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die Kapitel 릴리입니다.
낯선 땅 베를린에서 저마다의 이유로 살아가는 우리들. 각자의 조각을 들고 모이는 Kapitel 베를린장(章)이 드디어 막을 올립니다.
이번 모임에서 우리가 함께 나눌 텍스트는 창작집단 '독'의 희곡집, 《당신이 잃어버린 것》입니다.
혹시 ‘희곡’이라는 장르가 조금 낯설고 막막하게 느껴지진 않으셨나요? 소설처럼 아름다운 묘사도, 에세이처럼 친절한 설명도 아니기에 이 텍스트와 어떻게 친해져야 할지 고민이 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번 레터에서는 희곡과 친해지기 위한 첫 번째 단계를 준비했습니다. 바로 희곡의 문법을 통해 삶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희곡은 복잡한 인물과 사건들을 체계적으로 연결한 '설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방의 땅에서 저마다의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희곡의 언어를 통해 읽어볼까요?
🧩 희곡의 문법으로 마주하는 이방인의 삶
희곡은 소설이나 에세이와는 조금 다른 문체로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하나로 이어진 서술이 아닌 인물의 이름, 괄호 속의 지시 사항, 무대를 설명하는 긴 설명, 대사, 그리고 무대 장치까지, 희곡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촘촘하게 얽혀 있습니다. 이 낯선 형식은 희곡이 단순히 '읽히기 위해' 쓰인 글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즉 희곡은 누군가의 목소리와 구체적인 움직임, 그리고 무대라는 공간이 더해질 때 살아나는, 정확한 목적을 갖고 설계된 글입니다.
때로는 서툰 말을 내뱉거나 심지어는 침묵해야 하고, 보이지 않는 벽 뒤에서 진심을 삼켜야 하는 순간들을 겪어보셨을까요? 이렇게 일상에서 마주하는 장면들은 희곡 속 장치들과 닮아있습니다. 수많은 장르 중 희곡을 펼쳐 들어야만 하는 이유는, 낯선 땅에서 매일 겪어내는 이방인의 삶 또한 그만큼이나 복잡다단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단출하고 매끄러운 문장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일상들이니까요. 그래서 이 복잡한 설계도는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희곡의 문법을 함께 톺아보며 우리 삶을 지탱하는 뼈대를 발견하고, 목소리 내어 읽는 과정을 통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진심을 하나씩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1. 희곡의 뼈대: 우리가 발 딛고 선 세계
희곡의 기본 구성 요소들은 우리가 베를린이라는 낯선 무대 위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 그 본질을 비춰줍니다.
🏙️해설(Stage Direction): 베를린
희곡의 첫머리,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가장 먼저 '해설'이 등장합니다. 해설은 작품의 시간과 장소, 그리고 그 공간을 지배하는 분위기를 설정합니다. 우리에게 이 해설은 우리가 발 딛고 선 베를린이라는 장소 전체를 의미합니다.
해설은 지리적인 정보 제공과 더불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힌트가 되기도 합니다. 독자가 작품 속 인물과 사건을 만나기 전에, 앞으로 펼쳐질 극의 분위기와 운명을 미리 짐작하게 하는 실마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이 끊임없이 도착하며 가져오는 설렘과, 다시 떠나가며 남기는 상실감이 묘하게 뒤섞인 특유의 자유로움과 불안정함. 그 형용할 수 없는 베를린의 분위기가 바로 우리가 이 극을 이끌어갈 무대의 배경이자, 우리 삶의 첫 번째 지시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희곡의 시작에 와 있습니다.
👣지문 (Instruction): 움직임
'지문'은 인물의 동작이나 표정, 심지어는 말 사이의 침묵 등 희곡 내에서 무언가를 지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지문은 낯선 땅에서 우리의 표정이나 움직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소위 말해 언어 아래 숨겨진 가장 솔직한 몸의 언어입니다.
베를린이라는 무대 위에서 우리가 내뱉는 완벽한 대사보다, 사실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지독한 고립감이나 불현듯 찾아오는 설렘이 대사 사이사이의 지문 속에 더 짙게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낭독회에서 마주할 것은 바로 이 문장과 문장 사이, 지문이 머무는 자리에 놓인 각자의 '움직임'들입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의 사소한 버릇이나 망설임이 사실은 여러분이라는 캐릭터를 설명하는 가장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세요.
