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에 첫째딸과 함께 성장클리닉에 다녀왔습니다. 동일 월령 대비 체중이 너무 낮은 게 걱정이었거든요. 지금은 마음이 꽤 평온해졌는데, 성장클리닉의 검사 결과가 괜찮게 나오기도 했지만 <데이터는 어떻게 인생의 무기가 되는가>를 읽으며 양육자로서 부모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해본 것도 컸습니다. 성장클리닉을 다녀오면서 어떤 경험을 했고, 또 책에서 어떤 걸 얻었는지를 정리해 블로그 글로 썼는데요. 이번 레터는 후자를 간단히 공유드리려고 합니다. (어쩌다보니 한달만에 쓰는 레터가 또 육아 얘기네요. 쟁여둔 건 많은데 글로 마무리를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래도 당분간은 조금 더 짧은 주기로 블로그와 레터가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데이터는 어떻게 인생의 무기가 되는가>의 주요 메시지는 ‘삶에서 내리는 크고작은 의사결정을 데이터를 통해 더 잘 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 한 꼭지가 육아할 때의 의사결정에 대한 이야기였죠.
부모의 영향에 대한 연구
아기가 태어나고 첫 1년 동안 부모는 대략 1,750개나 되는 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합니다. 모유수유를 할까 말까, 수면 교육을 어떻게 할까, 어떤 소아과에 다닐까 등. 첫돌 이후에도 필요한 의사결정은 끝이 없습니다. 부모가 이런 의사결정을 더 잘 내릴 수 있게 데이터가 도와줄 수 있을까요? 부모가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더 나은 사람이 될까요?
이는 곧 뿌리깊은 ‘본성 대 양육’ 논쟁의 연장선이기도 합니다. 유전자가 중요한가, 양육환경이 중요한가? 라는 거죠. 어린 시절에 다른 부모 밑에서 자란 일란성 쌍둥이, 그리고 입양 가정의 형제자매를 대상으로 한 연구를 통해 이에 대한 답을 일부 얻을 수 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부모는 자녀의 종교 성향, 청소년기 약물/알콜 복용, 성적 행동, 부모에 대한 감정에는 어느정도 영향을 끼칠 수 있지만 기대수명, 건강, 교육 수준, 종교, 장래 소득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 모유수유는 아동 발달의 여러 측면에 유의미한 장기적 효과가 없습니다.
- TV 시청은 아이의 시험 성적에 장기적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 어릴 때 체스와 같은 인지능력을 사용하는 게임을 가르치더라도 장기적으로 아이들이 똑똑해지진 않습니다.
- 이중언어 교육은 아동 인지능력의 여러 측면을 조금밖에 향상시키지 못합니다. (그 조금의 향상조차, 긍정적 결과를 공개하는 걸 선호하는 편향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부모가 내리는 수천가지 의사결정의 총합이 아이에게 미치는 장기적 영향이 (적어도 건강, 학력, 소득 등에 대해서는) 우리가 걱정하는 것보다 훨씬 작다는 뜻입니다. 수천가지의 총합이 통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내리는 의사결정 하나하나의 중요성은 더욱 작아지겠죠.
이걸 ‘당신이 어떤 노력을 하든 아이의 미래는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로 읽으면 염세적으로 보이지만, ‘그러니까 너무 고민 말고 마음 가는 대로 육아하라’로 읽으면 위안이 됩니다. 제가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성장클리닉에 다녀온 상황이었으니 더욱 그랬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상당히 안심이 되고 흥미로웠는데, 또 하나 인상적인 연구가 있었어요.
동네의 영향에 대한 연구
미국의 경제학자 라지 체티는 미국 납세자 전체의 몇십년어치 데이터를 이용해 어린 시절의 거주지가 장래 소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체티는 특히 ‘어린 시절의 이사’에 주목했는데, 예를 들어 어떤 가정에서 형이 13세이고 동생이 8세일 때 도시 A에서 도시 B로 이사갔다고 해보죠.
