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소개 25-2 / 빅 슬립, 레이먼드 챈들러

매력적인 탐정, 말로 이야기 / 독후감

2023.04.30 | 조회 3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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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느의 고전 읽기

변치 않는 가치를 지닌 고전 문학 이야기

메일 수신 시 '웹에서 보기'로 읽으시면 포맷이 좀 더 눈에 잘 들어와요.

 

추리소설은 제가 자주 읽는 분야는 아니어서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작가 이름도 빅 슬립이라는 책 제목도 모두 낯설었습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이야기나 셜록 홈스가 등장하는, 그야말로 세상에 모르는 사람 없는 작품들만 좀 아는 수준이거든요.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의외로 낯설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새로우면서도 익숙한 이 책의 매력에 대해 적어봅니다.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와 빅 슬립에 대한 간략 소개는↓

 

1. 캐릭터의 힘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1930년대의 미국 분위기는 이미 여러 영화에서 본 적 있고, 주인공 말로 탐정처럼 중절모와 양복 차림의 형사가 등장하는 드라마들을 봐오며 자란 데다, 험한 일을 하는 배짱 두둑한 남자들이 서로 거친 입담으로 기선을 제압하는 장면이나 어둠의 세계에서 일하는 갱들의 등장은 여기저기서 봐온 누아르 영화들을 쉽게 생각나게 한다. 그렇다, 이 작품은 우리가 영상을 통해 많이 접해온 현대 형사물의 원형이다. 그래서 그 사실만으로도 이 소설은 읽어볼 만하고 그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가 설명되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의 독자인 내가 이 책에서 느끼는 가장 큰 매력은, 아마도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의 독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짐작하는데, 장르적 특성보다는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탐정 ‘말로’라는 캐릭터이다.

말로는 아서 코난 도일이 창조한, 우아하고 지적이며 뛰어난 분석력으로 한방에 마지막에 문제를 해결하는 셜록 홈스와는 아주 다르다. 시대 불문, 작가 불문, 책 속에 등장하는 모든 훌륭한 탐정들과 마찬가지로 말로 역시 명철한 사고와 곧은 심지를 지니고 있지만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앞으로는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하며 머릿속으로는 묘안을 생각한다거나 범인과의 대화 속에서 허점을 찾아내 허를 찌르는 것 등은 그의 방식이 아니다. 말투부터 거칠고 물불 가리지 않고 몸을 쓰는 데다 술 담배도 어마하게 하는, 요즘 말로 ‘상남자’에 가깝다.

실생활에서 가끔씩 마주치게 되는 기가 센 사람들이 있다. 직설적인 말로 나한테 상처를 줄 것만 같고, 어쩐지 저 옆에 있으면 싸움이나 분란 등 불편한 분위기에 휘말릴 것 같아 경계하게 되지만 그런 사람이 알고 보니 상황에 맞게 말도 가려 하고, 사리분별도 명확해 경우 바르다는 걸 알게 되면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말로 형사 역시 그런 경우이다. 첫 등장부터 드러나는 그 어느 것도 개의치 않는다는 식의 거칠 것 없는 태도는 이 인물에 대한 호기심과 경계심을 동시에 끌어내고 냉소적인 태도에서 비롯되는 위트로 독자의 방어적인 마음을 슬그머니 해제시킨다. 그리고 그의 행동을 쫓아가다 보면 위험천만한 일에 거침없이 뛰어들 수 있는 건 상황을 만만하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맡은 일을 집요하게 해결하려는 프로정신 때문이고, 냉소적인 태도는 넘지 말아야 할 선과 자신의 신념을 반드시 지키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되면서 본업에 충실한 모습에서 큰 매력을 느끼게 된다.

의뢰받은 일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온갖 불법적인 일을 하는 이들, 심지어는 갱단을 상대해야 한다. 목숨을 걸고 몸싸움을 하는 경우도 많고 복잡한 상황에 얽힌 경찰들과의 기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아야 한다. 하루에 25달러 수당을 받는데, 지금 물가로 환산해 보면 몇십만 원의 비용이라고 하니 며칠 동안 출퇴근도 없이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일을 하는 대가로는 결코 충분치 않은 금액이다. 하지만 그는 정직하게 일하고, 자신을 회유하려는 이들의 말은 단칼에 잘라버리며 어떤 상황에서도 의뢰인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의뢰인을 단지 돈을 주는 고용주로 치부하지 않고 인간적으로 그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며 배려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며 딱딱하고 거친 외양 뒤에 숨겨진 따뜻하고 속 깊은 면도 발견하게 된다.

1930년대 중반까지 미국은 대공황으로 다들 각자도생을 외치며 갱들이 활보하던 꽤나 무법천지였던듯싶다.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우직하게 일하는 말로의 이야기는 아마도 재미 이상의 큰 매력을 느끼게 했을 듯하다. 일상 속에서 흙탕물을 뒤집어써도 묵묵히 갈 길을 가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은 재미로 볼 법한 탐정 소설 속에서 즐거움 이상의 어떤 것을 찾아냈을 것이다. 불황, 치솟는 물가, 어수선한 국제/국내 정세… 고단한 시기가 다시 찾아온 요즘이 어쩌면 이 소설을 읽어보기에 더없이 적당한 때 일지도 모르겠다. 잠시 현실을 떠나 가벼운 마음으로 말로를 지켜보며 한 박자 쉬고 나면, 쉽지 않은 현실을 헤쳐 나갈 에너지를 얻게 될 수도 있겠다.

1946년 개봉한, 영화 <빅 슬립>의 장면
1946년 개봉한, 영화 <빅 슬립>의 장면

 

2. 불편한 유산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범죄물의 본질인 자극성이다. 당연하게도 현실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함부로 지껄이는 말투들, 마약, 살인, 폭력들. 그리고 그 속에서, 지금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불편한 장면들도 몇몇 있다. 범죄에 연루된 이들 중에 동성애자나 여성이 등장하고 그 존재를 비하하는 단어나 대사가 꽤 나온다. 이 책이 출간된 시기에는 큰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여졌겠지만, 현대의 독자들은 이런 장면들이 주는 불편함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읽을 수 있어야겠다.

 

 

"겨우 그 돈을 벌겠다고 카운티 내 경찰 태반의 미움을 사도 좋단 말인가?"
"저도 싫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사건을 맡았는걸요. 먹고살려면 팔 수 있는 건 팔아야죠. 하늘이 내려주신 보잘것없는 배짱과 지능, 이래저래 들볶이면서도 의뢰인을 보호하겠다는 마음가짐 말입니다."

레이먼드 챈들러, 빅 슬립 (문학동네,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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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한결같은 빛을 발하는 고전 문학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어요. 

누구나 들어봤음직한 작가의 작품, 너무 유명해서  마치 읽은 것 같지만 사실 들춰본 적도 없는 책, 어릴 때 아동용 요약본만 읽었던 책들, 그런 고전들 위주로 읽고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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