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 로드 짐, 조지프 콘래드

나를 버리면서까지 찾고 싶은 나 / 독후감

2022.08.17 | 조회 7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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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느의 고전 읽기

변치 않는 가치를 지닌 고전 문학 이야기

메일 수신 시 '웹에서 보기'로 읽으시면 포맷이 좀 더 눈에 잘 들어와요.

 

오랜 기간 선원으로 일해본 작가가 아니었다면 결코 쓸 수 없었을 것 같은 생생한 항해 이야기는 독자를 미지의 어느 먼 바닷가로 데려갑니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사건의 경위, 등장인물들의 행동이나 심리를 주로 묘사하지만, 이야기 내내 지속되는 긴장감 가득한 분위기와 다채로운 인물들은 그 자체로 책 읽는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저마다의 풍경을 그려보게 하죠. 일렁이는 바다의 짠 내음, 작열하는 태양, 또는 숲이 우거진 어느 미지의 지방, 그곳의 축축한 공기가 느껴지는 듯했어요. 

그렇게 이국적이고 낯설며 거칠고 흥미진진한 모험담 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저 깊숙한 곳 자리 잡은 인간과 나 자신, 그리고 삶에 대한 질문들을 만나게 됩니다. 가혹하리만치 닥쳐오는 불운의 순간들 속에서 자신의 존엄과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 짐에게 안타까움과 아쉬움, 동질감과 이질감을 복합적으로 느끼기도 하고, 짐의 행동을 어디까지 공감할 수 있을지, 또는 어떤 부분을 비판할 수 있을지 갈피를 잡지 못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존엄과 명예에 모든 것을 거는 짐에 대해 책에서는 ’로맨틱’하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할지,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닥쳤을 때 그 이후에는 어떻게 살아가는 게 맞는지에 대한 질문이 많아지던 작품이었습니다.

작가 조지프 콘래드와 로드 짐에 대한 간략 소개는↓

 

 

 

1. ‘우리들 중의 한 사람’, 짐

좋은 환경에서 자라 똑똑하고 올곧은 성품에 고지식한 면도 있는 짐. 안정적인 생활보다는 미지의 운명을 향해 나아가는 선원의 생활을 소망했고 집에서도 그런 그의 열망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줍니다. 얼마간의 교육을 받고 순조롭게 젊은 나이에 좋은 배의 일등 항해사가 되지만, 큰 어려움 없이 자신이 원하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그에게 마치 누구에게나 할당된 고난과 불행이 있다는 듯 순식간에 거대한 불운이 닥쳐오고 맙니다. 

거센 풍랑을 만난 항해에서 큰 부상을 당해 결국 어느 동방에 하선해 병원 신세를 지며 회복기를 보낸 뒤,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한 큰 여객선 ‘파트나 호’에 일등 항해사로 상선합니다. 그리고 거칠고 비열하며 천박한 선장과 직원들이 함께 하는 그 항해가 짐에게는 운명의 시험대가 되고 말았어요. 평화롭기만 하던 한밤중, 별안간 배가 좌초될 위기에 처하고 짐은 무언가에 떠밀리듯 침몰 직전의 배에서 뛰어내립니다. 선장과 몇몇 선원들이 급하게 띄운 구명보트에 마지막으로 몸을 실은 짐. 그들은 그렇게 목숨을 구했으며, 재판에 회부되고, 결국 승객의 안전을 살펴야 하는 중요한 의무를 져버린 죄로 선원 자격증을 박탈당합니다. 

당시 사정을 좀 더 들여다보면 짐에게는 억울하고 공평치 못한 운명이 닥쳤다는 생각이 들어요. 배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된 때부터 자신들의 안위만 생각하던 무책임한 선장과 몇몇 선원들, 그리고 가능한 한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 애쓰던 짐, 각자 전혀 다른 이유로 침몰하고 있는 배 위에서 애를 쓰지만 의도나 과정은 무의미하게도 그들은 같은 구조 보트에 탑승하게 되고, 그들 모두는 승객들을 버린 채 여객선에서 탈출했다는 동일한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구명보트 위에서 알리바이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던 선장과 다른 선원들, 그들을 경멸해 마지않던 짐은 역시나 그 속내의 큰 간극과는 무관하게 함께 재판에 소환되고, 여기에 더해 바로 침몰했어야 마땅한 상태였던 여객선은 기적적으로 좌초되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선원 자격증의 박탈이라는 이미 결론이 정해진 재판이 열리지만, 비열한 선장과 다른 선원들은 모두 도망가고 아무도 출석하지 않아요. 짐만이 자신의 죗값을 치르겠다며 빠짐없이 계속 출석해 세간의 관심과 사람들의 비난 어린 시선, 질문 그리고 판결 선고를 다 감내합니다. 

