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TALK ABOUT #4 빌린 신호를 이어

주연과 슬의 '언어'에 대해

2024.07.17 | 조회 2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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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KEH

음악/공연 문화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문화 이야기들을 전해드리는 BOKEH입니다.

"<TALK ABOUT>은 BOKEH의 두 에디터가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다양한 문화와 관련된 주제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비정기적으로 진행되는 대담 기획입니다."

녹취: 주연, 슬 / 글: 슬

 

TALK ABOUT #4 빌린 신호를 이어

 

 

대담을 시작하기 전에

 BOKEH의 두 에디터 주연과 슬은 해소되지 않는 감정을 언어와 소리라는 수단을 통해 표현해 왔다. 

 각자 시와 국악을 전공하며 착실히 쌓아온 경험을 통해 서로의 수단을 이해해 보고자 시작된 이 대담은 다르지만 맞닿아있는 두 예술의 경계를 탐색한다.  

 


국악/시를 전공하게 된 계기

 

슬 :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기타 등 여러 악기를 어렸을 때부터 배웠지만 딱히 흥미도 못 느꼈고 잘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때 있던 국악 수업에서 처음 장구를 접했는데 너무 재미있었고, 선생님께 재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칭찬을 듣고 신이 나서 집에 가서 부모님께 자랑을 했는데, 마침 '악기를 전공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셨던 두 분의 권유로 국악 타악 레슨을 받게 됐다. 그 후에 '조금 더 배워 보고 싶다'는 생각에 국립국악중학교 시험을 보게 됐는데 운이 좋게 붙었다(웃음).

 

주연 : 부모님이 "악기를 전공했으면 좋겠다" 고 하신 이유가 궁금하다. 그리고 "장구에 재능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는데, 장구에 있어서 재능은 어떤 건가? '리듬감'이 기준일까?

 

슬 :  일단 엄마가 '클래식 덕후'다(웃음). 본인이 클래식을 너무 좋아하니까 '내 자식도 클래식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는 마음으로 나에게 여러 악기를 알려주고 싶어 하셨다. 또 부모님 모두 공연 기획을 하시다 보니 플레이어로서 무대에 설 수 없다는 것에 미련이 있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내가 무대 위에서 악기를 연주하거나 연기를 하는 모습을 볼 때 행복해하셨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ADHD 때문에 책상에 앉아 있는 걸 힘들어했던 내가 장구를 칠때는 2시간씩 앉아서 무아지경으로 연습을 했기 때문 아닐까? 부모님 입장에서는 내가 2시간이나 무언가를 열중해서 한다는 것이 기적이었다. 그래서 국악 타악을 전공으로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때 당시 내가 어떻게 연주 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어렸을 때부터 '리듬감'은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나는 음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 아니라서 노래를 하거나 악기를 연주할 때 세세한 음들을 맞추는 것이 어려웠는데, 박자에는 민감했어서 어려운 박자도 쉽게 이해했다. 프로가 되는 과정에는 당연히 타악 연주자도 음정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게 장구란 박자만 맞추면 됐기 때문에, 그리고 박자 맞추는 건 꽤 잘했기 때문에. 그래서 재미있었던 것 같다. 

 사실 음악을 전공한 기간 내내 대부분 입시 위주로 흘러갔다. 예중 들어갔으니 예고, 예대 입시도 자연스레 보게 됐고. 처음에는 정말 좋아서 시작했지만, 입시 제도가 없었다면 계속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주연 : 신기하다. 만약에 국악에 입시제도가 없었다면 어떤 것을 전공했을지 궁금하다. 

슬 : 앞서 말했듯이 책상에 앉아 있는 걸 힘들어했기 때문에 국악 타악을 전공으로 선택한 것도 있다.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대학을 가려면 중고등학교 때부터는 수능을 준비해야 하니까. 수능을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할 자신이 없었다. 부모님도 나의 이런 점을 알고 '국영수' 학원은 안 보내셨는데, 악기 레슨, 연기 레슨, 그리고 논술 학원은 보내셨다. 근데 그때 다녔던 논술 학원이 너무 재미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논술 선생님이 흔히 말하는 '운동권 인텔리' 이셨던 것 같다. (웃음) 선생님이 가르쳤던 게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그 당시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글로 쓰는 법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모의 국회'였다. '모의 국회'는 한 달에 한 번 국회의원이 돼서 직접 법안을 구상해보는 활동이었다. 

