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기08] 양쪽으로 열린 창문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시인이기]의 연정모입니다. 드디어 가을이에요. 아침에 일어날 때 목이 콕콕 따가운 것을 보면 정말로 추워질 일밖에 남지 않은 모양이에요. 낮에는 뜨겁고 아침저녁엔 쌀쌀한 이 날씨가 조금 번거롭게 느껴지긴 하지만, 긴팔 긴바지로 꽁꽁 싸매야 하는 계절이 오면 금세 그리워질 테니 즐겨 보려구요. 호호.

재신은 우리가 쓴 이번 글에 이런 제목을 붙여 주었습니다. 시재료와 식재료! 재신은 '화자'의 역할에 대해 적었고 저는 이번 시에 등장하는 음식 얘기를 썼거든요. 

언제나 그런데요, 재신의 시와 글을 보면 깜짝깜짝 놀라요. 둘 다 시를 좋아하고 또 시를 쓰는데 어쩜 내 것과 이리 다를 수 있나 하고요. 저희의 시를 받아보고 계신다면 느끼셨겠지만, 시의 길이도 호흡도 대상을 묘사하는 방식도 정반대입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신은 사고의 과정을 담았고, 저는 감각한 것들을 남겼어요.  

이 인사말을 쓰는 지금 저는 무궁화호에 앉아 있습니다. 이웃 도시로 잠시 놀러왔다가 돌아가는 중이에요. 여행이라 하기엔 짧은, 반나절 정도의 외출이었는데요. 마지막 일정으론 백 년 된 건물에서 전시를 봤어요. 마르쿠스 뤼페르츠라는 독일 화가의 특별전. 갤러리의 한 구역에서 재생되던 인터뷰가 인상적으로 남아, 일부를 인용합니다.

그림에 해당하는 이야기만은 아니겠지요.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벽에 팅팅탱탱 창을 내고(혹은 그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봅니다. 정확한 정방형일 수도 있고, 제멋대로인 곡선으로 둘러싸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주 작은 틈으로 미세한 빛만 투과되게 만들 수도, 건너편의 모든 추악함을 공개하는 크기일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그중 어느 하나는 구독자님이 열어젖힐 수 있는 창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뤼페르츠 떵땡님의 인터뷰를 마저 인용하며, 인사를 마치겠습니다. 사실 이번 글을 쓸 때 재신도 저도 고민이 많았는데요, 우리가 하는 일이 그저 ~질문~이라고 생각하면 그럭저럭 할 만하겠어요. 

"시각 예술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오직 믿음만 있을 뿐입니다. 질문과 믿음, 그 이상은 불가능합니다. 좋든 나쁘든, 수세기 후에 그것이 지속되는지 결정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직업의 위험요소입니다."

차재신

게임을 만들 때는 ‘유저에게 어떤 체험을 전달할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저의 체험이 곧 장르, 시스템, 연출 등 게임의 방향을 결정하는 컨셉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 시는 좀 다르다. 시 또한 독자를 상정하긴 하지만 혼자서 중얼거리는 지껄임에 가깝다. ‘남에게 어떤 감각을 전달할지’보다는 ‘내가 어떤 감각을 느꼈는지’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 부분에서 게임과 시는 뻗어 나가는 방향이 서로 다르다.

화자 없는 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르게 말하자면, 화자 없이는 시도 쓰일 수 없다. 설령 화자 없는 시가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언어 바깥의 영역이기 때문에 우리의 두 눈이나 귀로는 감지할 수 없다. 만약 ‘언어 이전의 것(사유)들을 언어화한 것’을 시라고 한다면, 화자는 사유를 시로 구현하는 통로가 된다. 일종의 번역가인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화자는 시인과 독자를 연결하는 매개물이면서 동시에 시인과 독자를 분리시키는 절단면이 된다. 시인은 화자를 통해서(만) 말할 수 있다. 독자는 화자를 통해서(만) 읽을 수 있다. 우리가 어떤 대상과 연관되면 동시에 대상과 단절될 가능성이 생기는 것처럼, 화자 또한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다. 단지 시인의 의도를 두른 채 잠시 그 자리에 소환될 뿐이다.

게임에 화자의 개념을 대입하면 어떨까? 다소 애매하다. 게임의 경우 화자가 여러 명이거나 아예 없을 때도 있다. 화자가 여러 명인 시는 있지만, 화자가 없는 시는 불가능하다. 게임에서의 화자는, 화자라기보다 시스템 설계자에 가깝다. 설계자는 규칙을 구성하고, 구성된 규칙을 읊을 뿐이다. 이번 시집의 컨셉을 게임으로 정한 뒤에 겪는 고민 중 하나다. ‘나는 어떤 화자가 되어야 하는가?’