겨우 이십 대의 젊은 선원이 제대로 역경에 대처하는 법을 배울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묵묵히 모든 것을 감수하고 자신의 운명에 좌절감을 느끼는 모습에 몇몇 사람들은 연민을 느낍니다. 불명예스러운 모습으로는 가족에게 돌아갈 수 없다고 하고, 선원으로도 더 이상 일할 수도 없는 짐은 당장 생계조차 막막한 상황인데다가, 자기 자신에게 기대가 컸고 확신이 있었던 만큼 크게 상처받은 자존심을 끌어 안은 채 그저 인생이 끝난 것처럼 멍하니 있을 뿐이죠.

 

그는 노한 어조로 말하더군. “그래. 녀석은 그 형편없는 선장이 도망치는 걸 보지도 못했나? 무슨 꼴을 더 보겠다는 거야. 그를 구제할 길은 전혀 없어. 이제 끝장이라니까.” 우리는 말없이 몇 걸음을 더 걸었어. “왜 그 모든 모욕을 당하고 있는 거지?”

조지프 콘래드, 로드 짐 (민음사, 1권, p.105)

 

이 책의 화자인 말로는 재판 때 짐을 알게 되고, 앞길이 막막한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밉니다. 이미 결과도 정해진 데다 선장을 비롯 정작 재판장에 반드시 나와있어야 할 사람들이 없는 상황에 얼굴 화끈거리고 수치스러운 재판 과정을 다 겪지 않고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제안하지만, 짐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하죠. 주인공 짐에게 저녁을 대접하며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재판 이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적극적으로 도와준 말로는 자신의 선의의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를, 짐은 그저 ‘우리들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에서 그려내는 짐은 여러모로 흥미롭습니다. 독자들로 하여금 짐을 응원하고 싶게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데, 결코 짐이 완전무결하거나 멋지고 비범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누구나처럼 부족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때로는 짐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조금 헷갈리기도 합니다. 

이야기 초반 마치 복선처럼 등장하는 학생 때의 일화는 짐이 어떤 사람인지를 꽤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우연히 바다에서 좌초된 배의 선원을 발견한 선생님의 급한 호출에 몇몇 학생은 곧장 바다로 뛰어들어 구조 작업에 바로 투입되지만, 짐은 그렇지 못했어요. 너무 당황했고 상황 파악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구조선에는 그가 탈 자리는 없었죠. 구조 작업 후 돌아온 학생 하나가 다른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모험담처럼 경험을 이야기할 때 짐은 멀찍이 떨어져서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작은 해프닝이고 저 아이가 저렇게 떠드는 것은 허세일 뿐이라고 위안하며 언제든 더 큰 운명의 부름이 닥치면 자신은 용기 있게 나설 것임을 스스로 확신합니다. 

아마도 어린 짐은 아직은 자기 자신의 모습과, 자기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람을 구분 짓지 못했던 것일 테죠. 짐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지 못했고, 세상의 많은 일은 내가 직접 겪어보기 전까지는 장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아직은 알지 못했어요. 나의 성품과 의지가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 또한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런 짐의 모습은 그리 낯설지가 않아 쉽게 그의 모습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이 비슷한 과정을 지난 적이 있을 거예요. 이 작품의 주인공 짐은 이렇게 전혀 영웅적이지 않습니다. 비범하지 않고, 헛점도 많지만 상식적인 사고를 하며 반듯하며 옳은 신념을 가진, 우리가 살면서 접할 수 있는 ‘평범하지만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 주변에는 사실 뛰어나게 비범한 사람들 보다는 오히려 이런 이들이 더 많지 않던가요? 