만약 ‘양육하기 더 좋은 환경’이라는 게 존재하고, A가 B보다 더 좋다면, 형이 더 좋은 환경에 5년 더 오래 살았으므로 형의 장래 소득이 더 높아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보통은 데이터세트가 한정적이어서 이런 분석을 할 만한 표본이 충분치 않지만, 이 연구에서는 데이터세트가 워낙 방대했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이러한 형제자매는 유전적으로는 거의 동일하고 양육환경도 ‘특정 거주지에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를 제외하고는 동일했으므로, 오로지 ‘거주지’라는 특정 환경 요인이 미치는 영향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가치있는 연구가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장래 소득에 유리한 도시는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미국에서 아이 기르기에 가장 좋은 도시에서 자라는 것만으로 아이의 장래 소득이 약 12% 증가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죠.
더 나아가, 체티 연구진은 특정 도시의 특정 동네가 다른 동네보다 장래 소득 증가분이 유의미하게 크다는 것도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그 동네는 왜 좋았던 걸까요? 연구진은 ‘좋은 동네’를 예측하는 3가지 공통 변수를 다음과 같이 찾아냈습니다. (미국의 연구라는 걸 감안하시고요)
- 주민들 중 대졸 이상인 사람들의 비율
- 양친이 있는 가정의 비율
- 인구조사 응답을 제출한 사람들의 비율
이 3가지 특징은 그 동네에 사는 성인들의 특성을 말해줍니다. 똑똑하며, 안정적인 가정에서 살고, 시민사회에 참여하는 어른들이라는 거죠. 체티는 후속 연구를 통해, 동네에서 아이들이 보고 자라는 ‘좋은 성인 역할모델’이 좋은 학교나 인구밀도 등 다른 요인들보다 아이들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친다는 걸 밝혔습니다.
불안해하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육아해도 괜찮다. 아이가 좋은 어른들을 많이 만날 수 있게만 해주자.
저자 세스 스티븐스는 두 가지 연구를 종합 분석하여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 부모의 영향에 대한 연구: 좋은 가정에 입양된 쌍둥이는 장래 소득이 높아진다.
- 거주지의 영향에 대한 연구: 부모도 아이도 변동이 없는 상태에서, 좋은 동네로 이사하는 것만으로 장래 소득이 높아진다.
- 2로 인해 변화하는 장래 소득 증가분이 1로 인한 장래 소득 변화의 상당 부분을 설명한다. 다르게 말하면, 부모가 내리는 수천가지 의사결정 중 ‘아이를 어디서 기르느냐’라는 하나의 결정이 다른 것들보다 훨씬 중요하다.
- 따라서 육아할 때, 웬만하면 그냥 크게 고민하지 말고 직관에 따라 아이를 길러도 괜찮다. 단, ‘아이가 어떤 사람들을 보고 자라느냐’ 하나만큼은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라.
모두 미국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연구이기도 하고, 기저 연구들을 제가 직접 읽어본 건 아니라서 제 상황에 바로 가져오는 건 조심스럽긴 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양친이 있는 가정의 비율’과 ‘인구조사 응답을 제출한 사람들의 비율’이 동네마다 유의미하게 차이나진 않겠죠.
하지만 아이가 좋은 역할모델을 접하게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은 분명히 가지게 됐습니다. 그리고 내 아이가 좋은 성인들을 많이 만나려면, 내가 먼저 좋은 어른이 되어야 하겠죠. 내가 주변 아이들에게 좋은 역할모델이 되어주고, 주변의 좋은 어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내 주변에 아이가 만날 만한 좋은 어른들이 많아질테니까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아내와 제가 무척 좋아하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라는 영화에는 “아이들에게는 함께 하는 시간이 전부라고요”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사실 위에서 소개한 연구들은 대부분 ‘아이의 장래 소득’에만 초점을 맞췄지만, 저는 ‘아이의 부모에 대한 감정’이 ‘부모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 중 하나로 나온 것이 반가웠습니다.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에 대한 사랑이 천천히, 하지만 끊임없이 깊어지는 걸 확실히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이에 대한 블로그 글을 쓰기도 했고요. :)
날이 추워지면서 딸의 식욕이 조금 줄었지만, 여름보다는 확실히 상황이 나아졌습니다. 그리고 11월에 동생이 태어난 걸 계기로 식사 시간을 무한정 늘어지게 했던 유튜브 키즈 시청도 중단시켰고요. 체중도 긴 정체기를 지나 점점 늘어나, 오늘 드디어 13.0kg을 찍었습니다. 책에서 읽은 것처럼, 우리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우리의 아이들은 잘 자랄 겁니다. 우리가 좋은 어른이 되기만 한다면요.
두 아이를 기르며 몸은 축나고 있지만 마음은 풍성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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