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소개 24-2 / 농담, 밀란 쿤데라

인생이라는 거대한 농담 / 독후감

2022.12.31 | 조회 1.14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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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느의 고전 읽기

변치 않는 가치를 지닌 고전 문학 이야기

메일 수신 시 '웹에서 보기'로 읽으시면 포맷이 좀 더 눈에 잘 들어와요.

 

 

세상을 바꾼다는 열망과 기대로 사회와 집단을 우선시하며 공산주의의 이념 아래 경직되어가는 분위기조차 희망으로 받아들이던 시기, 마음에 드는 여학생을 도발하려고 엽서에 적었던 단 한 줄의 농담은 주인공 루드비크의 인생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습니다. 언제나 자신이 속한 또래 집단에서 주목받고, 주변인이기보다는 리더로서 지내왔던 그는 이 사건으로 완전히 사회 주류에서 밀려나요. 학교에서는 제적되고 반정치적, 반사회적 인물로 분류되어 탄광에서 고된 노동을 하며 지속적으로 포기와 절망을 경험한 청년기를 보낸 후, 뒤늦게 학업을 다시 마치고 연구소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제는 중년의 나이지만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자신의 부당한 삶에 대한 억울함은 여전히 떨쳐지지 않았고, 우연히 마주친 과거의 파편을 통해 마음속에 품고 있던 막연한 복수의 욕망을 실현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작가는 작품의 초반에 ‘1948년 2월’이라는 체코에서 공산당이 집권하게 된 역사적인 날짜를 제시하며, 그 당시 사회적 큰 흐름에 삶이 휩쓸린 이의 이야기임을 암시합니다. 한때 거대한 물결로 세상을 덮쳤던 공산주의, 전체주의에 대한 경계와 비판이 담겨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 작품은 다양한 사람들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삶에 좀 더 초점을 맞춥니다. 극적으로 인생이 전복된 루드비크를 통해 당시 사회 흐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던 이들의 열망과 정반대의 입장에서 속수무책으로 사회의 처분을 감내하는 이 모두의 심경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헬레나와 야로슬라프를 통해 희망을 품고 자신의 모든 젊음을 사회의 변혁에 바치며 열심히 살았던 이들이 지금의 달라진 세상에 발맞춰 나가기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지만 이제는 모두 다 그저 주변인일 뿐입니다. 혼란스러웠던 시기는 지났고 세상이 변하고 있는 지금, 부당하다고 느낀 과거 혹은 배반당한 것 같은 현재를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개인적인 삶 속에서 분명한 가해자를 찾을 수 없는 아픈 시간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생각하게 합니다. 

 

 

작가 밀란 쿤데라 농담에 대한 간략 소개는↓

 

 

1. 인생이라는 농담

 

인생은 멀리서 보면 비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다

찰리 채플린

 

작가는 등장하는 이들의 허무하고 씁쓸한 인생들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여준다. 비장하고 슬픈 순간조차 어이없게 웃기고 허탈한 그래서 더 쓸쓸한 모습들이다. 밀란 쿤데라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브루노 지역이 사건이 전개되는 무대로 주인공 루드비크가 오랫동안 찾지 않은 고향이다. 하나의 잘 짜인 연극처럼, 축제가 있는 기간임에도 소박하다 못해 열악한 모습의 이곳에서 주인공이 머무는 며칠 동안 내면에 단단히 얽히고 꼬인 과거의 매듭을 풀어내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 공산당이 한참 상승 기세에 있을 당시 빛을 발하던 ‘왕들의 기마행렬’이라는 민속 행사를 이야기의 중심에 배치한다. 

양 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춤을 추는 민속 춤과 백 년이 넘도록 구전을 통해 전해지는 ‘왕들의 기마행렬’이라는 행사가 이어져 오고 있는 전통문화의 성지 같은 지역 브루노. 이러한 지역적 특성 때문에 한때 공산당의 집권으로 체코의 정체성이 중요하게 부각되던 시기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사람들의 흥미에서 멀어지다 못해 소외된 모습이고, 이런 브루노 지역의 상황은 작품 속 루드비카, 헬레나, 야로슬라프 등 주요 인물들의 현재 삶과도 닮아 있다. 