파트나 호 사건으로 재판이 진행될 때 등장하는 중년 나이의 성공한 선장, 브라이얼은 불운의 덫에 걸린 짐을 보며 자신이 이때까지 얼마나 많은 행운 속에서 지냈는지를 깨닫는 듯합니다. 말로의 평가대로, 짐은 ‘우리들 중 한 사람’이었어요. 이는 다른 사람들 역시 짐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비슷한 결과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독자들은 누구에게나 삶의 의도하지 않은 불운, 내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 닥칠 수 있음을 상기하게 됩니다. 만약 내가 20대 초반의 경험 많지 않은 일등 항해사였다면, 과연 얼마나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좌초될 뻔한 배가 기적적으로 무사히 다른 배의 도움을 받아 인양이 되었고, 수백 명의 사람들은 다들 무사했으며, 배 위에는 죽은 선원이 하나 있고, 선장을 비롯한 수석 항해사들은 도망간, 이 기묘하기만 한 사건은 바다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떠들썩하게 소문이 나게 됩니다. 그 사건의 중심에 있던 짐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얼마나 갖은 추측을 했을까요. 하지만 재판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말로는 짐이 특별히 더 비겁하거나 비열한 사람도 아니었고, 이질적인 세계에서 온 사람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자신의 젊은 시절을 상기시키는 그 나이의 열망과 절망을 품고 있는 ‘평범한’ 젊은이라고 생각하죠. 심지어 짐의 우직한 모습에 신뢰감을 느끼기까지 해요. 중년의 나이에 이미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해 본 말로는 자신의 직감을 믿고 짐을 도와주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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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로맨틱한 사람, 짐

운명의 시험대와 같은 파트나호 사고가 닥쳤을 때 이제는 더 이상 어린 학생이 아닌 짐은, 당시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합니다. 자기 자신이 ‘태세’가 되어있지 않았었음을 깨달았어요. 이는 본래 의도나 성품과는 좀 다른 문제이죠. 운이 좋은 경우에는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지나가지만 행운이 따라주지 않을 때는 그 작은 틈새를 놓치지 않고 나쁜 일이 벌어지고야 맙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불가항력의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느냐보다는, 이미 벌어진 사건에서 내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다면, 그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더 집중합니다. 

그게 모두 마음의 태세에 달려 있었습니다. 저는 태세가 되어 있지 않았어요. 그때는 아니었다고요. 저는 제 자신을 변명하고 싶지 않지만 설명은 해야겠군요. 누군가가 이해해 주었으면 합니다. 누군가 적어도 한 사람이 말입니다.

조지프 콘래드, 로드 짐 (민음사, 1권, p.127)

일은 벌어졌고 모두가 예상한 대로 재판은 끝났어요. 아직 20대의 젊은이인 그는 수치스러움과 좌절감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꼿꼿하고 고지식한 성격대로 어느 누구에게도 조언을 구하지도, 도움을 청하지도 않고 그저 막막한 마음으로 창밖만 내다보는 그를 말로가 적극적으로 도와 선박용품점에 취직했고, 말로가 생각한 것처럼 그는 신뢰 가고 능력 있는 만능 직원으로 종횡무진 활약합니다. 그렇게 이제 새로운 삶으로 진입해 잘 살아가고 있는 듯했으나 어쩌다 파트나호 사건과 조금만 연결이 되면, 즉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본다거나, 케케묵은 당시 사건에 대해 비난 어린 말을 하는 걸 우연히라도 듣게 되면 갑자기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자신을 신뢰했던 고용주와 손님들 모두를 등지고 돌연 자취를 감춥니다. 그에게 그 사건은, 오래전 하나의 나쁜 경험으로 여기며 함께 품고 살아갈 수 있는, 시간에 따라 잊힐만한 것이 아니었고 영원히 자신을 따라다니는 낙인에 가까운 트라우마였던 듯해요. 그런 식으로 어찌나 도망을 쳐서 다녔던지 이제는 모든 정박지를 거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어요. 재판에 끝까지 참석했고 선원 자격을 박탈당하는 모든 과정을 오롯이 감내했지만 그걸로는 돌이킬 수 없는 명예의 추락에 대해 사무치도록 괴로워합니다. 