주연 : 딱 슬이의 어릴 적 이야기 같다(웃음).

슬 : 논술 학원에서 했던 다양한 활동들이 너무 재미있었다. 그리고 부모님이 운동권이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집회 현장에 많이 나갔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회적인 이슈들과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아마 공부로 대학을 갔다면 정치외교학과, 사회학과 아니면 철학과에 가지 않았을까? 또 고등학교 때는 나름 공부하는 것도 좋아해서 성적도 꽤 잘 나왔었다. 물론 예고의 커리큘럼과 일반고의 커리큘럼이 다르기 때문에 일반고에서 공부했다면 성적이 안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공부를 해서 위에 말한 학과들에 진학했으면 지금쯤 운동권이 되어있지 않았을까. 

주연 : 신기하고 재밌다. 엄청.

슬 : 주연은 왜 시를 쓰게 됐는지 궁금하다. 

 

주연 : “왜 시를 쓰게 되었느냐”라는 질문은, "너는 왜 네가 됐어"라는 질문 같다. 수많은 우연과 이유가 모여서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한 가지로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지금에 와서야 정리해 보자면, 엄마가 시를 썼고, 부모님이 시를 통해 인연을 맺으셨다. 또 지금은 어느 정도 제어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어릴 때는 제어하기가 힘들 정도로 감정이 풍부했는데, 이런 특성이 시를 쓸 때는 장점이 됐다. 환영받았다. 또 나도 마찬가지로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재미가 없었다. 재미없는 걸 하는 게 옛날부터 너무 싫었다.

 K-장녀라면 누구든 공감할 텐데. (웃음). 엄마를 기쁘게 만들어주는 게 좋았다. 대회에 나가서 입상하고 좋은 결과들을 낼 때 엄마가 "너 때문에 산다."라는 말을 종종 하셨다. 글쓰기 대회에 나가면 가장 결과가 좋았고, 그럴 때마다 엄마가 기뻐하셨다. 그렇게 어릴 적부터 꾸준히 글을 썼는데, 자라면서 사람들이 내 글을 '시'라고 말해주니 내가 쓰는 것들이 '시'가 된 것 같다. 만약 내가 쓰고 있는 것들이 '글'이라고 불렸다면 나는 '시' 대신 '글'을 좋아했을 것이다.

 언젠가 무대 연기를 하고 싶었다. 연기도 감정이 장점이 되는 일 중 하나였고, 언제 어디서나 다른 사람을 입을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에. 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내가 A라는 화자를 설정하면 화자 A가 되어볼 수 있다. 예컨대 학생이 화자인 시를 쓰면 나는 교과서를 구해서 읽어본다. 그게 결과물이 훨씬 좋다. 또 '폭력적인 사람'을 화자로 둔다고 치면 내가 '폭력적인 사람'처럼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화자를 이해하게 된다. 시는 앉은 상태에서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운동이다. 그 사람으로 살아보지 않고도 그 사람으로 살아볼 수 있다. 가성비가 좋다. (웃음)

 '폭력적인 사람을 이해하는 것’과 '누군가 폭력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시는 후자를 가능하게 만든다.

 내가 시만 계속 써와서 그런 걸지는 모르겠지만, 시는 삶과 너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오히려 '인간학'의 범주에 포함된다.

슬 : 흥미롭다. 아까 말했듯이 나는 장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후에 본격적으로 국악 타악 레슨을 받았는데, 주연도 시에 관심이 생긴 뒤 시 수업을 듣거나 시 과외를 받았는지 궁금하다. 

