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박사 학위의 의미에 대한 생각을 짧게 써보았습니다. 글에서는 AI 분야 이야기를 주로 다루지만, 글의 요지는 이공계 분야 전반, 혹은 그보다 더 넓은 범주에도 적용 가능한 이야기일 것 같습니다.
2주 전, NeurIPS 라는 권위있는 인공지능 분야 학회가 있었고, 수많은 인공지능 분야 연구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제 눈길을 사로잡은 건 어떤 연구 결과가 아니라, NeurIPS 에 다녀온 한 교수님께서 남기신 블로그였습니다. 뉴욕 대학교 조경현 교수님의 "NeurIPS 2024 에서 불안과 불만이 느껴졌다" 는 글입니다. 안 그래도 제가 실리콘 밸리에서 최근 몇 년 새 부쩍 느끼고 있던 감상이, 조 교수님의 NeurIPS 에서의 감상과 비슷하더라고요.
원문의 내용을 전부 실을 순 없지만, 짧게 요약하자면 AI 분야의 흐름과 취업 시장이 지난 5년 간 너무 빠르게 변화했고, 박사 과정 후 진로와 삶도 자연스레 변화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박사 학위는 보통 5년 정도의 긴 시간을 투자하는 과정임에 반해, ChatGPT 가 공개되어 세상을 뒤집어놓고 거대언어모델 (Large Language Models, LLM) 이 많은 기업의 핵심 과제가 된 지는 이제 겨우 2년이 넘었습니다. 지금 박사 과정 졸업을 앞둔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기가 대학원에 진학할 때와는 굉장히 다른 세상을 마주하게 된 것이죠.
AI 관련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 자체로 취직에 있어 엄청난 이점이 되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 실리콘 밸리에 왔던 2017년만 해도, 박사 연구 분야가 인공지능과 아무 관련이 없던 선배들이 머신러닝 수업 몇 개만 듣고 관련 직군에 취직하는 일이 상당히 흔했습니다. AI 전문 경험을 많이 따지진 않았던 것 같아요.
천체물리, 유체역학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던 박사 지인들이, 머신러닝 관련 수업을 어느 정도 듣더니 AI 논문이 없는 상태에서도 구글 브레인, 딥마인드, 아마존 등의 회사에 머신러닝 관련 직군으로 취직한 사례들이 종종 있었거든요. 대학원생들끼리 모여 신세 한탄을 하다가 술이 몇 잔 들어가면, "연구 잘 안 풀리면 말년에 머신러닝 공부 좀 하고 구글 가야지 뭐" 라는 농담이 마냥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감히 그들이 쉽게 그런 자리에 갔다곤 생각하진 않지만, 그 시절 경쟁이 지금처럼 심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시절" 이라는 단어를 쓰니 10년도 안 되는 시간을 가지고 엄청 생색내는 것 같지만, 그만큼 근 몇 년간 세상은 정말 빨리 변화했습니다. 반면, 학계는 대체로 세상보다 조금 느린 조직이죠.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가장 강한 원동력 중 하나인 돈, 그러니까 "수익을 내야한다" 는 압박이 (거의) 없고, 연구라는 일이 본질적으로 짧은 시간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대학원에서 AI 박사 학위를 하고 있는 학생들이, 학교 밖 기업의 관심, 수익화하고자 하는 수요를 쫓아가긴 어려운 게 당연합니다. 학계와 기업의 구조적 차이, 그에 따른 속도와 리듬의 차이가 엄청나니까요.
올 여름, OpenAI 로부터 "졸업 후 OpenAI 에 올 생각이 있냐" 며 연락이 왔었습니다. 인사팀 직원과의 전화 통화 중 "나는 AI 를 활용하는 정도이지,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거나 거대 모델을 다뤄본 경험은 적어서 망설여진다" 고 말했더니, 그건 크게 상관없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어차피 학계에서 추구하는 방향과 회사에서 추구하는 방향에는 적잖은 차이가 있어서, AI 박사가 아니더라도 전반적인 이공계 지식이 많고, 세부분야가 무엇이든 정량적 연구 경험이 탄탄한 박사들을 다양하게 원한다고 했습니다. 입자 물리 분야에서의 연구 경험, 금융 회사에서의 연구 경험 등이 OpenAI 에 오더라도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요.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사람을 많이 뽑고 있고, AI 경험이 많지 않은 이들을 교육하고 스카웃하기 위한 Residency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요즘 실리콘 밸리 취업 시장을 보면, 박사 과정에서 진행한 구체적인 연구 경험과 지식에 딱 맞는 직군으로 취직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아니, 옛날에도 그런 경우는 드물었던 것 같아요. 저희 부부를 포함해, 대부분의 박사들이 본인이 지금까지 해왔던 연구와는 조금 다른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런 논문을 쓰면 저런 회사에 취직할 수 있겠지" 라는 사고 방식은 박사 과정을 하기에 좋은 동기는 아닌듯 합니다. 회사들은 학계보다 훨씬 빠르게 변화하고, 특정 기술을 제품화해서 수익화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순간 다양한 연구보다는 제품화에 집중하게 되니까요.
박사 과정을 통해서 얻어갈 것은, 연구자로서의 기본 소양, 그러니까 처음 보는 어려운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사고방식과 체력인 것 같습니다. 새로운 문제를 마주했을 때, 문제를 해석하고 다양한 풀이를 시도해보는 방식, 그리고 접근 방식부터 막막한 문제를 진득하게 끝까지 풀어본 경험 등이 박사 학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진정한 가치라고 생각해요. OpenAI 가 AI 가 아닌 기초 학문 분야의 박사를 채용할 때에 보는 것도 이런 점일테고, 유체역학 박사가 머신러닝 엔지니어로 취직할 수 있는 이유도 이런 경험 때문이겠죠.
박사 과정을 고민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이 글이 좋은 물음표를 던져주었길 바랍니다. 그리고, 박사 과정에 도전해보고 싶지만 본인의 연구 분야가 취직과 거리가 멀까봐 걱정인 분들이 있다면, 작은 응원의 메세지를 보냅니다.
산하 드림.
의견을 남겨주세요
Ridi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는 교육 도메인에서 AI를 연구하고 있지만, 연구의 본질과 왜 연구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ㅎㅎ
단산 LAB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생각할 거리가 되었다니 기쁘네요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