 더 매혹적인 욕망의 대상, 한결 더 달콤한 동반자가 되어주어야 하고, 이런 존재가 되기 위해 애교 많은 노예로 변해야 한다. 이는 자연의 섭리에서 도출된 결론이다.” 니콜라 드 콩도르세처럼 이런 성차별적 사고에 반대한 이들도 물론 있었지만, 결국 근대적 정치 주체의 젠더 표준은 남성이 되었지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장자크 루소의 논지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당시 울스턴크래프트는 계몽주의를 근거로 해서 일어난 시민혁명을 열렬히 지지하고 있었고, 이성과 도덕적 감정을 겸비한 공적 주체의 양성(養成)에 관심을 쏟고 있었거든요. 최초의 페미니즘 매니페스토인 『여성의 권리 옹호』(1792)는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프랑스의 교육개혁 담당자에게 청원하는 형식을 띤 이 역사적 논고에서,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지적 열등성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교육의 불평등이 낳은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그 과정에서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을 무지와 순수에 가두려는 루소를 비판하고, 여성의 창조 이유를 남성에게서 찾은 존 밀턴을 비난합니다. 밀턴은 여성은 남성을 기쁘게 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그런 여성의 본성은 부드러움과 달콤함과 매력적 우아함이라고 주장했거든요. 아무튼 공화주의자인 루소와 밀턴 모두, 평등한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는 이성과 도덕적 감정을 갖춘 개인, 즉 공화국 시민을 남성으로 국한합니다. 여성을 ‘감각’과 ‘관능’으로 충만한 ‘느끼는 존재’로 정의하고는 여성의 공적 영역 진출을 막고 사적 영역에 가두려고 했고요. 남성의 편의와 쾌락을 증진하는 보조적 존재로 격하하면서요. (지난번 토니 모리슨의 부고를 다룬 레터에서 헨리 제임스를 위시해 여러 남성 소설가가 전통적으로 여성 캐릭터를 ‘느끼는 존재’로 묘사한다는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는데, 그와도 연결되는 논의입니다.) 루소와 밀턴 둘 다 똑똑한 여자는 위험한 팜 파탈이 될 수도 있다며 경계했어요. 똑똑한 여성은 기껏해야 부도덕한 유혹자가 될 따름이니, 다시 말해 여성이 ‘과도한’ 교육을 받으면 남성을 자기 의지대로 좌우하는 ‘교활한 간계’만 발달할 테니, 차라리 관습적인 예절 교육만 잘 시켜서 지적으로 무력한 순수한 존재로 남겨두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지요.
울스턴크래프트는 당연히 영향력 있는 이 공화주의 이론가들의 노골적인 성차별주의에 분개했습니다. 울스턴크래프트가 볼 때 바람직한 교육은 이성적 추론과 체계적 사고를 통해 독자적 판단을 할 능력을 함양하는 과정입니다. 권위에 맹목적으로 휘둘리지 않도록요. 그렇지만 여성에게는 이러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여성이 지적으로 열등한 존재처럼 보이는 것은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루소의 주장대로 여성에게서 지적인 사고 능력을 박탈하고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습속만 체득시켜 “헛된 세련됨”을 추구하게 만든다면, 여성은 계몽되지 못한 채 예속 상태에 안주할 테고 “아름다움의 전제적 권력”에 취해 나약하고 열등한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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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이 논고를 발표한 1792년 제인 오스틴은 열일곱 살이었어요. 교구 목사로 사학을 운영하던 아버지 조지 오스틴의 서재에는 남학생들을 위한 철학과 고전이 그득했습니다. 이 서재의 책들을 마음껏 섭렵하며 누구 못지않게 지적인 개인으로 성장한 제인 오스틴은 성년의 문턱에 들어섰지만 그에게 허락된 인생행로란 오로지 결혼 후 가정의 꽃이 되는 것뿐이었습니다. 남자들에게만 허락되는 품질 높은 교육, 남자들에게만 허락되는 폭넓은 미래의 가능성을 지켜보며 막막한 박탈감이나 상실감을 느끼진 않았을까요? 대학에 다니던 큰오빠 제임스와 셋째 오빠 헨리는 특히 진보와 자유주의 가치에 공명했고 프랑스혁명의 동향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제인 오스틴은 오빠들을 통해 세간에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킨 토머스 페인이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글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창 반항심과 정의감에 불타오를 청년기에 막 접어들 무렵, 여자에게도 이성이 있으니 시민으로 키우고 교육하라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뜨거운 논고를 처음 읽고 가슴의 피가 끓어올랐을 제인 오스틴을 저는 자주 상상합니다.