주연: 나는 시를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고등학생 때부터 시를 전공했는데, 이때도 무언가를 '배웠다'기 보다는 시인의 특강을 듣고, 작법서와 이론서들을 소개받고, 2시간 동안 하나의 주제를 정해놓고 그것에 대해 쓰고 퇴고하는 과정들을 겪었다.

 시 과외를 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시를 가르친다는 말은 '인생을 가르치다' 처럼…….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다. 최근에 "사람이 바뀔 수는 있지만 사람을 바꿀 수는 없다" 라는 말을 들었다. 시도 마찬가지로 가르침을 받을 수는 있지만 가르쳐 줄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과외를 할 때에도 과외생들이 알아서 다 알게 되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슬 :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시는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주연의 말을 듣고 "지구에서 인간 군상에 대해 가장 깊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소설가가 아닐까."라는 말을 들은 것이 생각이 났다. 시인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싶은데, 이에 대한 주연의 생각이 궁금하다.

주연 : 소설가가 인간 군상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에 완전 동의한다. 슬의 질문을 듣고 든 생각인데 시인과 소설가의 차이란 뭘까?

 


시란? 국악이란?

슬 : 시도 소설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웃음). 소설가는 어떤 집단의 특성이나 인간관계에 대해 묘사한다면 시인은 감정을 묘사하는 것 같다. 시를 읽으면 감정이 폭발하는 느낌이랄까. 소설은 등장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먼저 보인다면 시는 감정이 먼저 보인다. 

주연 : 물론 예외는 있지만, 소설에는 '갈등'이 있어야 한다고 배웠다. '갈등'이 생기려면 등장인물 사이에 '차이'가 있어야 하는데, 사람 사이의 '차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어렵다. 슬이가 나와 다른 사람임을 나는 머리로 알고 있지만, 진실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내가 슬의 어깨를 만졌을 때 내 손이 슬의 어깨에 닿았음을 느낀다. 반대로 슬은 어깨에 내 손이 닿았음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닿아있지만 전혀 다른 감각을 한다. 닿아봐야 '차이'를 인식할 수 있다. 

 너와 내가 다르고, 안타깝고, 안아주고 싶어. 그러다 보니 부딪쳐. 부딪쳐보니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게 더 잘 느껴져, 이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들이 전개될 때 소설이라고 느끼는 것 같다. 물론 언제나 예외는 있지만 (웃음).

 정리하자면 소설은 이런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을 바탕으로 '분출'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장르라면, 시는 달팽이 같다. 달팽이 집-즉 껍데기- 안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혼자만의 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슬의 말대로 시는 감정이 우선시되는 것 같다. 

 또 소설은 이야기꾼이 쓰는 글이라면 시는 말꾼이 쓰는 글 같다. 소설가가 하고 싶은 모든 말이 적혀 있는 것이 소설이라면, 시인은 하고 싶은 말 하나를 위해 상황, 인물, 묘사, 그리고 비유 등을 다 갖춰놓는다. 소설은 전반적으로 펼쳐두는데,

<에코의 초상>, 김행숙, 2014, 문학과지성사
<에코의 초상>, 김행숙, 2014, 문학과지성사

 예컨대 김행숙의 <조용한 지구> 라는 시가 있다. 작가는 사람들이 증발하여 조용해진 우리 행성의 모습을 계속 묘사하다가 “왜 나는 데려가지 않아요?” 한마디 한다. “왜 모든 것 속에 나는 없어요?” 한마디 더 한다. 나 혼자 지구에 동떨어져 있는 듯한 외로움 하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시공간을 설정한 것이다. 감정이 먼저 있고 그에 따른 배경이 뒤에 만들어진다. 나는 시의 이런 점이 너무 멋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하고 싶은 형식의 글쓰기이다. 

