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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S 2024를 기억하시나요? 온갖 기술이 경연을 펼치는 그곳에서 유독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주황색 기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래빗(Rabbit Inc.)의 R1이죠. 귀여운 디자인에, 스마트폰 앱 없이 자연어와 자체 LAM(거대 행동 모델)만으로 세상을 제어하겠다는 야심찬 비전. $199라는 파격적인 가격까지 더해지며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달 만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버렸습니다. CES 시연은 어디 가고, 실제 제품은 기대에 한참 못 미친다는 혹평이 쏟아졌죠.
대체 그 짧은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그리고 이 롤러코스터 같은 여정은, 요란하기만 한 AI 하드웨어 시장의 민낯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요?
CES 2024: AI 시대의 스마트폰?
Rabbit R1의 등장은 극적이었습니다. 창업자 Jesse Lyu는 CES 현장에서 "앱의 시대는 갔다"고 선언하며 R1을 치켜세웠죠. 스웨덴 디자인 그룹 Teenage Engineering(낫싱폰 디자인으로 유명합니다)의 손길이 닿은 주황색 네모, 빙글빙글 돌아가는 'Rabbit Eye' 카메라, 직관적인 버튼. 일단 디자인부터 '물건'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핵심은 '주머니 속 AI 비서'라는 컨셉. 그리고 그 심장에는 LAM(Large Action Model)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앱을 열고 버튼을 누르는 과정을 AI가 대신 해준다는 거죠. 음악 재생, Uber 호출, 피자 주문, 심지어 Midjourney 이미지 생성까지. 시연 영상 속 R1은 마치 마법처럼 작동했습니다. 사용자가 직접 AI에게 일을 가르치는 'Teach Mode'라는 기능까지 약속했죠.
$199라는 가격표는 화룡점정이었습니다. 초기 물량 1만 대가 발표 당일 매진될 정도로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너도나도 'CES 최고의 제품'이라며 찬사를 보냈죠.
현실의 벽은 높았다: 기대와 배신의 간극
하지만 2024년 3월, R1이 실제 사용자들 손에 쥐어지면서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CES에서의 매끄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버그투성이에 반응은 느리고, 배터리는 반나절도 버티기 힘들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죠. Uber나 DoorDash 연동 같은 핵심 기능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R1을 파헤쳐 보니, 그럴싸한 Rabbit OS 아래에는 사실상 안드로이드 앱이 돌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는데요. "이럴 거면 그냥 스마트폰 앱으로 내놓지, 왜 굳이 하드웨어를?"이라는 비판이 쏟아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죠. 혁신적인 OS와 LAM을 기대했던 사용자들 입장에서는 배신감마저 느꼈을 겁니다.
다만 결정타는 따로 있었습니다. 이 하이프에 완전히 찬물을 끼얹은 건, 테크 유튜버 MKBHD였습니다. 그는 R1을 "리뷰하기조차 민망하다(barely reviewable)"고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느려터진 속도, 조악한 배터리, 기본적인 기능(알람, 이메일)조차 없는 현실, 부정확한 답변 등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죠. 그의 영상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R1에 대한 여론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습니다. '역시 $200짜리 장난감이었나' 하는 인식이 굳어졌죠.
사실 저도 이 영상을 보고 예약주문을 취소하기도 했습니다 🥹
엇갈리는 숫자들: 팔렸지만 쓰이지 않는다?
숫자만 보면 R1은 실패작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2024년 6월까지 무려 13만 대가 팔렸다(예약주문)고 하니까요. 당초 예상했던 1만 대를 훌쩍 뛰어넘는 성과입니다. CES에서의 화제몰이와 저렴한 가격이 시너지를 낸 결과겠죠.