이쯤에서 독자는 복잡한 생각이 들기 시작해요. 짐에게 파트나호 사건이 얼마나 큰 상처인지를 알아가면서도 한편 과거의 일이 이렇게까지 인생을 흔들리도록 놔두는 게 맞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도저히 스스로가 용서되지 않는 어떤 사건들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가 없겠죠. 지금의 나는 원래의 나를 감춘 거짓인 것만 같고,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불명예스러운 과거가 드러날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마음이 쓰라린 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취업할 수 있는 해안이 없을 정도로 도망 다니는 모습을 보면, 너무 오랜 시간 자기 연민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조금 냉정하게 보자면 자기 본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젊음의 어리석음에 영원히 머물러 있는 것 아닐까, 어쩌면 자기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하지만 아마도 그런 질문이 오히려 짐을 더 도망가도록 하는 것이겠죠. 결코 그때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 더 나은 사람임을 입증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더 크기 때문에 과거의 사건을 마음속에 묻어두고 살아갈 수 없는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이 많아질 때, 말로에게 사정 이야기를 듣고 도움의 손길을 주는 스타인은 짐을 ‘로맨틱’한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현실 속에서 또 다른 가치나 안정을 찾기보다는 해결되지 않은 그 어떤 것을 위해 끊임없이 방황하는 사람, 누군가에게는 부차적인 것일 수도 있는 ‘명예’와 ‘존엄’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 우리말로 대체하자면 감상적이고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낭만적인 사람이란 뜻일 텐데, 이런 관점으로 짐을 바라보면 그의 행동이 좀 더 이해가 갑니다.

"그 사람은 로맨틱하지, 로맨틱해." 그는 거듭 말했어. "그런데 그 점이 아주 고약하단 말이야. 고약하지...... 아주 좋을 수도 있고".

조지프 콘래드, 로드 짐 (민음사, 1권,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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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낭만적인 사람의 그렇지 못한 결말 

말로는 스타인의 도움을 받아 더 이상 취직할 수 있는 정박지가 없을 정도로 도망 다니던 짐을 결국 세상 깊은 곳으로 숨어들 수 있게 해줍니다. 작은 부족들이 끊임없이 분란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외딴 지역,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명조차 모르는 곳에 스타인의 무역 일을 담당하는 명목으로 짐을 파견하듯 보냅니다. 이제까지 살아왔던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모습을 감출 수 있는 절호의 그리고 유일한 기회였어요. 도착과 함께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위험에 처했지만 용케 생존했고 스타인과 관련 있는 부족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게 도와 절대적인 지지와 신임을 얻어 실질적인 통치자의 자리에 올라 ‘로드 짐’이라는 뜻의 '투안 짐'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됩니다. 정글처럼 보이던 그곳은 그들 나름의 법칙이 존재하는 곳이었어요. 짐은 그토록 원하던 명예와 신뢰를 얻어 완전히 정착했고 사랑하는 여인까지 만나 온전한 삶을 꾸려 나갑니다. 이제는 더 이상 과거와 연결될 일도 없으며 그 섬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 것 같았죠. 하지만 짐은 여전히 자신의 과거를 떨쳐내지 못했고 결국 그 점이 자신의 아킬레스건이 되어 비극적인 결말에 다다릅니다.

 

만약 선장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용감하고, 누가 참되고, 누가 공정하고, 누가 믿고 목숨을 맡길 만한 사람이냐고 물으신다면 그들은 '투안 짐'이라고 대답할 겁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진짜 진실만을 영영 이해할 수 없을 테죠......"

조지프 콘래드, 로드 짐 (민음사, 2권, p.133)

 

어느 날 그 섬에 갑작스럽게 침입한 해적 브라운, 이를 기회 삼아 짐을 제거하려는 사람들의 음모는 거의 불발될 뻔했으나 짐의 취약점을 알아본 악인 브라운에게 완전히 정신적으로 흔들려 오판을 내리고 맙니다. 그 대가로 자신의 가장 소중한 친구를 잃고, 일이 잘못될 경우 자기가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겠다며 사람들을 설득했던 짐은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놓게 됩니다.

