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기07] 빈칸을 채우는 것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시인이기]의 차재신입니다. 

처음으로 연정모가 아닌 제가 인사말을 드리게 되었네요. 그동안 보내드린 글은 잘 읽고 계신지 모르겠어요. 저는 시인이기 원고를 쓸 때 늘, 새롭게 발견한 생각이나 무언가에 부딪쳐 가며 얻게 된 것들을 공유하자는 마음인데요. 그런 마음이 여러분에게 잘 전달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굳이 매번 클릭해서 읽어 주는 사람들에게 하잘것없는 내용의 글을 쓰지는 말자'는 모토로 임하긴 하는데, 그런 마음 때문에 오히려 하잘것없는 글이 되어 버렸을지도요.

오늘부터 긴 연휴가 시작되는데 다들 어떻게 한 주를 보내셨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번 원고에서 '내 삶은 게임이다!' 비장하게 선포해 놓고선 어제부로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1)도저히 학업을 병행하면서 원고를 챙겨 쓸 시간이 나지 않았고 2)본격적으로 코딩을 배우게 되면서 거대한 벽에 가로막혔기 때문입니다. 그곳엔 전혀 다른 세계가 있더라고요. 먹고살기 위해 몸 쓰고 노력하는 거야 문제없는데, 쓰는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이 모든 게 의미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아니 말하고 나니까 더 비장해 보이네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신병교육대에서 개복치처럼 못 버티고 터져 나온 게 맞습니다. 어쨌든 다음 시집의 테마는 '게임과 시' 혹은 '게임에 대한 시'로 지속될 겁니다. 쓰고 싶은 것들이 생겼거든요. 대상과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어야 그 대상에 대해 쓸 수 있듯이 저에겐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요. 어쨌든 변덕스러운 제 삶에 대해 사죄드립니다. 굳이 공들여 읽어 주셨는데, 세상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연정모가 저한테 인사말을 쓰라고 맡겨놨는데 제 핑계만 구구절절 늘여놔서 혼날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구독자님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희 글을 구독하는 분들이라면 정말 넓고 깊은 마음을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모든 글은 저마다 옹졸한 구석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글을 읽어 준다는 것은 그런 모난 면들을 감내해 준다는 뜻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늘 저희의 독자가 되어 주심에, 정말로,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여쭤봐야겠네요. 이번 연휴는 어떻게 보내실 생각인가요? 생각이 없어도 좋습니다. 그저 휴식이 필요하다면 충분히 휴식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저는 그간 밀렸던 원고 작성 및 아직 제게 남아 있는 일들을 처리해야 합니다. 한동안은 다른 방식으로 바빠지겠네요. 여러분도 어떤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 용기를 잃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p.s. 이번에 보내드리는 것은 학원을 그만둔 직후 쓰인 글입니다. 덕분에 좋은 사람들을 얻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어요.

차재신

객체 지향 설계는 객체를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설계한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어떤 사물이나 현상들을 대상화하고, 이것들의 특징들을 뽑아내어 정의하려고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어떤 객체를 만들 때 그 객체가 이루고 있는 요소들을 정의하고 결합하는 방식이 객체 지향 설계입니다…

내가 프로그래밍을 배울 때 가장 어려웠던 것은 바로 ‘무언가’를 정의 내리는 것이다. ‘무언가’를 구현하려면, 우선 문자와 숫자와 부호를 통해 ‘무언가’를 지정한 다음 그것을 식으로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빈 맥주잔’을 표현하기 위해서 우선은, 가득차 있는 맥주잔의 상태를 가정하고, 그 안에 들어간 맥주를 1이라는 값을 넣어 정의한 다음, ‘맥주잔 – 1 = 빈 맥주잔’이 되도록 식을 만드는 느낌이다.