슬 : 나는 시를 읽다 보면 '공간감'이 느껴진다. 그래서 다른 형식의 글들을 읽을 때보다 집중력을 덜 요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ADHD 이슈가 심해질 때 읽기 편하다? (웃음) 

 소설은 소설가가 예쁘게 꾸며놓은 테마파크 안에 나를 던져두고 "내가 꾸몄어. 예쁘지?"라고 말하는 느낌이라면 시인은 나를 백지 상태의 방에 던져두고 시를 읽힌 다음에 "자, 이제 네가 그려봐. 여기에다 뭔가를 추가해 봐."라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내가 읽었던 대부분의 시들은 소설보다 짧았기 때문에, 짧고 임팩트 있는 글을 읽을 때 '상상할 수 있는게 더 많다'라고 느꼈다. 

 시랑 소설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든 생각인데, 국악에는 성악곡과 기악곡이 있다. 둘 다 같은 국악이지만 나는 다르게 감각한다. 판소리, 민요, 정가처럼 인성을 이용한 장르는 '이야기'가 중점이 되는, 소설과 비슷하다고 느끼고, 기악곡들은 좀 더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시처럼 느껴진다.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성악곡 중 판소리의 경우엔 *창, **아니리등을 통해 긴 이야기들을 엮어 나간다. 소리꾼이 이야기꾼이 되어 청자에게 말하는, '예쁘게 꾸며놓은 테마파크' 같은 장르이다. 반대로 기악곡들은 들었을때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백지 상태의 방'처럼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 

국립극장 송년 판소리 <안숙선의 만정제 춘향가>
국립극장 송년 판소리 <안숙선의 만정제 춘향가>

*창 : 박자와 음정이 있는 노래. 고수의 장단에 맞춰 노래한다. 

**아니리 : 창을 하는 중에 일상적인 말투로 엮어나가는 사설. 

주연 : 기악곡은 멜로디만 있는건가?

슬 : 주연이 생각하는 멜로디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주연: 텍스트가 아닌 것?

슬 : '텍스트가 아닌 것'이라면 기악곡엔 멜로디만 있는게 맞다. 

주연 : 그럼 슬이 생각하는 멜로디는 어떤 것인가?

슬 : 멜로디의 사전적 정의가 '선율'이다. '선율'이란 소리의 높낮이가 길이나 리듬과 어울려 나타나는 음의 흐름인데, 

그렇다면 기악곡엔 '선율'만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선율이 선율로 들리고, 더 나아가서 음악이 음악으로 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론적으로는 설명이 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다.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끼리 종종 생활 속 소음의 음정을 맞추는 놀이를 하곤 하는데, 그렇다면 일정한 리듬으로 소음이 반복된다면 그것은 선율일까? 나는 시계의 초침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그 소리도 음악처럼 느껴진다. 

주연 : 시계초침에 대해 듣고 난 후 든 생각인데, 시계 초침은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으로만 존재한다. 그런데 나는 반복을 느끼는 지점이, A가 연속 되다가 B가 잠깐 등장했다가 다시 A가 연속될 때다. 그리고 이건 시에서 얘기하는 '반복'인 것 같은데, 음악에서 얘기하는 반복은 어떤것인지 궁금하다.

슬 : 같은 음정, 같은 박자인 선율이 연속적으로 등장하면 그것을 반복이라고 하는 것 같다. 대중음악을 예로 들자면 음정과 리듬을 비슷하게 가져가면서 끊임없이 재조합하는데 사람들은 3분 남짓 되는 길이 동안 곡이 계속 변화한다고 느낀다. 그래서 음정, 박자 중 하나라도 바뀌면 반복이 아니라고 느끼지 않을까 싶다. 

주연 : 같은 단어이지만 시/음악의 관점으로 보면 다른 의미가 된다는것이 흥미롭다. 슬의 얘기를 듣다보니 음악에 대해, 특히 슬의 전공인 국악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슬이 생각하는 '국악'이란 무엇인가?