전반적으로 우울하고 침울한 분위기가 지배하는 가운데, 작가는 인생이 우리를 배신하는 순간들, 책의 제목인 ‘농담’과 같은 모습들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우선 이야기의 전개를 이끌어 나가는 복수극 자체가 희비극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애초에 그가 생각해낸 복수라는 것이 청년 시기 자신을 대학에서 제적시키는 투표에 앞장선 학우, 제마네크의 아내, 헬레나를 유혹하는 것이었고, 자신이 전혀 호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에게 공을 들이는 과정이란 게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건 당연한 일. 기자인 헬레나가 우연히 인터뷰를 위해 루드비크의 직장에 방문했고, 영 흥미 없는 둘의 대화를 적당히 끝내고 싶어 엉뚱한 얘기를 시작한 것이 불씨가 되어 둘의 관계는 이상한 방향으로 발전되어버린다. 루드비크는 자신의 기지가 제대로 발휘되었다 생각해 이참에 헬레나의 남편인 제마네크에게 한방 먹일 날을 꿈꾸며 치밀하게 둘의 일탈을 계획했고 복수의 순간을 향해 나아간다.

복수라는 단어는 무릇 비장한 자세, 강력하게 집중하는 에너지로 실행하는 어떤 것을 떠올리게 하지만, 루드비크의 계획은 그렇게 깔끔하고 단순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언뜻 보기에는 치밀한 듯하지만 동시에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빈틈없이 준비한 헬레나와의 일탈은 막상 성사가 되고 나니 감당하기에는 버겁기만 하다. 오붓하고 관능적이어야 할 시간은 고역스럽기만 해 오히려 코미디에 가깝다. 숙제를 해치우듯 둘의 만남을 겨우 끝냈건만, 그 난감한 순간을 꾸역꾸역 참아낸 가장 큰 동기, 즉 제마네크에게 큰 타격을 가하겠다는 15년 만의 복수는 완전히 실패한 채 그 어떤 통렬함도 없이 슬플 정도로 우스꽝스럽고 허탈하게 끝난다. 오랜 시간 품은 한을 풀겠다고 작정한 일이라는 게 고작 유부녀와의 일탈인 것도 보잘것없는데, 그것조차 촌극에 가까웠고, 그 뒤로 곤란한 뒷감당까지 해야 하는 상황에다 이 모든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었다니. 당황스럽고, 자괴감만 느껴질 뿐이다. 원수처럼 생각했던 제마네크는 오히려 시대의 흐름과 함께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고 루드비크 자신만 과거에 사로잡힌 채 대상도 불분명한 분노를 품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복수의 시간은 오히려 과거의 상처에 매몰되어 있던 자신의 모습과 속수무책으로 시간이 흘러 이미 모든 게 달라진 현재를 직시하게 한다. 

 

헬레나 입장에서도 이번 일탈이 슬프고 우스꽝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루드비크와의 실패한 만남에 큰 절망을 느껴 무작정 다량으로 삼킨 약은 알고 보니 전혀 치명적이지 않았고, 바라던 대로 자신을 구하러 마지막 순간에 루드비크가 나타났건만 너무도 부적절하고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그를 맞닥뜨린다. 그들의 인연은 허무한 블랙코미디처럼 끝나버리지만, 여전히 과거에 사로잡힌 삶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 둘은 커다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루드비크에게는 해결되지 않은 인생의 어두운 터널로, 헬레나에게는 자기 생에 가장 빛났던 그리운 순간으로, 과거는 어떤 방식으로든 둘에게 아주 큰 의미를 지닌 시기이자 떨쳐내지 못해 여전히 발목 잡혀 있는 굴레이기도 하다. 