여기서 빈 맥주잔은 혼자서 빈 맥주잔일 수가 없다. 빈 맥주잔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움켜쥘 손이 있거나, 그것을 올려둘 탁자가 있거나, 맥주가 비어 있는 ‘상태’가 있어야만 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값’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빈 맥주잔이 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주말 내내 온갖 컴공과, 통계학과, 수학 강사 출신 과외 선생들을 족쳐서 깨달은 전부다.

심지어 그들(모두 짱 좋은 친구들이다)이 위 예시를 본다면 어떤 부분이 어디에서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정확히 지적할 것이다. 그들에게 배우는 동안 제일 많이 반복됐던 패턴이다. “그런데 왜 이 기호를 쓰면 이런 값이 나오는 거야?” “형! 그냥 그렇게 했을 때 그 값이 나오도록 우리가 사회적인 약속을 한 거야. 그냥 그렇다고 이해하면 돼!”

정말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은 수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수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나에게 있어 의미를 ‘정의한다’는 것은 의미를 ‘밝혀내는 것’에 가까운데, 나는 아무리 해도 숫자와 식만으로 어떤 의미도 밝혀낼 수가 없었다. 의미의 의미를 모르는 것처럼.

어제는 오랜만에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쌤(철학자임)'을 만나 맥주를 마셨는데 쌤은 “인간이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인식하는 방식을 따와 컴퓨터 언어의 이진법도 만들어진 것 같다”고 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다. 컴퓨터 언어를 배우는 동안 자연스레 시를 쓰는 방식을 치환해서 생각했다. ‘나라는 객체를 통과해서 문장(값)이 다음 문장(값)을 불러올 때, 나는 어떤 함수들로 구성되어 있을까? 그 식을 파악하게 되면 앞으로 쓰게 될 시들을 미리 알 수 있을까? 아니면 영영 쓰지 못하게 될까?’

고등학생 때 한문 선생님을 찾아가 물어본 적이 있다.

- 선생님, 한자 詩(시 시)에서 시의 뜻이 뭐예요?

- 시.

- 그 시가 무슨 뜻인데요?

- 그냥 시야, 시.

- 그래서 그 시가 무슨 뜻이냐고요.

- 시라고. 시, 시.

그날 내가 배운 건 ‘시 = 시’라는 것뿐이다. 시가 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나에게 시란, 정답이 아닌 질문을 벼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질문을 아주 날카롭게 벼리고 벼려서 정확한 질문을 던지게 되면 그에 대응하는 정확한 정답이 나올까? 모른다. ‘정확히 모르겠다’는 대답만이 돌아올 것이다.

연정모

길고 무서운 꿈을 꾸었다. 

의미랄 것도 없고, 그저 끔찍한 이미지로 가득했다. 백발의 노인이 뒤틀리고 개조된 동물들을 몰고가는 꿈. 캄캄한 철길을 따라서. 노인의 앞에는 덩치 큰 소가 천천히 걷고 있었고, 쇠사슬에 묶인 토끼들이 그를 뒤따랐다. 얼굴 곳곳에 인간의 치아가 박힌, 기괴한 모양새.

그런 처절한 이미지들을 보여 주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는지, 꿈은 희한한 방식으로 나를 교란했다. 노인이 도망치려는 내 어깨를 붙드는 순간 허리와 회음부에 실재하는 통증을 느낀 거다. 허우적거리며 깨어난 후에도 그 감각이 계속하여 신체에 머물렀다.

다시 잠들 수 없는 새벽도 있음을.

👻 ⋆⁺₊⋆ ☾⋆⁺₊⋆ ...

내가 처음 쓴 시(그러니까 학교 숙제 말고 내가 원해서 쓴 첫 시)는 귀신에 대한 것이었다. 엄마가 내 자취방에서 보았다는 귀신. 엄마가 내 방에서 자고 간 날, 누가 엄마를 흔들어 깨웠다 한다. 눈을 뜨니 코앞에 대단히 흉측하게 생긴 남자가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고. 소리 내어 무슨 말을 하진 않았다는데, 엄마는 그가 이 얘길 전하려던 것이라 믿었다. 너 왜 여기 있어, 당장 이 집에서 나가.