하지만 속살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팔린 기기 수에 비해 실제 매일 사용하는 사람(DAU)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후문입니다. 즉, 호기심에 샀다가 서랍 속에 처박아두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거죠. 숫자는 흥미롭지만, 동시에 뼈아픈 현실을 보여줍니다. iF 디자인 어워드 수상이나 추가 투자 유치 소식도 있었지만, 핵심적인 사용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공허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R1의 추락은 비슷한 시기 혹평을 받았던 Humane AI Pin의 사례와 겹쳐 보입니다. 둘 다 '스마트폰을 대체할 AI 기기'라는 거창한 포부를 내세웠지만, 정작 스마트폰보다 훨씬 불편하고 기능도 부족하다는 현실의 벽에 부딪힌 셈이죠.
이는 독립형 AI 하드웨어라는 컨셉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듭니다.
추락 이후: Rabbit의 몸부림과 진화
물론 Rabbit도 손 놓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부랴부랴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쏟아내며 배터리, GPS 등 지적받았던 문제들을 개선하려 애썼죠.
나름 의미 있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사용자가 직접 LAM에게 웹사이트 작업을 가르칠 수 있는 'LAM Playground'와 'Teach Mode' 베타를 선보인 겁니다. 초기 앱 연동의 한계를 넘어서, 사용자가 R1의 활용성을 직접 넓힐 수 있도록 방향을 튼 것이죠. 사진에 AI 효과를 넣는 'Magic Camera', 음악 스트리밍 지원, 양방향 번역, 음성 녹음 및 요약 등 자잘한 기능 업데이트도 이어졌습니다.
업데이트가 쌓이면서 사용자 평가도 조금씩 변하고 있습니다. 초기 비판 일색에서 벗어나, 인터페이스 개선이나 'Magic Camera' 기능의 재미를 언급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죠. 특히 'Teach Mode'의 잠재력에 주목하며, 특정 웹사이트 자동화에 성공했다는 긍정적인 후기도 간간이 보입니다.
최근에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여러 AI 에이전트가 협력하여 복잡한 작업을 수행하는 'rabbitOS intern'을 공개했습니다. 단순 작업 자동화를 넘어 추론, 계획, 코드 실행까지 넘보는, 보다 진화된 AI 운영체제를 향한 청사진을 제시한 셈이죠.
AI 하드웨어의 딜레마
하지만 여전히 R1은 '필수품'과는 거리가 멀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재미있긴 한데, 굳이 이걸 써야 할까?", "스마트폰으로 하는 게 더 빠르고 편한데?"라는 반응이 여전하죠. 개선은 있었지만, "그래서 스마트폰 대신 이걸 써야 하나?"라는 근본적인 질문에는 여전히 물음표가 찍힙니다.
전문가들은 R1과 같은 독립형 AI 기기의 미래에 대해 대체로 회의적입니다. Apple, Google 같은 빅테크들이 막대한 자본을 쏟아부으며 스마트폰 자체를 AI 플랫폼으로 진화시키는 마당에, 별도의 기기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겠냐는 거죠. Rabbit이 살아남으려면 명확한 타겟 고객과 R1만의 '킬러 앱'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일각에서는 Rabbit이 아예 하드웨어를 포기하고 LAM 기술에 집중하는 소프트웨어 회사로 피벗할 가능성도 점칩니다.
결국 Rabbit R1의 여정은 AI 하드웨어 스타트업이 직면한 딜레마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혁신적인 컨셉과 디자인으로 초반 흥행에는 성공할 수 있지만, 스마트폰이라는 강력한 경쟁자를 넘어설 실질적인 가치를 제공하지 못하면 결국 '신기한 장난감'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
Rabbit에게 남은 기회는 LAM과 Teach Mode, 그리고 rabbitOS intern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용자가 직접 AI를 길들이고 자동화하는 경험, 혹은 특정 분야에 고도로 특화된 AI 에이전트. 이것이 스마트폰 AI와 차별화될 수 있는 열쇠일 수 있겠죠.
과연 Rabbit은 이 딜레마를 뚫고 자신만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AI 하드웨어는 그저 화려하게 등장했다 사라지는 신기루에 불과할까요? 시장은 여전히 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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