 

 

2. 정치적인 사회와 개인의 삶

작가는 헬레나를 통해 흥미롭게도 한창 공산주의가 활발하게 상승세에 있을 때 열렬히 가담했던 사람들 중 일부, 어쩌면 꽤 많았을 다수의 사람을 그려낸다. 역사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정치적이었던 시기이다 보니 개개인의 일상조차도 짙은 정치색을 띨 수밖에 없었던 때. 많은 사람들은 단지 그 당시 모든 것은 정치적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사고를 하고 정치적인 행동을 했으며, 헬레나는 그 분위기 속에서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하게 된다. 헬레나와 제마네크는 지금의 대학생들이 모여서 동아리 활동을 하듯 그 시기 젊은이들답게 집회에 같이 참가하게 되었고, 뜨거운 분위기에 도취되어 같이 노래하고 구호를 부르며 소속감, 연대감을 느끼며 특별한 사적 감정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보수적이고 정치적인 사회 분위기는 젊은이들 사이의 자연스러운 사랑과 연애 같은 지극히 사적인 일들까지도 통제하게 된다. 학생회를 이끄는 영향력 있는 위치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제마네크는 주변 평판,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적인 평가에 통제당할 수밖에 없었고, 이미 헬레나에게 마음이 어느 정도 멀어진 상태였지만 분위기에 떠밀려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된다. 당시에는 제마네크 스스로도 그것이 옳은 일이라 믿었고, 이에 더해 헬레나는 자신들이 열렬히 지지하던 사상을 마치 영원한 사랑을 보장해 줄 것 같은 담보같이 여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사회가 변하면서 남편과 자신을 묶어주던 사회적인 대의나 의무가 흐려지고 변하자 둘 사이에 남아있는 연결고리도 느슨해졌다. 시간은 흐르고 젊음도, 또 자신들이 정답이라고 믿었던 그 모든 것도 결국 다 변했고, 사랑과 변심은 오롯이 사적인 영역에 남겨졌다. 

헬레나는 주인공 루드비크나 자신의 남편 제마네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물이다. 루드비크, 그리고 그가 복수하고 싶어 했던 제마네크는 인생의 방향이 서로 달라지기는 했어도 사회변혁이라는 거대한 사상 앞에서는 결이 비슷했다.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 같던 공산주의 움직임에 진심으로 참여했고, 자신들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다는 생각에 도취되어 그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헬레나에게는 그토록 열정적이었던 과거는 사회운동의 참여보다는 활기찼던 대학생활과 젊음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둘과 달리 적극적으로 그때를 그리워할 수 있고, 그 당시 좇던 사회적인 가치, 즉 당의 방향을 따르는 것을 여전히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주인공의 옛 고향 친구 야로슬라프는 앞서 언급한 이들과는 또 다른 인물상을 보여준다. 그의 인생 희비극은 좀 더 진지하고 우울한 모습이다. 정치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열렬한 선동가나 정치사상의 지지자들을 경계하는 쪽에 있었지만, 오로지 자신이 믿고 좋아하는 친구 루드비크의 말을 귀담아듣고 설득되어 자신이 해오던 음악을 통해 열심히 커리어를 일구어 나갔다.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는 체코의 근본을 되찾자는 정서가 대세였고, 이에 더해 당시 루드비크가 설명했던 것처럼, 민중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지향하는 공산주의 특성상 음악이 필요한 수많은 의식과 연회들이 갑자기 필요한 시기가 도래한다. 덕분에 대중의 사랑을 받아 가며 활발하게 음악을 할 수 있는 큰 행운과 행복을 누렸으며, 스스로 의도한 적은 없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풍족한 지원을 받는다. 그리고 그 시기 동안 민속 음악, 전통문화 대한 연구와 이해도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어느덧 세상은 변해 이제는 야로슬라프가 하는 음악은 대중의 관심, 정치적인 관심에서도 크게 멀어진다. 공동체를 우선시하던 문화는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위기로 전환되었고, 전통을 중요시하던 과거에 반발이라도 하듯 현대적인 것, 그리고 세계적인 것이 주류로 올라왔다. 민속 음악과 전통문화의 가치는 그대로이지만, 이제는 그 깊이와 훌륭함에 관심 가지는 이가 없다. 야로슬라프는 온 마음을 다해왔기에 지금의 상황이 마치 자신이 외면받는 것처럼 느껴져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 전통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요즘 세상이 서운하고, 갑자기 몰아치는 현대화의 바람도 마뜩잖게 느껴진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더욱 옛것에 집착하는 고집스러운 사람처럼 굴기도 한다. 결국 일 년에 한번 있는 중요한 전통행사인 ‘왕들의 기마행렬’이 있는 날 모든 갈등이 터져 나오고야 만다. 