슬 : 사전에는 한국의 전통음악 이라고 나와있는데, 나는 항상 '전통'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예컨대 많은 사람들이 사물놀이를 전통음악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국악을 기반으로 한 창작곡에 가깝다. 사물놀이가 우리 엄마보다 어리다 (웃음). 물론 기존의 풍물놀이를 재구성 한 작품이지만, 만들어진 지 40년 남짓 된 음악을 전통음악으로 분류하기엔 무리이지 않나. 또다른 예로 잠비나이는 국악인가? 국악기를 사용했다 뿐이지 음악의 형식이나 질감은 포스트록이라고 생각한다. 

사물놀이
사물놀이

 누군가 나에게 "이건 국악이에요?" 라고 물어보면 항상 대답하기가 꺼려진다. 국악도 예전에는 대중음악이었고, 클래식도 마찬가지이다. 어느새 두 장르 모두 전통이라는 이름 하에 연구해야 되고, 공부해야 되는 장르가 되어버렸다. 나는 요즘 재즈도 클래식화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불과 몇십년 전만해도 대중음악이었는데도. 전통이라는 건 대체 언제 생기는지, 언제부터 전통의 이름을 가질 수 있게 되는지 궁금하다. 

주연 : 나는 전통이 사회적인 약속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위안을 얻는다는 의미에서 노스텔지어도 전통에서 오는 것 같고. 겪어보지 않아도 소속될 수 있다는 게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것 같다.

메리올리버의 <기러기>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세상은 너의 상상에 맡겨져 있지./저 기러기들처럼 거칠고 흥겨운 소리로 너에게 소리치지-/세상 만물이 이룬 가족 안에 네가 있음을/거듭거듭 알려주지." 가족이 없어도 세상이라는 이름의 가족이 있다. 어제 태어난 아이에게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사회가 있다. 또 시 이야기로 넘어와버렸는데, (웃음) 음악에서의 전통은 '학습된 무언가' 같다. 나는 한 번도 그 시대에 산 적 없는데도 내 뿌리라는 이유로 국악을 들을때 위안이 든다. 사실 시나 소설에 관련해서 이론 수업을 할 때에도 나는 전통에 관심이 없다. '처음 쓰인 시'보다 '최초의 시를 쓴 시인은 어째서 그 시를 썼을까'가 더 궁금하다. 그래서 전통이 나에게는 인간학처럼 다가온다. 

슬 : 조금은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그동안 국악을 공부한 느낌인데, 주연은 창작가 같다. 둘 다 예체능을 전공하지만, 각자 전공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다. 사실 전통은 답이 어느정도 정해져있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테크닉이 분명히 있고, 공부해야할 음악의 형식들이 정해져있다. 

 국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전부 공감할 이야기인데, 대학에 오면 '맨땅에 헤딩' 하는 느낌이 강하다. 입학 전에 대학 선배께 창작곡을 같이 만들어보자는 연락을 받았는데, 여태까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본 적이 없고, 모방에 가까운 기술을 뽐내는 법만 알던 나에게 이런 제안은 정말 막막했다.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국악에 대한 연구가 투트랙으로 이루어져야한다. 전통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어떻게 현대의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방식의 창작을 국악기로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급진적으로 전통과 전통을 기반으로 한 창작, 이렇게 두 전공을 따로 뽑아야한다고 생각한다. 둘 다 하려니 해야 하는게 너무 많더라. 

주연 : 예전에 "삶은 어떻게 살아야 되는게 아니라 그냥 있는거다" 라는 글을 읽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시를 어떻게 읽어야 될 지 모르겠다고 물을 때가 있는데, 시가 교과서에 나오는 장르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독해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다. 예전에 <소나기>가 수능 지문에 나왔을 때, <소나기>를 쓴 작가도 그 문제를 못 풀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창작물은 창작되는 순간 작가의 손을 벗어난다. 이후에는 독자와 청자의 몫이다. 음악도 시도 어떠한 방법으로 읽고 듣는 것이 아닌, ‘그냥’ 읽고 들어야 하는 것 같다. 

