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ided by Zero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IT테크, 스타트업 그리고 자본시장에 대한 2차적 사고를 공유합니다.
언어 학습 앱 듀오링고(Duolingo)의 주가를 보면 요즘 시장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알 수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듀오링고는 AI를 가장 성공적으로 도입한 기업 중 하나로 꼽히며 주가가 고공행진했죠. 역대급 실적을 발표하며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구글이 제미나이(Gemini) AI를 탑재한 언어 학습 기능을 발표하자마자, 듀오링고의 주가는 40% 가까이 폭락하며 그간의 상승분을 모두 반납했습니다.
매출, 이익, 사용자 수 모두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회사가 거대 경쟁자의 시장 진입 소식 하나에 이렇게까지 흔들리는 모습. 모순적이죠. 과연 시장의 공포는 합리적인 걸까요? 생성형 AI가 정말 듀오링고라는 견고해 보였던 성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요? 아니면 시장이 듀오링고의 진짜 경쟁력을 오해하고 있는 걸까요?
구글의 공습
그동안 막연했던 AI의 위협은 구글이 AI 언어 학습 도구를 공개하면서 현실이 됐습니다. 구글의 전략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지만, 핵심은 구글 번역 앱에 탑재된 연습(Practice) 기능이죠. 제미나이 AI가 사용자의 수준과 목표에 맞춰 맞춤형 듣기/말하기 연습을 생성해주는 기능입니다.
이 움직임이 다른 AI 스타트업의 도전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구글이 가진 압도적인 구조적 이점 때문입니다.
일단 구글은 안드로이드라는 막강한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 수십억 개의 기기에 자사의 앱을 손쉽게 선탑재하거나 통합할 수 있습니다. 앱스토어 검색과 마케팅에 의존해야 하는 듀오링고와는 출발선부터 다르죠.
구글의 언어 학습 기능은 독립적인 수익 모델이 아닙니다. 기존의 무료 번역 서비스를 강화하고, 자사의 핵심 AI인 제미나이의 성능을 과시하기 위한 도구죠. 즉, 영원히 공짜로 제공될 수 있다는 겁니다(될 수 있다는거지 꼭 그렇다는건 아닙니다). 이는 유료 구독 전환이 핵심 비즈니스 모델인 듀오링고에게는 상당한 압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구글 같은 거대 기업이 특정 시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시장의 경쟁 구도는 완전히 재편됩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수익성을 따지지 않고 시장 점유율을 위해 공격적인 투자를 할 수 있다는 공포감이 시장을 지배하게 되죠.
구글은 당장 듀오링고의 모든 것을 대체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구글 번역'이라는 즉각적인 필요를 해결하기 위한 앱에 기능을 추가한 건 우선 가볍게 언어를 배우려는 캐주얼 학습자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의도로 읽힙니다. 하지만 이 가벼운 시장을 뺏기는 것 자체로 듀오링고의 성장 엔진에는 타격이 갈 수밖에 없죠.
최고의 실적, 최악의 주가
재밌게도 구글의 발표 직전 듀오링고는 그야말로 최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2025년 2분기 실적은 모든 지표에서 시장 예상을 뛰어넘었죠. 매출은 41.5%, 일일 활성 사용자(DAU)는 40%, 유료 구독자는 37%나 급증했습니다. 회사 스스로도 이런 성공의 원인을 'AI 기능의 성공적인 도입' 덕분이라고 자신했을 정도였죠.
하지만 시장은 냉정했습니다. 구글의 발표 이후, 듀오링고의 주가는 40% 가까이 폭락하며 AI 도입으로 얻었던 모든 상승분을 반납했습니다. 이는 시장이 더 이상 듀오링고의 현재 실적이 아닌, 미래의 성장 가능성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는 신호죠.
왜 이번에는 달랐을까요? 지난 2년간 챗GPT의 등장은 막연한 위협이었습니다. 사용자가 직접 학습 계획을 짜고 프롬프트를 만들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죠. 하지만 구글의 이번 움직임은 다릅니다. AI의 위협이 구체적인 '제품'과 '기능'으로 나타난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시장은 '듀오링고의 핵심 기능이 이제 거대 기술 기업에 의해 하룻밤 만에 복제되고 무료로 배포될 수 있는 '기능(Feature)'에 불과하다'는 공포에 휩싸인 겁니다.
해자(Moat)
하지만 이런 시장의 반응은 듀오링고의 진짜 경쟁력을 간과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듀오링고가 파는 상품은 사실 '언어 학습 콘텐츠'가 아니기 때문이죠. 이들이 진짜 파는 것은 바로 '동기부여'와 '학습 습관'입니다.