실제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역사적인 논고를 발표한 후 불과 삼사 년 이내에 제인 오스틴은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의 초고를 동시에 쓰기 시작하는데요, 제목만 보아도 오스틴이 루소와 울스턴크래프트의 논쟁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보였는지가 드러난답니다. (『이성과 감성』이라는 제목과 울스턴크래프트의 연관성은 이전의 레터에서 다룬 적이 있으니 여기서 읽어주세요.) 민감한 논쟁을 펼칠 때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내가 오만하다고 비난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이라는 식의 소위 쿠션어를 썼고, 부나 계급에 따라 인간을 판단하는 맹목적 편견을 독립적으로 사유하는 이성적 주체의 가장 큰 적으로 지목하기도 했거든요. 물론 여기서 “오만(pride)”은 지적인 여성이 견지하는 강고한 “자존심(pride)”이기도 하지요. 울스턴크래프트는 “드문 능력을 소유할 경우 남성이건 여성이건 오만한 자긍심을 가지는 것이 인간에겐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이처럼 “오만/자존심”과 “편견”은 울스턴크래프트의 논지에서 결정적인 열쇳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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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인 오스틴 최고의 걸작에 남겨진 울스턴크래프트의 진짜 자취는, 단어의 차원을 넘어 소설의 플롯과 캐릭터, 즉 그 뼈대에 깊숙이 새겨져 있습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이 선천적으로 이성을 결여한 존재가 아님을 입증하고자, 교육과 제반 조건이 달라지면 남성 또한 여성 못지않게 겉치레에 신경 쓰며 허례허식에 찌든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치거든요. “언제나 여성과 관련하여 논의되었던 종속성이 남성에게도 역습을 가한다.” 그러면서 여성과 마찬가지로 구조적으로 예속 상태를 벗어날 수 없기에 피상적 허위의식에 찌들기 쉬운 두 개의 남성 직업군을 거론하기까지 합니다. 바로 상비군(군인)과 교구 목사입니다. 네, 바로 오만한 (자존감 높은) 엘리자베스 베넷의 오답 노트에 적힌 남편 후보들, 바로 위컴과 콜린스의 직업이랍니다. 먼저 울스턴크래프트가 설명하는 상비군(군인)의 폐해를 살펴볼까요.
상비군은 결코 단호하고 강건한 남성들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들은 잘 훈련받은 기계일지 모르지만, 그들 가운데 강한 감정의 영향 아래 있거나, 혹은 매우 원기 왕성한 능력을 두루 지닌 남성은 드물다. 그리고 이해의 깊이와 관련해서라면, 나는 깊이 있는 이해가 여성들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군대에서도 드물게만 발견된다는 것을 감히 단언하고자 한다. [중략] 더 나아가 장교들은 특별히 자신의 육체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 그리고 춤추기, 사람들이 꽉 들어찬 방들, 모험, 비웃음을 좋아한다는 것이 언급될지도 모른다. 여성처럼, 그들 필생의 사업은 남들의 관심이다. 그들은 남의 비위를 맞추도록 교육받았고, 그들은 오로지 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산다. 그러나 그들은 성별로 인해 지위를 상실하지는 않는데, 그들이 여전히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중략] 그들은 저속한 본성에 만족하여 편견의 먹이가 되고, 자신들의 모든 견해를 대가 없이 취하면서 맹목적으로 권위에 의존한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여성의 권리 옹호』, 문수현 옮김
울스턴크래프트는 이것이 군인 개인의 본성보다는 상비군이라는 직업군 자체가 “자유와 양립 불가”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복종과 엄격함을 강조하는 군사적 규율을 통해 “압제”하는 조직, 권력이 옹립된 1인자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조직이기 때문입니다. “명예에 대한 낭만적 관념으로 고무된 정신과 시대적 유행에 기초한 일종의 도덕성을 느끼는 것은 몇몇 장교뿐”이고 “대다수 군인은 바다의 파도처럼 명령에 의해 움직”입니다. 따라서 “하는 일이라곤 여성을 유혹하는 것뿐, 세련된 태도 덕분에 화사하고 장식적인 의복 밑에 추악한 부도덕성을 감추”게 되는 것입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울스턴크래프트는 “이런 게으르고 천박한 일군의 젊은 남성들이 간혹 시골에 체류하는 것보다 더 시골 마을 주민의 도덕성을 침해하는 것은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상비군의 주둔으로 도덕적 위험에 빠지는 시골, 이것이야말로 『오만과 편견』의 주축 플롯이 아니던가요.
상비군인 조지 위컴은 밀턴과 루소가 여자에게 부여한 역할, 즉 “애교 넘치는” “하렘의 정부” 같은 기교의 달인이지요. 본능적으로 “교활한 유혹자”이며 감각과 관능만 발달하고 도덕적 감정도 합리적 이성도, 여자인 엘리자베스 베넷보다 훨씬 “열등한” 인간입니다. 위컴의 “분위기”가 자아내는 헛된 매혹을 꿰뚫어보고 정신의 예속성을 파악해내는 연습이야말로 엘리자베스 베넷이 “독립적” 개인으로 성장하게 해주는 “미덕의 습관들”을 체득하는 과정 그 자체이고요. 이는 울스턴크래프트가 생각하는 여성의 성장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는 여성이 지성을 지니고 “남편의 품성”을 부단히 평가하도록 교육하라고 주장했거든요.
