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자주 듣던 팟캐스트에서 흥미로운 영화를 소개받아 영화관으로 향했다. 천재성을 지닌 흑인 여성 3명이 NASA 최초의 우주궤도 비행 프로젝트에 선발되며 그 안에서 겪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히든 피겨스’다. 영화를 소개하던 이는 ‘우주전쟁’을 주제로 로켓의 시작과 그 과정들을 주로 풀어 내었기에 나 또한 그런 부분을 기대하고 영화를 보았으나 영화가 끝나고 내 마음에 더 남았던 건 ‘흑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영화에선 흑인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많은 부분을 감내해야 하는지에 대해 간접적이지만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이 매일매일 참아내야만 하는 것들과 인간이기에 당연히 올라오는 감정들을 얼마나 자주 삼켜내고 깊은 곳에 묻어버려야 하는지를.
우리는 그런 장면들을 보면 그 인물들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공감을 한다. 그러나 그 공감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흑인’이 되어 그들의 삶 속에 깊게 들어가 그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자 시도했던 ‘백인’이 있다. 오늘 소개할 책의 저자. 바로, 존 하워드 그리핀이다.
*존 하워드 그리핀 (1920년 6월 16일-1980년 9월 9일)

이번에 소개할 ‘Black like me’는 백인인 그리핀이 온몸을 검게 물들이고서 흑인차별이 가장 극심한 미국 딥 사우스 지역을 여행한 기록을 담아낸 책이다.
흑인. 남부. 이런 것은 세부적인 문제일 뿐이다. 여기에 담긴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영혼과 육체를 파괴하는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기 자신마저 파괴되는) 사람들에 관한,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관한 보편적인 이야기다. … … 나는 독일에 있는 유대인일 수도 있고, 미국 내 흩어져 사는 멕시코 사람일 수도 있으며, 그 어떤 ‘열등한’ 집단에 속한 어느 누구일 수도 있다. 세부적인 것만 다를 뿐, 결국은 같은 이야기다.
# 1959년 10월 28일 ~12월 15일
남부 흑인의 자살이 늘고 있다는 기사를 본 그리핀은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던 생각을 다시 꺼내어 결심을 한다. “흑인과 백인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가 흑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핀은 외롭고도 지독한 여행을 시작한다. 머리를 밀어내고, 온몸에 일광욕과 약품, 염료들을 바르고, 전문의의 도움을 받아 백인에서 완벽하게 흑인으로 변신한다. 그리고서 마주한 거울 속 자신. 그리핀은 거울 속 자신을 보며 혼란스럽다.
나는 두 사람이 되었다. 한 사람은 관찰하는 이고, 다른 한 사람은 공황상태에 빠져 뼛속 깊은 곳까지 흑인을 느끼는 이였다.
그리핀은 그저 그리핀 그대로였다. 변한 것이 있다면 단 하나. 검게 변한 피부색뿐이다. 하지만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 그리핀은 온몸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문밖을 나가는 그의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초반 부분을 읽다 보면 마음이 굉장히 무거워진다. 당시 그리핀은 아내와 딸이 있었다. 소중한 가족들을 뒤로하고 이런 큰 결심을 하게 된 배경은 시각장애인으로 살았던 약 10년간의 경험에서였다. 그는 시각을 잃고서 ‘타인’로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몸소 느꼈다. 그는 온전히 그 자체 그대로이고 단지 ‘시력’만을 잃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그를 ‘나’와는 다른 ‘타인’로 받아들이며 시각장애와 관련 없는 면에서도 열등할 것이라고 여겼고, 그때의 경험은 그리핀에게 큰 동기를 부여한다.
‘어떤 개인적 희생을 치르더라도 모든 사람에 대한 평등한 정의를 인간의 권리로 요구해야 한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종’이라는 단어는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 와닿기엔 어렵고 힘들다. 하지만 여러 인종이 함께 살아가는 미국에서 ‘인종’이란 아직도 굉장히 무거운 주제이다. 실제로 이 책을 발표한 이후 존 하워드 그리핀은 끊임없는 살인 위협에 시달린다. 현대에는 인종이나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대놓고 직접적인 차별 행위가 벌어지는 일은 거의 없지만, 간접적으로 일어나는 인종차별은 분명 존재한다. 전혀 머나먼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여러 ‘타인’들이 떠오른다. 그리핀이 책의 서두에 밝힌 것처럼 그 ‘타인’은 인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열등한’ 집단에 속한 어느 누구라도 대상이 될 수 있다.
인간으로 태어났음에도 그들과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고, 끊임없는 편견들 속에 오해받으며 멸시하는 시선들 속에서 스스로의 존엄성까지 버려가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 책 한 권으로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잘못된 생각이 심어진 집단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단지 옛날 그 어느 날의 사건이자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의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somdy_k
책과 이어지는 인연들이 소중한 '솜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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