황유원 시인은 ‘존재의 소음을 최대한 증폭시켜보는 길과 존재의 소음을 최대한 잠재워보는 길. 나는 이 두 길을 모두 가보기로 한다’고 했다. 첫 시집 이후 그는 두 작업을 동시에 했다. 전자의 결과물이 ⟪초자연적 3D 프린팅⟫이고, 후자의 결과물이 ⟪하얀 사슴 연못⟫이다. 나의 이번 시집은 화자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관건이다. 위의 표현 방식을 빌리자면, 화자를 최대화하면 ‘나’에 가깝겠고, 화자를 최소화하면 ‘설계자’에 가까운 방향이 되겠다.

오늘, 9호로 함께 전해보낸 시 ⟨논플레잉⟩의 경우는 화자를 최소화한 것에 가깝다. 쓰는 동안 ‘나다운 것’과 ‘나답지 않은 것’에 대한 고민이 깊어 쉽지 않았다. 이후의 원고가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일단 계속 써 봐야 한다. 한 번에 해결되지 않을 고민이다.

연정모

누구에게나 ‘시에 꼭 넣는 재료’ 같은 게 생기는 것 같아. 나의 경우는 음식의 이름과 질감이 그렇다. 시를 완성하고 보면 꼭 음식 묘사가 잔뜩 들어가 있다. 한번은 나름의 챌린지로 ‘먹을 게 등장하지 않는 시 쓰기’를 시도해 본 적 있는데, 쓰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그 감촉이나 냄새 등등이 더 생생하게 상상되어… 종내엔 아예 화자 자신이 페스츄리 됐다.

미식을 즐기는 것도 요리에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음식 얘기를 자꾸 쓰게 되는 걸 보면, 입에 무언가를 넣고 질감과 향을 느끼는 과정이 (행위의 일상성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이질적으로 인식되는 모양이다.

나의 식생활에 대해 말해 보자면, 수년 동안 페스코 식단을 해왔지만 2024년 가을 현재 ‘제공되는 것은 제공되는 대로’ 그저 먹는다. 특별한 계기가 있어 육식 중단을 결심한 게 아니었던 만큼 육류를 다시 섭취한 데도 큰 이유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고기를 본다고 식육의 과정을 곧장 떠올리지는 않게 되었기 때문에, 고기를 섭취하는 것이 내게 이전만큼의(=악몽으로 되풀이될 만큼의) 상처를 주지는 않았기 때문에, 자연히 몸이 편한 쪽으로 흐르게 됐다. 사람들과 식사할 때마다 매번 설명을 덧붙이거나 양해를 구하는 건 번거로운 일이니까. 

그러나. 최대한 무던하게 살고자 노력하지만. 여전히 어느 순간에는 내가 씹고 있는 음식이 이전엔 살아 있었단 걸 떠올리게 된다. 

9호로 실어 보낸 시 ⟨진화의 방식⟩은 ‘육향’이라는 말이 문득 괴이하게 여겨져 쓰게 됐다. 살아 있던 동물의 살을 씹으며 그 향이 진하고 맛있다고 말하는 것이 너무 이상해서.

아기가 딸기를 먹으면 온몸에서 딸기 냄새가 난다고 한다. 정말일까? 정말이라면 내가 안아 본 아기들에게 뽀용한 냄새가 나던 건 분유 때문이겠지. 얼마 전 지인이 나에게 이런 얘길 해 줬다.

- 14개월 된 조카를 안았는데 사람의 땀 냄새가 나서 놀랐어. 아기 냄새 날 줄 알았는데.

- 분유를 끊고 이유식을 먹는 게 아닐까?

그런 추측을 나눴다.

고기를 먹으면 육향이 나고 딸기를 먹으면 딸기 향이 날까? 그렇다면 최대한 아무 맛과 향이 없는 것들을 삼키는 상상을 해 본다. 시 안에는 ‘공장에서 생산한 두부’와 ‘익지 않은 멜론’을 데려왔다. 아무런 위해 없이 나를 정결하게 지워 줄 것 같다.

🚶생활기

차재신: 글을 그렇게 써 왔는데도 자기소개서 쓰는 일이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회사에 어필하기 위해 나를 드러내는 일이 낯부끄럽고 치욕스럽달까요. 제가 아직 세상에 덜 깨졌나 봅니다.

연정모: 며칠 전엔 모교에 방문해, 과 후배님들과 시 쓰기 워크숍을 했어요. 시를 가지고 사람들 앞에 나서 이야기를 한 것도, 누군가의 시적 문장에 첨언한 것도 처음입니다. 함께 글을 쓰고, 그중 몇 개의 문장을 나누었는데요. 문장 몇 개로 그 사람의 색과 빛 그리고 열망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놀랍고... 아름다웠습니다. 시 쓰기란 정말 조은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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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신작 발표 소식 🌟

9월에는 차재신, 연정모 둘 다 문예지에 신작 시를 발표했습니다. 차재신은 반연간 문학수첩 하반기호에 ⟨소각장⟩과 ⟨기일⟩을, 연정모는 계간 자음과모음 가을호에 ⟨사랑하기⟩, ⟨앵무⟩를 실었어요. 재밌게 읽어 주시길요! 

반연간 문학수첩 하반기호   /   계간 자음과모음 가을호 

💬 지난 호 답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