행사의 주인공과 같은 왕의 역할을 아들이 하게 되었고, 이것은 자신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일이지만, 야로슬로프가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그 가치를 가족들은 이해하지도 못할뿐더러 구시대적인 행사에 굳이 참가하고 싶지도 않아 한다. 다만 야로슬라프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을 것이란 걸 알기에 차라리 그를 속이는 방법을 택한다. 야로슬로프가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 역시 슬픈 코미디 같다. 자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던 소년을 따라 행렬을 다니며 느꼈던 애틋한 감정을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우연히 마주친 노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진실을 알려주고, 화가 나 집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따지지만 되돌아오는 반응은 사과는커녕 자신에 대한 차가운 비난뿐이다. 

 

 

3. 적응과 도태 

사회적인 흐름에 휩쓸려 흘러간 개인들의 인생과 희비극과 같은 복수극 뒤에는 다양하게 공감하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세밀한 이야기들이 있다. 시대적, 사회적 배경에 상관없이 누구나 느낄 법하고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성을 통해, 독자는 이 작품 속 인물들의 안타까운 삶에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다. 그리고 단지 한 시기의 사회 비판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 자신의 삶과 현재 사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등장인물들 각각의 인생을 따라가다 보면, 그저 주어진 조건 속에서 나름의 인생을 살아온 것뿐인데 남겨진 것이 너무 없어 허탈한 모습들을 목격한다. 마치 갑작스럽게 초대받아 참석하게 된 파티가 끝난 후 쓸쓸한 풍경을 보는 것 같다. 누군가는 주인공이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주인공이 되려다 쫓겨났고, 어떤 이들은 파티에 관심이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 그날의 분위기 때문에 스타가 되었고, 누군가는 대부분의 참석자들처럼 적당히 술도 마시고 춤도 추고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기도 한다. 파티가 끝나고 불이 켜지니 화려한 조명도, 쿵쾅거리던 음악도, 흥겹던 분위기도 다 사라진, 아직 정리가 미처 끝나지 않아 어수선하고 덩그런 빈 건물만 남아있을 뿐이다. 사랑에 빠진 여인에게 상대방은 그저 그때 잠시 분위기에 취했을 뿐이라고 하고, 얼떨결에 스타가 된 이에게는 이제는 축제는 다 끝났다며 냉정하게 쳐다볼 뿐이다. 파티의 중심에 있을 뻔하다 부당하게 파티장 밖으로 쫓겨난 사내는 자기를 내쫓은 친구를 찾아다녔는데, 막상 마주친 그 친구는 이제 와 그 파티는 너무 과했고 우리들은 너무 촌스럽게 파티에 목숨을 걸었었다는 반성을 하며 당장이라도 기회만 되면 자기에게 정중하게 사과라도 할 태세다. 다들 답답하고 허탈한 마음을 어디에 하소연해야 할지 모르겠고, 내가 뭘 잘못했던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미 변해버린 사회를 인정하기 힘들어하는 야로슬로프와 헬레나의 모습은 지금의 우리도 흔히 느끼는 어려움을 떠올리게 한다. 순식간에 바뀌는 유행, 예전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해진 음악과 문화의 홍수 속에서 흥미보다는 길을 잃은 듯한 불편한 감정을 느끼곤 한다. 요즘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 요즘의 정서에 공감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면 요즘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들다, 맞추기 힘들다는 푸념도 종종 하며 나도 모르게 과거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예전엔 이랬지 정도의 추억 팔이에서 끝나지 않고 투정 부리듯 지금보다 그때가 더 좋았다고 더러 생각하기도 한다. 흐르는 시간 앞에 점점 초라 해지고, 바뀌어 가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해 젊은 시절 싫어해 마지않던 고리타분한 어른이 되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느끼는 불편함 등은 어느 시대를 살아도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것들이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괴리 때문에 느끼는 불편함은 단지 취향이나 유행의 문제를 넘어선다. 