엄마는 내가 그 집에서 지내는 내내 벌벌 떨까 봐, 이사 후 몇 달이 지나서야 그 얘길 해 줬다. 거기 살며 살이 뚝뚝 빠지고 불면으로 고생하던 것, 그 남자 때문인 것 같아 내내 마음에 걸렸다고.

생애 시 쓰기를 앞에 두고, 그 귀신을 왜 떠올렸는지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엄마가 해 준 이야기를 들을 때 나 그를 가여워 했다. 그 귀신된 존재 나에게는 모습을 보인 적 없던 것, 나를 위협한 적 없던 것, 그것에 대해서만 오래 생각했다. 어쩌면 나를 이웃이나 룸메이트로 여겼을지도 모른다고. 헛되이 믿어 보는 것이다. 

그 시의 제목은 <유령 노래>. 귀신을 만났지만 유령에 대해 썼다. 귀신의 형체였지만 유령으로 불러왔다. 귀신에 대해선 쓸 수 없고 유령에 대해선 쓸 수 있다. (참으로 나약하게도) 끔찍한 것에 대해선 쓸 수 없고 가여운 것에 대해선 쓸 수 있다. 

다시 며칠 전 이야기. 악몽을 꾸다 깨어난 새벽에, 다시 잠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버텼다. 눈을 감으면 끝나지 않는 꿈을 이어 꿀 것 같았다. 캄캄함이 그저 흘러가 주기만을 바라고만 있을 때에, 맙소사 귓가에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가사는 없었고, 미지근한 속도의 선율이 있었다. 귀 뒤에 손을 오목히 대 본 적 있는지? 세계의 소리가 내 안에서 재생되는 것처럼 선명해진다. 그 밤중 선율은 꽤나 오랜 시간 내 귀에서 내 몸 안에서 재생되었다. (얼마나 무서웠을지 제발 알아 주시라…) 어떤 존재가 이 방에서 나를 괴롭히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고 오싹함에 사로잡히면 사람이 아주 바보 같아진단 걸 알게 됐다.

결국 아침은 멀쩡히 찾아왔고(아침 최고) 아무렇지 않게 출근했다. 어제 가위 눌려서 좀 피곤해요. 귀신이 여기 있나 두려워 한 것이 무색하게, 새벽의 사건을 일종의 현상으로 설명했다. 아름답지 못한 기억은 대체로 그렇게 처리된다. 나는 꿈속에서 잠시 만난 그 노인을 영영 좋아하지 못할 것이고, 그날 들은 음악에 대한 시를 쓰게 될 일도 없을 거다(아마도).

그들은 그저 귀신이고 유령 되지 못한다는 것이

나의 쪼구마한 복수 되겠다.

🚶생활기

차재신: nil

연정모: 연휴의 시작입니다. 저에게는 더더욱 기쁜 날이기도 해요. 지금부터 4주 정도, 회사에 가지 않고 조금 쉬기로 했기 때문이에요. 그래도 꽤 성실히 직장 생활을 해 온 편인데 '이것이 번아웃!'이라고 외치는 듯한 쩌렁쩌렁 증상을 느낀 것은 처음입니다. 온전히 휴식을 위해 내린 결정이라서, 스스로에게 약속한 것이 있어요. 시 00편 쓰자는 목표 세우지 않기. 근데도 내심 '이렇게 부담 주지 않으면 시가 더 잘 써지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더라고요. 8호 메일이 나가는 9월 28일, 과연 저는 몇 편의 시를 썼을까요? (쓰긴 썼을까요?) 휴식을 명령하는 엄정한 자아와 최적화와 생산성을 못 버리는 본디의 자아 중 어느 쪽이 승리할지… 지금으로선 저도 흥미롭게 관전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