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짐과 세움,
실망과 희망,
무지와 이해.
이 모든 것들의 반복.
아픔과 슬픔,
기쁨과 환희.
나아감과 돌아섬,
성장과 쇠퇴.
우리의 삶을 말로 정리하자면
이 밖에 무엇이 더 있을지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한 세대에 획을 긋겠다 다짐한 어떤 사람은
평생을 바쳐 그 모든 일에 매진했지만
이루지 못해 묘비에 아쉬움 가득한
짤막한 한 만디로 삶을 정리하기도 했고
어떤 이는 한 세대에 획을 그어
그다음 세대에도 칭송을 받기도 합니다.
다만, 그는 이제 과거의 영광이 되어
미화되기도 하며, 절하되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무슨 소용과 의미가 있나
싶어지는 순간이 되기도 합니다.
삶은 이토록 입체적입니다.
사랑과 미움을 동반하고,
실패와 성공을 동반하며,
아픔과 극복을 동반합니다.
상반된 두 가지를 분리할 수 없어
불가분의 관계로 뒤엉킨 채
평생을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은
때때로 자유롭고 때때로 구속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이 지나게 되었을 때,
각자의 삶은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형태와 각자의 모습으로,
점차, 서서히 사라지게 됩니다.
어쩌면 꿈과 같은 것일까요?
우리는 어쩌면 꿈결을 부유하는
단순한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요?
우주 속의 작은 먼지와도 같은 지구와
그 지구 속 개미보다 작은 우리가
매일매일을 힘주어 살아가는 이 모든 일에는
어떤 의미와 유익이 있는 것일까요?
-
모든 것이 다 지나고 나면
그때 평가가 남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세상이 평가하고,
유명한 사람은 대중이 평가하고,
평범한 사람은 주변인들이 평가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결국
한 존재가 사라지고 나서야
진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가로,
우리는 몇 년, 혹은 몇십 년.
아니 어쩌면 며칠.
나라는 사람은 사라지고,
존재였던 나라는 존재가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정작 본인은 들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를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어떤 존재였는지 말입니다.
오직 죽음만이 우리에게
그것을 드러내고 알리기 때문입니다.
무거운 이야기임에 틀림없습니다만,
이런 이야기 앞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평가를 잘 받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과
죽으면 소용이 없기에 도리어 신경 쓰지 않으려는 사람.
-
삶은 이토록 역설적이고 입체적입니다.
삶은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것의 뒤엉킴이고
죽음으로서 온전히 평가받는다니요.
이렇게 생각하면 삶이라는 것이 참 덧없고
나라는 존재의 의미가 그다지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삶에 데미지를 주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것이 아마 사실에 가깝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 앞에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이런 이야기와 상관없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한 것들은
대부분 사실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증명되었고 검증된 것에 가까운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아직 말하지 않은 사실 또 다른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순간 역시
우리는 존재하고 있으며
지금 이 순간이라는 개념은 현존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물리적으로 지금 이 순간은 이미 과거이기에
용어적으로 참이라 말할 수는 없겠으나,
통상적으로 우리는 그 과거를 지금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 했고, 실재합니다.
머나먼 우주는 실재합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는 순간 역시 실제입니다.
머나먼 격차, 감히 마주할 수 없는 크기.
초월적 차원인 우주와 지금은
존재적 관점에서, 실재한다는 관점에서
규모나 크기와 상관없이 같습니다.
죽음은 실재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실재합니다.
이 모든 것은 실재합니다.
다만 죽음 이후에 존재는 실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사라져도 우주는 실재하나
나에게 우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기억 속에 저장되어
아주 가끔 꺼내보는 이야기쯤이 됩니다.
사라진 이후에도 꺼내지는 이야기라면
참 매혹적인 것이었을 테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우주의 차원과 크기가 어떠한지는
나의 죽음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나의 존재의 사라짐은 그 모든 것을
이해할 수도, 인식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 우주는 나보다 더 크며,
나의 존재적 차원보다 더 다층적 차원의 존재이지만
나의 죽음은 그런 우주를 지워버리게 됩니다.
우주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내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
저는 인간이 가장 우등하며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사상에는
그다지 큰 공감을 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저의 공감이나 감정과 무관하게
한 개인은 각자의 우주를 가지고 있으며
개인의 존재가 사라짐과 함께 그 우주도 사라진다는 것.
실제 우주는 건재하겠으나,
그가 이해한, 그가 발견한,
그의 마음속에 있던 우주는
오직 그 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네, 우월함과 거대함.
차원적 높낮이와 격차는
어쩌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
결국 의미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의미는 부여되는 것이며,
그것을 부여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나입니다.
여기에는 무수히 많은 오류가 있습니다.
거짓도 섞여있고, 진리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사실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아닌, 한 개인에게는 말입니다.
세계를 초월한 우주는
많은 연구와 노력으로
과거보다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우주의 아주 일부분,
아주아주 작은 부분만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작은 발견과 이해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우리가 계속 우주를 바라보게 하는,
우주를 연구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누군가에게 이 모든 일은 의미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이 모든 일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하는 모두에게는
이 일이 소중하며 의미로 가득합니다.
-
삶은 모순됩니다.
인간에게 진리란 없고 오류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통해 살아갑니다.
의미는 부여되고, 수정되고
때로는 폐기되고, 재생산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으며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능력은 생각보다 거대합니다.
우리가 눈을 뜨는 것과 걷는 것,
출근을 하는 것과 일을 하는 것.
취미를 즐기는 것과 잠에 드는 것.
이 모든 것들의 의미를 우리는 부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무수히 많은 지금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누군가에게는 꿈을 향한 여정이 소중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겐 그것보다 소박하고 안정적인 삶이 소중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틀렸느냐 하는 문제는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는 이미 각자가 가지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 의미를 공유하고 나누며
함께 다양한 의미들을 음미하고 즐길 수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사람의 삶이란 정말,
무의미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무력하고 나약하니까요.
그리고 때로는 멍청해 아픈 역사를 반복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객체에 의미가 부여될 때,
우리는 그것을 예술이라 부릅니다.
예술로서 살아갈지,
객체로서 살아갈지 선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몫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순간에 대한 나의 선택입니다.
오늘 당신은 어떤 존재인가요?
오늘 당신에게 주어진 하루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당신의 생각이 옳습니다.
당신의 것으로 살아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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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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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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