내가 열정을 다 했던 모든 것이 사실은 오류투성이의 사회 운동이었다면, 희망을 품은 채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회적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면, 그리고 그게 단지 내 개인의 판단으로 잘못한 게 아니라 거대한 역사의 흐름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면, 이제 와 달라지고 있는 세상에 어떻게 적응해야 할까? 누군가는 사회 변화의 파도를 놓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시간에 따라 자신도 서서히 변해가며 맞춰 나가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급격한 변화에 재빠르게 대처하지 못하기도 한다. 젊은 시절 많은 열정을 쏟았던 그 시간들이 이제는 역사적인 과오라고 하며 폐기해야 할 것들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나 자신이 부정당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저 그 시기를 젊은이답게 조금은 어설프고 어리석은 모습으로, 때로는 과도한 열정으로 열심히 살았는데 이제는 지나간 젊음을 즐겁게 추억하는 것조차 부적절하게 느껴야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저 새로운 것에 적응하지 못해 도태되었다고 한다면 너무 단순하고 부당한 평가이지 않을까? 

 

 

4. 현재를 사는 법

작가는 주인공 루드비크가 우연히 찾은 고향에서 마주치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학창 시절 던졌던 돌이킬 수 없는 농담이 사실은 사건의 전부가 아님을 보여준다. 수년 만에 만난 지인 코스트카, 예상치 못하게 마주친 오래전 연인 루치에, 그리고 어린 시절 친구인 야로슬라브를 차례로 마주치고 만나면서 그들을 통해 오해로 가득 얽힌 인간관계를 보게 된다. 그들의 인생도 제각각 역설적이고 슬픈 농담 같은 일들로 가득한 데다, 서로가 서로에게 품고 있는 생각은 각자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루드비크는 한때 그토록 사랑했던 루치에의 과거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을, 루치에를 제대로 이해해 본 적이 없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리고 코스트카와 루드비크 둘은, 서로 각자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 다 정치적인 이유로 사회에서 밀려났기에 루드비크는 자신이 그런 것처럼, 코스트카도 당연히 자기와 비슷한 동질감을 느낄 것이며 자신이 도와준 것들에 대해 고마워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코스트카는 고마운 마음과는 별개로 자신과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 판이하게 다른 루드비크를 편치 않게 생각한다. 어릴 때 둘도 없던 친구 야로슬라프와 루드비크도 서로에게 각자 다르게 어긋난 이유로 실망하고 멀어지고 만다. 

이런 관계들을 통해 루드비크가 오랜 시간 자신에게만 집중하느라 놓친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사회의 선동 속에서 중요한 것들을 보지 못했다 생각하며 큰 깨달음을 얻은 듯 냉소적인 태도로 자신의 중심을 지켜내려 했지만, 그 때문에 결국 소중했던 사랑, 친구와의 우정을 놓쳐버리기도 했다. 젊은 시절의 실없는 농담은 커다란 불운이었지만 이후 자신의 처신은 불운 이상의 중대한 실수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작가는 종교적인 믿음을 핑계 삼아 많은 것을 받아들이는 코스트카와의 대비를 통해 루드비크가 스스로 저지른 삶의 과오들을 분명하게 더 드러낸다. 사실은 부당하다 생각했던 한순간의 사건이 자신의 삶을 뒤틀어 놓은 게 아니라, 그 이후의 삶 또한 거대한 농담의 일부였고, 그 속에는 스스로 자초한 일도 있었음을 알게 된다. 

루드비크와 다른 사람들 사이 얽힌 크고 작은 오해들은 사실 실제 일상 속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늘 존재하는 것들이다. 이 작품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누군가와의 만남 이후 흘러가는 인생, 이 모든 것이 사실 거대한 농담과 같음을 이야기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세상 어느 것도 내가 완전히 알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각자가 서로를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해도 우정이나 믿음, 애정이 생겨나고 친밀해진다는 것이 어쩌면 인간관계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 우연과 오해로 연결된 관계, 역사의 흐름, 그 속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발전시켜 가는지, 그리고 내가 맞닥뜨린 상황을 어떻게 다루고 처신하는지는 결국 많은 부분 개인의 몫일 수도 있겠다.

