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초 즈음, 겨울의 한기는 아직 채 가시지 않았지만 봄비가 슬슬 찾아오는, 울적한 날씨의 어느 새벽이었습니다.
물리과 도서관에서 밤을 새고 있었고,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앉아 혼자 과제를 하던 1학년 후배 한명이 있었습니다. 그 후배는 제가 조교하는 수업을 수강하고 있었기에, 대충 어떤 학생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수학과는 거리가 멀었고, 인문계열 전공을 할 계획으로 대학에 진학했는데, 우연히 천문학의 매력에 빠져 물리/천문 전공을 선택했다는 학생. 이공계 과목 공부가 익숙치 않지만, 밤까지 새워가면서 열심히 공부하던 학생. 그런 학생이었습니다.
새벽 4시쯤이었을까요. 제 할 일에 집중하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빗소리 너머로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큰 소리는 아니지만 그 동안의 힘듦이 농축된, 진한 울음 소리 같았습니다. 조용히 다가가 울고 있는 후배를 안아주고, 다독여주었습니다.
"선배. 이 공부는, 기본기를 닦고 나면 좀 쉬워지는 걸까요? 제가 기본이 안 돼있어서 이렇게 힘든 걸까요"
"아, 음... 아니요, 안 쉬워져요. 갈수록 더 어려워지죠. 전공 공부가 쉬워지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그럼 난 어떻게 해요?"
"괜찮아질 거에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책임하게 낙관적인 말만 하지 말고요. 진짜 전 어떻게 해요? 지금이라도 전공을 바꾸는 게 나을까요?"
"무책임하게 하는 말이 아니고, 진짜 괜찮아질 거에요."
"더 어려워진다면서요."
"그쵸. 인생의 많은 일이 그러하듯, 공부도 더 어려워지겠죠. 그런데, 본인도 그만큼 강해질 거에요."
"..."
"공부는 더 어려워지고, 해야하는 일도 더 많아지지만, 본인이 그보다 더 빨리 성장할 거고, 더 강해질 거에요. 수많은 어려운 과제들을 다 이겨낼 수 있도록."
"..."
"사람이 강해지는 것 같아요. 공부든, 다른 길이든, 인생이 쉬워지진 않는 것 같지만요. 수많은 어려운 일들을 소화해내고, 버텨내면서, 능력이 생기는 거죠. 정말 힘든 순간에 무너지지 않고 대처하는 요령이 생기는 거고. 그게 공부이고, 그게 성장인 거 아닐까요? 우리 모두 힘들게 공부하는 만큼 성장하고 있고, 앞으로도 더 많이 성장할 거에요. 그러니까, 그 악명 높은 A 교수님 양자역학 수업을 들을 때에도, 괜찮을 거에요."
제 말뜻을 정말 이해한 건지, 조교 앞에서 우는 게 민망해서 그런 건진 몰라도, 후배는 금방 잠잠해졌고,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는 다시 과제 모드로 돌아갔습니다. 그 날 아침 집에 걸어가는 길에, 새벽의 그 대화가 그 학생에게 또 하나의 성장의 기회가 됐기를 바랐습니다. 그 학생이 저한테 얻어가는 것이 있다면, 일반물리학 지식보단 그 날의 이야기였기를, 하고요.
내일 연구소 세미나에 초청된 외부 연사의 이름이 익숙해서 보니, 그 후배입니다. 그 동안 연락을 안 해서 근황을 잘 몰랐는데, 학부 과정은 당연히 잘 마쳤고, 자대에 남아 박사과정까지 훌륭하게 마무리하는 중인가 봅니다. (아마 저희 연구소로 포닥을 오려고, 면접 겸 세미나를 하러 오는 것 같습니다.) 그 후배는 기억하고 있을까요, 1학년 어느 날 새벽, 어느 이상한 조교의 오지랖을? 그 옛날의 후배와 저는 상상이나 했을까요, 둘이 함께 박사 과정을 마치게 될 거라는 걸?
요새 한동안 세미나를 잘 안 갔는데, 내일은 꼭 다녀오려고 합니다. 세미나 연사에게 질문거리가 많네요. 그 날 이후의 공부와 연구는 쉬웠는지, 아니면 본인이 많이 성장했는지. 학부 1학년 때는 울면서 밤을 새도록 힘들어하던 공부를, 어떻게 박사 과정까지 계속하게 되었는지. 8년 전, 어느 이상한 조교의 오지랖을 기억하는지. 지금은 그 조교와 똑같은 박사 과정 말년 단계에 있다는 걸 아는지.
나도 그동안 그만큼 많이 성장했을까, 곱씹어봅니다.
산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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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dragon56
뀨대라 페이지를 8년째 열심히 읽어왔던 팬으로서, 당시 2학년 때 수학과 과목에서 해석학2가 너무 어려운 나머지 열심히 끙끙대다가 저 후배와의 사연을 읽고 제게 해주는 얘기인양 위로받으면서 열심히 정진했던 기억이 납니다. 벌써 7년 가까이 되긴 했는데, 저 사연이 특별히 기억에 남고 또 대화를 나눈 후일담 같은 것도 궁금하네요.^^ 저 역시 8년전 신입생 때 이끌어주셨던 13학번 선배께서 박사 학위를 받으시고 모교에 열흘 전에 오셔서 3일간 머물다 가셨는데, '문득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리고 학문을 좇는 우리의 순수한 열정은 변하지 않았다'(비록 순수수학에서 응용수학으로 둘 다 길을 틀긴 했지만)는 감상을 몇일 간 머릿속에서 되뇌이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왜 교육인가> 라는 글을 가장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키워드 검색을 해보니 2018년도 11월 경에 노트에 적어놨었네요..^^)
단산 LAB
오랜 시간 좋게 지켜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앞으로도 오래오래 지켜봐주세요 ㅎㅎ 저 후배와 이번에는 일정이 잘 안 맞아 깊은 대화를 나누진 못했지만, 반갑게 인사하고, 서로 박사 과정 마무리 잘 하자고 응원을 나누었습니다. 오히려 저는 학계를 떠나는 상황인데, 저 후배는 포닥을 준비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니, 뭔가 더 아이러니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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