🗣️대사 (Dialogue): 언어
인물의 내면을 뚫고 세상 밖으로 던져지는 소리. '대사'입니다. 앞서 무대를 설정하고(해설), 표정을 가다듬는(지문) 과정이 있었다면, 대사는 그 모든 준비 끝에 나의 생각과 감정을 밖으로 꺼내놓는 행위입니다.
타국에서 모국어로 대사를 읽는 일은 종이 위에 박제된 문장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입니다. 낯선 언어와 환경에서 움츠러들었던 내가 익숙한 언어의 파동을 타고 흐를 때, 서로의 존재를 가장 선명하게 증명됩니다.

2. 희곡의 장치: 마음의 문법
희곡의 뼈대를 이해했다면, 이제 '함께 읽기'를 통해 공간을 채우는 감각들을 마주해보려고 합니다.
타인과 나의 목소리를 통해 글에 생명을 불어 넣으면 혼자 눈으로 읽을 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장치나 맥락을 이해하게 됩니다.
'낭독'이라는 행위가 우리의 멈춰있던 서사들 사이로 어떤 새로운 감각을 불어넣는지, 희곡의 장치들을 통해 그 입체적인 순간들을 미리 마주해 봅시다.
암전 (Blackout)🌑: 단절과 준비
장면 전환을 위해 잠시 극장의 모든 불이 꺼지는 순간을 '암전'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의 삶도 삶도 때로 예고 없는 단절을 마주하곤 합니다. 하지만 희곡에서 암전은 끝이 아니라, 무대 장치를 옮기고 다음 장면을 세우기 위한 가장 역동적인 준비 시간입니다. 우리가 겪는 침묵과 정적 또한 새로운 서사를 써 내려가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일지 모릅니다.
💡 Kapitel 낭독 팁!
낭독 중에 (암전)을 마주한다면, 그 단어도 잊지 말고 소리 내어 함께 읽어주세요. 나직이 읊조린 뒤 찾아오는 짧은 정적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다음 장면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거예요. 그 찰나의 멈춤이 우리의 서사 사이로 어떤 새로운 감각을 불어넣는지 함께 느껴보고 싶습니다.
서브텍스트 (Subtext)💬: 진심
서브텍스트는 말해지는 대사 아래 흐르는 '진짜 의도'를 뜻합니다. 희곡이 매력적인 이유는 우리가 무대 위 인물의 목소리 톤과 미세한 떨림, 표정을 직접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눈으로만 읽을 때는 놓치기 쉬웠던 진심들이, 누군가의 몸을 빌려 뱉어지는 순간 비로소 선명하게 우리에게 도착합니다.
베를린의 관공서에서, 혹은 이웃과의 대화에서 우리가 내뱉은 서툰 언어들 뒤에 얼마나 많은 망설임과 간절함이 숨어 있었나요? 이번 모임에서는 문장을 낭독하는 시간을 통해, 적혀진 글자 뒤 서브텍스트를 헤아려보려고 합니다.
제4의 벽 (The Fourth Wall) 🧱 주인공으로
무대와 객석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가상의 벽이 있습니다. 이방인으로서 우리는 때로 이 도시의 풍경을 그저 지켜보는 '객석'의 시선에 머물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희곡을 손에 쥐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순간, 그 견고한 벽은 허물어집니다.
이 무대 위에서는 특별한 누군가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대본을 든 우리 모두가 각자의 서사를 직접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됩니다. 관찰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때, 우리는 비로소 이 도시의 구성원이 됩니다.

✉️ Curtain Call: 당신을 위한 질문
여러분의 오늘 하루를 희곡의 한 장면으로 기록한다면, 어떤 '지문'이 가장 먼저 적히게 될까요?
그리고 그 지문 뒤에 숨겨진, 차마 대사로 뱉지 못한 여러분만의 '서브텍스트'는 무엇인가요?
희곡의 언어로 삶을 비춰보니 어떠셨나요? 조금은 친밀해진 기분이 드실까요?
나의 움직임이 '지문'이 되고, 침묵은 단순한 단절이 아닌 '암전'이라는 준비 시간이 되고, 차마 대사로 뱉지 못한 마음이 '서브텍스트'라는 깊은 울림으로 전달되는 경험. 이 짧은 낭독의 예행연습이 여러분의 베를린 일상에 작은 실마리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희곡이라는 설계도가 사실은 우리의 일상과 얼마나 밀착되어 있는지 조금이나마 느끼셨기를 바랍니다.
다음 뉴스레터에서는 '희곡 읽기 가이드'를 들고 찾아오겠습니다 😊
우리의 목소리가 베를린의 공기와 만날 그날을 기다리며.
Kapitel 호스트 릴리 드림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