슬 : '그냥 읽고 듣는 것'이라니. 너무 좋은 문장이다. 주연은 어렸을 때 어머니의 영향으로 국악을 종종 들었고, 최근엔 교양 수업으로 해금을 배웠다고 들었다. 국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주연 : 국악에 대해 이론적인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답하기 어렵지만 (웃음). 국악을 들을때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학교에 입학하고 난 뒤 '예대 민속 연구회' 라는 동아리를 알게 되었는데, 너무 들어가고 싶었다. 이상하게 그들은 무대에서 '연주'를 한다기보다 노는 것처럼 보였다. 전통음악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놀 줄 안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 같은데, 국악을 잘 모르는 내가 볼때도 전통음악은 놀이에 가까워보인다. 다른 장르의 예술이랑은 차원이 다른 세계 같다.

슬 : 국악 대담에서도 했던 말이지만 민속악을 들을때면 흥이 난다. 원초적인 흥이랄까? 주연의 말대로 놀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내가 전통음악을 전공하기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니면 한국인의 DNA에 새겨져 있는 건지 늘 궁금했다. 

주연 : 사실 즐겨듣지 않기 때문에 음악을 잘 모른다. 내가 무언가를 '듣는' 건 ASMR밖에 없는데, 음악을 들으면 가사를 강요당하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 것 같다. 예컨대 케이팝을 들으면 무조건 신나해야할 것 같고, 발라드를 들으면 울어야만 할 것 같달까? (웃음) 근데 국악은 다르다. 신남을 강요당하는게 아니라 그냥 듣기만 해도 신나지는 느낌이다. 

 슬은 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언제 처음 보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슬 : 나는 시를 교과서에서 처음 접했다. 그러다보니 어렵게 느껴져서 접근을 못하고 있다가,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을 선물 받았다. 그동안의 나에게 시란 분석하고 공부해야하는 무언가였는데, <내 청춘의 영원한>을 읽고 나니  '이래서 사람들이 시를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 1981, 문학과지성사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 1981, 문학과지성사

주연 : 인생의 3분의 1을 시와 함께한 나로서는 사람들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재미있다. 나에게 시란 삶의 한 부분이라서. 나도 교과서에서 시를 처음 봤다.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 이라는 시인데, 기다리는 화자가 지금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는 문장이 있었다. 기다리는 화자가 "너 왜 이렇게 안오냐. 지금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또 너의 것이었다가 결국엔 문이 닫히는데. 전부 너 같은데 네가 아니다. 언제 오냐.” 는 표현 방식이 학생일 당시에는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싶어서 정말 좋아했다. "너'였다가'/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라는 변주가 좋다.

 '공부'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시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생각해보면 몇 명의 비평가들이 모여서 작품들을 해석해놓은게 교과서인 것 같은데, 사실 문학에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지만 시험에서는 정답이 존재하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문학 작품을 읽을때 정답을 찾으려고 해서 더 어렵게 느끼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떻게 분석하느냐는 각자의 몫인데도. 

 슬이 말한 최승자의 <내 청춘의 영원한>이 좋은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그냥 읽자마자 '진짜 좋은 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최승자의 모든 시들이 그렇다. 이런 시도 있다.

 

<이 시대의 사랑> 중 <일찌기 나는> 최승자, 1981, 문학과지성사
<이 시대의 사랑> 중 <일찌기 나는> 최승자, 1981, 문학과지성사

 

 좋다. 너무 좋다. 그런데 왜 좋은지 모르겠다. 이 시를 해석해보라고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세 시간도 떠들 수 있다. 그런데 그 해석 때문에 이 시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이유 없이 ‘좋은 시구나’ 느껴지는 시가 있다. 해석은 그 뒤에 온다. 마지막 문장에서의 ‘살아있음’과 ‘영원’과 ‘루머’가 좋다. ‘살아있음‘이 ’탄생‘이었거나 ’영원‘이 ’오래‘였거나 ’루머‘가 ’소문‘으로 대체되었으면 안된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는 문장이 ’내가 태어났다는 것, 그것은 오랜 소문에 지나지 않는다’였으면 안된다.그 단어가 있어야 하는 곳에 그 단어가 들어간다. 심장이 있는 곳에 콩팥이 있어도 되겠지만, 심장이 있는 곳에 심장이 있어서 그게 정답이 되는 꼴이다.왜 좋은가? 그걸 찾아나가다보면 시를 쓰게 된다. 나 지금 너무 오타쿠 같다. (웃음)

슬 : 나에게 시는 현대미술 같다. 그래서 더욱 어떤 시를 잘썼다에 대한 기준을 잘 모르겠다. 대체로 해체되어있는 시들이 좋은 시라고 여겨지는 것 같은데 직관적인 시는 좋은 시가 아닌 것인가?