만일 남성에 대한 여성의 의존을 인정하는 한에서만 여성의 모든 정신적 능력이 길러진다면, 그리고 남편을 얻었을 때 여성의 목표가 달성되고, 여성이 그처럼 하찮은 명예에 만족한 채로 초라한 평온을 누린다면,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활동들을 통해 동물을 넘어서는 존재가 되어보지도 못한 채, 그저 달가운 마음으로 굽신거리게 하라. 그러나 그녀가 숭고한 소명의 목적을 위해 분투하면서 현재의 장 너머를 바라본다면, 그녀로 하여금 남편 될 사람이 어떤 품성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고려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고 자신의 지성을 함양하게 하라.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여성의 권리 옹호』, 문수현 옮김
엘리자베스의 오답 노트에 오른 남편 후보 2번 콜린스 또한 울스턴크래프트가 굴종적 예속에 휘둘린다고 지목한 직업군에 속합니다. 바로 교구 목사인데요. 성직자는 군인보다는 나은 개선의 기회가 있지만 “출세하려면 자신의 교구 목사나 후원자의 의견에 아첨”해야 하기 때문에 “신학교에서 신앙의 형태에 부여된 맹목적인 복종”을 “수련”하게 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콜린스 씨가 레이디 캐서린 드 버그에게 처참하리만큼 비굴하게 아첨하는 『오만과 편견』의 설정이 울스턴크래프트의 논지와 정확히 일치하는 건 과연 우연일까요? 나아가 울스턴크래프트는 이런 예속적 직업군과 달리 자신의 영지를 지닌 신사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를 구가할 수 있다고 했으니, 남편감의 정답이라 할 수 있는 다아시 씨가 귀족의 혈통을 지녔으나 귀족이 아닌 신사 계급의 영주라는 것 또한 우연은 아닌 듯합니다.
그렇다면 울스턴크래프트가 생각하는 이상적 결혼의 형태는 무엇일까요? 울스턴크래프트는 무엇보다 자신이 “동료로서의 남성”을 사랑한다고 선언합니다. “그 개인의 이성이 나의 존경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그의 왕권이, 진정한 것이건 혹은 찬탈한 것이건, 내게까지 미치지 못한다”라고 했지요. 심지어 “존경하더라도, 그건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이성을 향한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즉, 가부장제의 결혼에서 여성이 남성을 사랑하는 것은 자유 시민이 훌륭한 지도자를 존경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말은 남성이 합당한 자격도 없이 오로지 맹종을 요구하는 폭군이라면 여성이 무조건 복종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는 뜻이지요. 가부장제를 겨냥한 울스턴크래프트의 논의는 전제군주제의 폭정을 겨냥한 당대 혁명가들의 주장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습니다.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하는 억압적 위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이성과 덕성을 존중하는 평등한 “동료애”, 즉 fraternité가 결혼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울스턴크래프트는 자신이 상상하는 이상적 결혼 생활을 “각자가 각자의 지위에 따르는 의무들을 이행하기 때문에 대등하게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또 서로 독립적인 이 부부는 인생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했다”라는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만과 편견』의 결말에 다아시와 엘리자베스가 다다르는 경지가 아닌가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그리고 또 다른 의미에서 『이성과 감성』 또한) 흡사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를 그대로 소설로 풀어썼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엘리자베스 베넷이 위험한 난봉꾼인 상비군 위컴과 비굴한 아첨꾼인 교구 목사 콜린스에게 예속되기를 거부하고, 자신을 동료로 인정하는 다아시를 이성적으로 존경하기에 결혼을 결심하는 과정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지향하는 지적 여성의 교육 목표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인 오스틴은 왜 울스턴크래프트의 논고를 소설로 다시 썼을까요. 아마도 루소의 『에밀』이나 밀턴의 『실락원』이 지닌 허구의 파괴력을 실감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필립 시드니 경이 말했듯 “당의정” 같은 문학의 힘으로 포장해 울스턴크래프트의 주장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거부감 없이 전파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문학이 지닌 ‘설득’의 힘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은 아닐까요.
2025년 5월 15일에
김선형 드림
추신. 이번 레터는 처음으로 하루 늦게 발행되었습니다. 어젯밤 글을 탈고하고 다시 읽어보니 하루 늦게 발행하더라도 이번엔 편집과 교정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꼭 필요할 때마다 늘 흔쾌히 도와주시는 허정은 편집자님께 이 기회에 감사를 표합니다. 거친 문장과 부정확한 팩트가 말끔히 다듬어져 나올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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