언어 학습의 가장 큰 장벽은 꾸준함의 부재입니다. 듀오링고의 핵심 경쟁력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계된 게미피케이션(Gamification) 엔진에 있죠. 이 안에는 핵심적인 장치들이 있는데요
- 연속 학습(Streaks): 하루라도 학습을 놓치면 연속 기록이 깨진다는 손실 회피 심리를 자극해 매일 앱을 켜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장치
- 순위표 (Leaderboards): 비슷한 수준의 사용자들과의 경쟁을 통해 학습 동기를 부여
- 경험치(XP), 보석(Gems), 배지(Badges): 지속적인 보상 시스템
이런 장치들은 단순히 학습을 재미있게 만드는 것을 넘어 사용자의 행동을 설계하고 '매일 공부하는 습관' 자체를 만들어냅니다. 듀오링고의 높은 사용자 유지율과 파워 유저 비율은 바로 이 '동기부여 엔진'의 성공을 증명하는 데이터죠. 여기에 듀오(Duo)라는 귀여운 부엉이 캐릭터를 앞세운 강력한 브랜드와, 1억 명이 넘는 사용자의 학습 데이터에서 나오는 데이터 플라이휠 효과는 흉내 내기 어려운 해자입니다.
서로 다른 고객
어떻게보면 듀오링고와 구글은 서로 다른 고객의 다른 목표를 해결해주고 있습니다.
사용자가 구글의 AI 언어 도구를 채택하는 이유는 "지금 당장 이 상황에서 필요한 말을 알려줘" 라는 즉각적인 필요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여행지에서 메뉴를 주문하거나, 급한 비즈니스 이메일을 쓸 때처럼 말이죠.
반면, 사용자가 듀오링고를 하는 이유는 "내가 꾸준히 공부하는 습관을 만들어서 장기적으로 유창해지도록 도와줘" 라는 자기 계발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함입니다. 1,000일 넘게 연속 학습 기록을 이어가는 사용자는 단순히 언어를 배우는 것을 넘어, 듀오링고를 자신의 '개인 습관 코치'로 고용하고 있는 셈이죠.
이렇게 보면 두 서비스는 완벽한 대체재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듀오링고에게 진짜 위협은, 언어 학습에 처음 관심을 갖는 수많은 잠재 고객들이 구글 번역 같은 편리한 도구에 먼저 만족하고 굳이 듀오링고 앱을 다운로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기존 고객의 대규모 이탈보다는, 신규 고객 유입 속도가 점차 둔화될 위험이 더 큰 거죠.
AI로 해자가 깊어질 수 있을까
물론 듀오링고 역시 AI의 위협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오히려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자신들의 해자를 더 깊게 파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죠.
유료 구독 모델인 '듀오링고 맥스'에서는 오픈AI의 GPT-4를 활용해 정답 설명이나 역할극(Roleplay) 같은 심화된 AI 기능을 제공합니다. 단순한 언어 연습을 넘어서 AI 개인 교사와 함께 공부하는 경험을 제공하려는 시도죠.
또한 AI를 활용해 새로운 언어 코스를 만드는 속도도 획기적으로 높이고 있습니다. 과거 100개 코스를 만드는 데 12년이 걸렸다면 이제는 AI 덕분에 1년에 150개 코스를 만들 수 있게 되었죠. 이를 통해 더 다양한 언어를 서비스하며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수학, 음악, 체스 등으로 카테고리를 확장하며 '학습을 위한 슈퍼앱'으로 진화하려는 움직임도 보입니다. 언어 학습이라는 단일 시장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플랫폼 전체의 끈끈함을 높이려는 전략이죠.
듀오링고같은 회사가 제대로 성장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지표 중 하나는 얼마나 빠른 주기로 새로운 서비스가 출시되느냐인데, AI 위협속에서 이 부분도 실행을 해내고 있는거죠.
승부처는 지속성
이런 상황들을 봤을 때, 구글의 등장이 당장 듀오링고에게 사형 선고가 될 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 두 회사는 서로 다른 고객의 다른 문제를 해결하고 있죠. 듀오링고의 핵심 경쟁력은 AI로 쉽게 복제할 수 있는 '언어 콘텐츠'가 아니라, 행동 심리학에 기반한 '동기부여 시스템'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가능성 있는 또 다른 시나리오는 두 서비스가 공존 하는 미래입니다. 구글은 즉흥적이고 가벼운 학습 수요를, 듀오링고는 꾸준한 학습 수요를 각각 만족시키며 시장을 양분하는 거죠. 다만, 듀오링고는 과거와 같은 폭발적인 성장세보다는, 좀 더 완만하고 성숙한 성장을 기대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결국 이 싸움의 승패는 '누구의 AI가 더 똑똑한가'가 아니라, '누구의 제품이 사용자를 더 오래, 더 꾸준히 붙잡아 둘 수 있는가' 에 달려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지속성'이라는 게임에서, 듀오링고는 아직까지는 시장의 그 어떤 플레이어보다도 강력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