주연 : 비유나 은유가 어렵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이 정확한 시가 직관적인 시라면 누구나 쓸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무언가를 제시하는 시들이 좋은 평가를 받는 것 같다. 그것과 별개로 내가 직관적인 시를 쓰지 않는 이유는 재미없기 때문이다. 혹시 행운의 펭귄 이야기를 들어봤나? '모두가 못생겼다고 하는 펭귄이 맘에 든다면 그것은 너의 행운의 펭귄이다'는 이야기인데 어쩌면 직관적인 시가 슬의 행운의 펭귄일수도 있겠다. 

 결국 각자 좋다고 생각하는 시가 좋은 시이고, 잘 쓴 시이지 않을까. (웃음) 

슬 :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받아서 읽어본 시집이 지나치게 해체적이다 라고 느낀 이후로 시가 더 어려워진 것 같다. 그렇지만 음악도 많이 몰랐던 시절에는 귀에 꽂히는 멜로디가 있어야 좋은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사운드의 질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직관적으로 꽂히는 멜로디가 지루하다고 생각하는데 전보다 음악에 대해 아는 것이 좀 생겨서 그렇게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주연 : 나도 마찬가지이다. 너무 많은 시를 읽었으니 도파민에 절여진 상태에서 더 큰 도파민을 원하는 사람처럼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를 한 시들에 재미를 느낀다. 

슬 : 예전에 띄어쓰기를 아무렇게나 한 시를 읽었는데, 글이라기 보다는 그림 같았다.  텍스트로 표현한 현대미술 같달까? 음악도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중요한 장르들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장르가 케이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시를 읽을때 케이팝스럽다고 느꼈다. 

주연 : 음악은 귀로 듣는 것인데 보는 음악이라니 신기하다. <효심의 노래>라는 시가 있는데 그 시가 대표적인 '보는 시'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형식을 쓰려면 왜 이 형식이어야 하는지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유를 기본적으로 하는 사람이 쓰는 시각적인 시는 재미있을 수 밖에 없다.

<캣콜링> 중 <지극한 효심의 노래>, 이소호, 2018, 민음사
<캣콜링> 중 <지극한 효심의 노래>, 이소호, 2018, 민음사

슬 : 나는 좋은 음악이란 표현하고 싶은 것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했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전달력은 테크닉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 잘 드러내는 사람들은 좋은 테크닉을 가지고 있더라. (웃음) 시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시/국악은 배울 수 있는 것인가?

슬 : 조금 다른 얘기이지만 말하다보니 시도 음악도 '배울 수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국악을 전공하며 중고등학교때는 테크닉을 주로 배웠고 대학에 와서는 결론이 이미 나 있는 것들을 외우는 느낌이 들었다. 국악은 답이 정해져 있는 것 같아서 늘 지루했다. 그러다보니 내가 답을 만들어갈 수 있는 창작에 자연스레 더 관심이 갔던 것 같다. 그렇다면 창작은 배울 수 있는 것일까? 단순하게 음정과 박자를 잘 맞추는 것을 '음악을 잘한다'라고 표현할 수 있나? 음악을 잘한다는 것은 내 생각이나 감정, 그리고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얼마나 잘 녹여냈냐로 판단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배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음악을 배우고 가르치고 음악전공생들이 무조건 잘한다는 시각이 불편 할때가 많다. 