 

 

5. 인생의 거대한 농담 혹은 희망

작가는 후반부에 이르러 이 모든 것은 결국 다 사라지고 잊힌다는 것에 가장 큰 인생의 허무와 거대한 농담이 있음을 루드비크를 통해 이야기한다. 치열했던 삶, 억울함, 분노, 행복과 기쁨, 그리고 그것들을 극복해 내는 것조차도 언젠가는 다 무의미 해진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야기는 마치 루드비크의 모든 갈등을 해소하는 것처럼 흘러가지만, 결말은 그렇게 평온하게 마무리되지 않는다. 인생의 허무를 깨닫고 자신의 현재를 바라보게 된 루드비크가 소박한 모습을 다시 되찾은 고향 브루노에서 옛 친구와 다시 함께 연주하며 이제야 마음의 평화를 찾는 듯할 때 야로슬라프가 갑작스럽게 쓰러진다. 이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겠구나 싶은 마지막 연주 장면에서 찾아오는 커다란 인생의 배반. 정신을 잃은 친구를 보며 루드비크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구급차가 도착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영원히 거대한 농담 속에 갇힌 듯한 루드비크의 삶을 보여주는 결말은 지극히 극적이고 문학적이지만, 독자는 긴 여운과 함께 오랫동안 생각할 거리를 안게 된다. 친구를 되찾아 오랜만에 즐거움을 느낀 야로슬라프와 루드비크 모두에게 다시 한번 행복을 허락하지 않는 삶은 비극이지만, 루드비크가 생각하던 대로 야로슬라프가 건강을 다시 되찾게 되면 이후의 삶은 과거에 사로잡혔던 이때까지와는 다르게 살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글을 닫으며

올해가 가기 전에 숙제를 다 하겠다는 마음으로 부랴부랴 미뤄둔 감상문을 작성했습니다. 

빠르게 읽은 책이지만 좋았던 부분이 너무 많아 생각을 정리하기 까지는 오래 걸렸어요. 인간 심리에 대한 작가의 깊은 통찰력이 드러나는 다양한 묘사들이 인상적이었지만 작품의 큰 줄기가 아닌 세부적인 것들만 세세하게 짚어내다 말 것 같아 그 부분에 대한 감상은 생략했습니다. 대체적으로 좋은 수식어들로 설명하곤 하는 젊음이라는 시기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인상적이었어요. 

제 감상문이 책을 선택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무엇보다 재미가 있는 위트 가득한 작품이에요. 

 

젊음이란 참혹한 것이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희랍 비극 배우의 장화를 신고 다양한 무대 의상 차림으로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면서 광적으로 신봉하는 대사들을 외워서 읊으며 누비고 다니는 그런 무대다. 역사 또한, 미숙한 이들에게 너무도 자주 놀이터가 되어 주는 이 역사 또한 끔찍한 것이다. 네로라는 풋내기, 나폴레옹이라는 애송이, 흥분하여 날뛰는 수많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흉내 내는 열정이나 간단하게 맡아 버린 역할들은 처참하도록 실제적인 현실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밀란 쿤데라, 농담 - 민음사 p.152
 
 

 

 

메일을 꼬박꼬박 읽어주시는 구독자 분들께 늘 큰 고마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년에도 비록 많이 느리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작성해보겠습니다.

 

새로운 한 해에는 좋은 일 많이 생기기를 진심으로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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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한결같은 빛을 발하는 고전 문학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어요. 

누구나 들어봤음직한 작가의 작품, 너무 유명해서  마치 읽은 것 같지만 사실 들춰본 적도 없는 책, 어릴 때 아동용 요약본만 읽었던 책들, 그런 고전들 위주로 읽고 소개합니다.  

 

한달에 두세편의 작품을 소개하며, 한 작품당 두편의 뉴스레터가 발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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