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업로드하는 글이네요.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저희 부부가 최근 실리콘 밸리를 떠나 마이애미로 이사 오게 되었습니다. 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수많은 생각이 있었지만, 오늘은 떠나기로 한 이유보다는 실리콘 밸리에서 배워가는 것, 그리울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희 부부는 각자 스탠포드에서 대학원 과정을 시작하면서 처음 실리콘 밸리로 가게 되었고, 거기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처음 만났을 땐 각자의 분야에서 교수가 되는 꿈을 꾸는 대학원생 둘이었는데, 지금은 둘 다 예상과는 다른 커리어를 펼쳐나가고 있네요. 확실히 대학원, 그리고 실리콘 밸리에서의 삶이 여러모로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뼛속까지 이공계인인 저희 둘에게 스탠포드는 그야말로 끊임없는 지적 자극과 영감의 원천이었습니다. 비슷한 성향과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다양한 기술 혁신과 문제 해결을 주도하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다양한 꿈을 꾸었던 것 같습니다. 오랜 기간 학교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이 어떤 공부를 하는지 듣는 일은 늘 흥미로웠고, 새로운 연구 주제에는 정말 끝이 없었습니다.
(단아) 스탠포드에 오기 전에는, 공학의 특정 분야에 사고가 많이 갖혀 있었던 것 같아요. 서울대에선 필수로 이수해야하는 전공 수업이 많았고, 같은 학과 사람들끼리 많이 어울려서 더욱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스탠포드가 제공하는 다양한 수업, 수강 신청에 있어서의 자유, 그리고 여러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시야를 많이 넓힐 수 있었습니다. 그 덕택에 유학을 나오기 전에는 생각도 안 해본 분야에서, 생각도 안 해본 직업을 갖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실리콘 밸리의 "실리콘" 관련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산하) 마찬가지로, 스탠포드는 물리와 수학 같은 순수학문만을 고집하던 저에게 더 넓고 다양한 관심을 심어준 곳입니다. 자연계열 전공을 하면서 기른 논리적 시각을 인간 세상의 문제들에 적용시킬 수 있다는 걸 알려주었고, 물리학계 밖의 다양한 진로를 꿈꾸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우주에 대해서 고민하는 시간보단 인류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서 사유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런 영향력이 모여 결국 지금의 진로 결정까지 이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학교 밖의 실리콘 밸리도 정말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 학교를 떠나 취직하는 과정을 보면서, 그리고 점점 학교 밖의 친구들을 많이 사귀게 되면서, 세상에 대한 시야를 많이 넓힐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회사들과 직업이 존재하는지, 비슷한 공부를 했던 친구들조차도 얼마나 다른 커리어와 삶으로 나아가는지를 보는 게 참 좋았습니다.
또, 수많은 회사들이 뜨고 지는 이곳 생태계를 지켜보는 것이, 기술과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지에 대한 훈련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학위 과정을 시작했던 2017년부터 지금까지, 불과 몇년 사이에 세상의 기술 트렌드가 몇번씩 바뀌는 것을 지켜보는 건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고, 이공계인으로서 앞으로의 커리어를 결정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모든 대학원생이 학위 과정 동안 답해야하는 가장 어려운 질문 중 하나는 "지금까지 배운 것을 토대로 앞으로는 어떤 일을 해야할까" 인 것 같습니다. 이공계인으로서, 이 고민을 실리콘 밸리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큰 축복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희 부부가 실리콘 밸리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사람들이었습니다. 늘 "모임이 이렇게 많아도 되나" 하면서 농담을 할 정도로,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귄 시간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에게 다가가고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이었고, 정말 많은 사랑을 나누어주고 그것보다도 더 큰 사랑을 받은 시기였습니다. 대학원을 거치면서, 코로나19로 인해 사회가 산산조각 나기도 했고, 몸이 아팠던 기간도 있었고, 진로 고민으로 힘들어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시기이긴 했지만, 주위엔 늘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도와줄 사람이 없어 외로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친구, 이웃, 어쩌면 가족. 어떤 단어가 적절한 지는 모르겠지만, 그 동안 맺은 인연들은 정말 특별한 것이었고, 앞으로도 오래오래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비록 이사를 하긴 했지만, 아직도 단산 부부의 일부는 그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곳에 남아있는 친구들이 정말 많고, 여러모로 방문할 일도 종종 있을 것 같거든요. 물론 단아는 아직 실리콘 밸리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기도 하고요. 이렇게 거창하게 송별회를 하고, 글도 쓴 게 민망할 정도로, 자주 왔다갔다 할 수 있었음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실리콘 밸리.
작별이 아니니까, 작별 인사는 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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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ng Hyun
오랜만에 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국 유학을 막 시작하는 입장에서, 이미 미국에서 멋지게 자리잡으신 단산님 두 분이 여러모로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 좋은 연구자가 될 수 있을지 고민할 때 늘 목표로 삼게 되는 것 같아요. 실리콘 밸리를 떠나시더라도 앞으로 하시는 일들 모두 잘 되시길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가볍게라도 자주 글 남겨주세요 큰 영감이 됩니다 ㅎㅎ
단산 LAB
응원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글에도 썼듯, 몸은 이사를 했지만 또 그렇게 "떠난" 기분은 아닙니다. 잠시 이사로 정신없긴 했지만, 앞으로도 글은 계속 쓸 거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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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_dragon56
대학 입학을 했을 때부터, 순수수학 전공을 다짐했을 때부터 당시 뀨대라님은 먼 곳에서 좋은 코멘트와 인사이트를 주시는 (뵌 적 없는) 멘토셨습니다. 지금은 저도 길을 한 번 틀고, 또 한 번 틀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야구가 좋아서 투수가 되고 싶었는데 유격수로 전향했다가, 이제는 축구를 하게 될지도 모른달까요. 최적을 받아들일지, 고집피울지 고민하던 중에 이 글을 읽게 됩니다. 고생많으셨습니다^^ 학계와 인더스트리의 길들을 가보신 멘토로서 많은 경우의 수들 중 최고의 선택을 하셨을 거라 믿습니다. 햇수로 세어보면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꾸준한 글들로 다양한 축복과 만남, 틀에 갇히지 않는 관점들을 지속적으로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움이 많이 됩니다.^^ 마이애미에서의 일상도 파이팅하시길 바라며
단산 LAB
오랜 구독자시네요! 너무 예쁜 말씀 감사합니다 :) 앞으로도 잘 지켜봐주시고, 또 다양한 이야기 나눌 수 있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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