주연 :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배우기도, 가르치기도 하는 입장으로서 시를 배운다는 것은 문학이 가지는 한계를 설명하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비평 같은 경우는 새로운 것을 끌어와야 하는 재능의 영역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시 창작 수업의 경우에는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고, 서로 쓴 시를 합평하는 것이 다이다. 사실 비평 수업도, 시 창작 수업도 '가르친다'와는 거리가 먼 것 같다.

과외를 하다보면 "이렇게 써도 될까요?"라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는데, 나는 그럴때마다 "그렇게 써도 됩니다"를 반복해서 말한다. 수업을 함에 있어서 나의 가장 큰 목표는 시를 재미있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만큼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 달 동안 다 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20년, 30년 동안 천천히 배우면서 '시 너무 재미있네. 이거 아니면 안되겠네.' 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드는 것. 누군가에게 시의 매력을 알려주는 것이 재미있다.

 슬이 아까 테크닉에 대해 말을 했는데, 음악에서의 테크닉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시에도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 이니까.

슬 : 어려운 질문이다. (웃음) 음악에서의 테크닉은 완성된 악보나 곡을 연주해야 할 때 필요한 것 같다. 예컨대 국악 작곡을 전공하는 사람에게 연주를 부탁받아서 악보를 받아보면, 상세하게 어떻게 연주 해야하는지 적혀있다. 그러한 의도들을 잘 표현하는 것이 좋은 연주이다. 잘 표현하려면 테크닉은 필수이고. 음악과 시는 배우거나 가르칠 수 있는 것일까?

주연 : "음악과 시는 배우거나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 이 문장도 되게 시적이다. ‘배우다’와 ‘가르치다’는 서로 반대되는 문장이니까.

 

음악과

시는

배울 수

가르칠 수

있는 것일까?

 

이렇게만 해도 시가 된다. (웃음) 재미있다. 테크닉이란 "음악과 시는 배우거나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라는 문장의 연과 행을 마음대로 띄우고, 붙이고, 변주하는 것이다. 혹은 이 문장의 '음악'과 '시'를 각각 A와 B라고 가정했을 때, 와 의 자리를 바꾸거나, 서로의 자리를 떨어트리거나, 가까이 두는 것 역시 테크닉이다.

'음악'이라는 단어를 '울음'이나 '목소리', '짖음'처럼 '들을 수 있는 것'이라는 성질에 집중하여 비유하는 작가가 있고, '음악'이라는 단어를 '편지'나 '고백'처럼 '마음을 전하는 용도'라는 성질에 집중하여 비유하는 작가가 있을 것이다. 혹은 '음악'을 '교보문고'나 '스프레이'나 '묘목'으로 비유하는 작가도 있을 것이다. 각자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하나의 문장에 두 개의 단어가 나오면 두 개의 단어 모두를 비유하는 방법도 있고 둘 중 하나를 비유하는 방법도 있다. 영어를 쓰거나 괄호를 쓰는 방법도 있다.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사진을 넣을 수도 있고 찢을 수도 있다. 음악이 될 수도 있다. 방법이 너무많다. 선택지가 너무많다. 그것도 시인의 몫이다. 그리고 이건 가르칠 수 없는 영역의 일이다. '이런 것도 시야!'라고 예시를 보여줄 수는 있겠지만, 선택은 언제나  사람의 몫이다. 숫자를 본 적 없는 사람이 더하기 빼기를 하기에 더 어려운 것처럼, 그래서 시는 가르치기보다 보여줄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선택지를 넓혀주는 것.

슬 : 주연이 말한 테크닉과 내가 말한 테크닉은 좀 다른 것 같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레슨을 해준다면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은 테크닉 밖에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늘 했다. 어떻게 효율적으로 소리를 내는지 알려줄 수는 있겠지만 창작하는 법은 알려줄 수 없는 것 같다. 내가 알려주는 순간 그것은 나의 작품이지 그 사람의 작품은 아니기 때문에. 

주연 : 나도 창작에 있어서는 슬과 같은 생각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는데, 다음 시간에는 서로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시/국악을 가져와서 이야기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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