그의 가까운 사람들, 즉 그의 아내와 충성스러운 하인은 도저히 그의 행동을 납득할 수가 없었어요. 사랑하는 사람도, 그리고 자신을 믿고 따르던 사람의 신뢰도 다 부차적이었던 것인지, 왜 다시 한번 사태를 회복시키고 입지를 굳힐 방법을 강구하지 않은 것인지 그들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고 미련 없이 자신들을 떠나버린 짐에게 분노에 가까운 실망을 느끼게 됩니다. 

짐의 모든 삶을 다 지켜본 독자는 마지막 짐의 행동이 놀랍지는 않습니다. 다만 안타깝고 아쉬울 뿐이죠. 그의 낭만적인 사고방식은 그가 자기 자신의 존엄을 포기하지 않고 살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판단력을 흐리게 했고, 청년 시절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결국 도망치게 만들었어요. 

원래 짐의 성향을 아는 말로와 스타인은 그저 지인들에게 짐을 용서해달라는 말 밖에는 해줄 말이 없고, 독자들 또한 짐이라는 사람을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게 되지만, 여전히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연 짐의 선택이 옳은 것인지, 그토록 집요하게 추구하고자 한 명예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저버릴 정도로 중요한 것인지, 그런 결정을 결국 내리고야 만 짐에게 이때까지 정성스럽게 가꿔온 인생은 어떤 의미였을지 쉬이 답을 찾을 수 없는 생각을 한참 하게 됩니다. 그에게 있어 용기란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굴레와 짐 속에서 우직하게 나아가는 것 또한 옳은 것일 수도 있거늘 그에게는 왜 그게 또 다른 선택지가 아니었을까요. 

인생을 멋지게 살아가기에는 항상 좀 부족하고 뜻하는 바에 미치지 못해 아쉽고 속상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수를 파악하고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현실과 타협하곤 합니다. 대부분은 그렇게 우리 방식대로의 용기로 과오와 상처투성이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지만 끝까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목숨을 걸 정도의 존엄을 추구하는 이가 있다면 그 또한 비극적이어도 분명 최선을 다한 삶이겠죠. 과연 짐은 인생에서 한 번은 자기가 목표한 사람으로 살았다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영원히 도달하지 못해 좌절했을까요. 짐의 노력이 그 자신에게만큼은 의미가 있었기를 바라 봅니다. 

 
 

 

에필로그

낭만적인 짐, 그를 조건 없이 도와주고 싶어 하는 말로, 성공한 선장이지만 짐을 보며 무력감을 느끼던 브라이얼 선장 등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심리에 대해 때로는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 작품은 특히나 독서모임에서 여럿이 함께 읽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읽는 동안 무수히 많은 질문과 생각이 쌓였습니다.

구절구절 머무르게 되는 문장도 수없이 많았는데, 파트나 호를 인양했던 선장이 수년 뒤 말로에게 이야기하는 ‘두려움’에 대한 부분을 옮겨둡니다. 

 

하지만 선원들 각자는, 각자가 말입니다. 각자가 만약에 정직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고백할 겁니다. 우리 중의 가장 훌륭한 사람도 결국 어떤 지점에 이르게 되고 거기 이르면 모든 것을 놓아버리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그 진실과 더불어 살아야지요. 아시겠어요? 여러 상황이 이루는 복합적인 환경에 처하게 되면 두려움이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어요. 지긋지긋한 무서움 말입니다. 이 진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어쨌든 두려움은 있습니다. (…) 인간은 겁쟁이로 태어나죠. 그래서 어렵다고요. 정말! 그렇지만 않다면 아주 쉬울 텐데.

조지프 콘래드, 로드 짐 (민음사, 1권,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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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한결같은 빛을 발하는 고전 문학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어요. 

누구나 들어봤음직한 작가의 작품, 너무 유명해서  마치 읽은 것 같지만 사실 들춰본 적도 없는 책, 어릴 때 아동용 요약본만 읽었던 책들, 그런 고전들 위주로 읽고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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