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4일, 일곱 번째 편지

from 지우

2023.09.28 | 조회 2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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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의 봉안

PD로 살고 편지를 씁니다.

챕터 1. H에게 챕터 2. 선생님께

 

다정한 두 사람에게 편지를 쓰다

 

언제부터 적어내려간 편지인지 나는 모른다.

 

요조의 노래 '나의 다짐!'이 말하듯

허기와 졸음 난처한 간지러움들, 그것을 끼니삼아

맑은 날을 기다리는 당신들을 나는 언젠가부터 인지한 것이다.

당신들의 흐린 날을 알아챈 것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 흐린 날과 공명하겠다는 나의 다짐은

실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이 편지는

어쩌면 아주 오래 전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H에게

 

어딘지 말하지 않아도 너는 알겠지
어딘지 말하지 않아도 너는 알겠지

 

기억하니 우리가, 아끼던 그 섬에서의 마지막 날이었어

아주 짧게 인사를 나눴었던 순간. 주차장 근처였어

아마 너는 기억하지 못할지도 몰라

우리는 몇 번, 그렇게 어색하게 웃음지으며 인사를 주고 받았던 것 같아

 

요조의 EP <이름들>을 들으며 걷는 오전 8시 25분이야

나는 이 노래들을 들으며 지난 가을과 겨울을 견뎠단다

백양로를 걷고, 또 걸으며 가장 무거운 이름들에 대해 생각했어

 

너는 그동안 이 앨범을 들고 어디를 걸었는지 묻고 싶다

각자 다른 곳에 터전을 잡아간 그 이후로 말이야.

 

각자의 자리에서 이 노래들을 들었던

각자의 시간을 이야기하고 싶어

 

살고 또 죽고 싶었던 그 시간들 말이야.

 

신촌기차역 위로 보이는 하늘,

왜 늘 남빛이었던 것만 같을까

언제나 공허한 마음으로 응시했어

기대할 것은 저녁밥밖에 없는 그런 하루였어

 

차츰 외투가 두꺼워졌을 때

차가운 공기의 생경함과 새로 지은 강의실의 페인트 냄새

홀로 먹는 학식, 양이 적게 담긴 알리오올리오

그런 것들을 아직 기억하고 있어

 

난 궁금해졌어,

우리가 서로 교통하지 않는 동안

무슨 이야기가 너에게 흘러갔는지 듣고 싶어졌어

 

난 약속하고 싶어졌어,

지켜지지 않는 약속들이란 미완의 무엇이 아닌

희망이니까. 기대니까. 그녀의 말처럼.

 

어제 친구와 고로케를 먹었어
어제 친구와 고로케를 먹었어

 

우리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면

색색깔의 접시에 담긴 고로케 따위를 먹을 때면

 

이 조용한 편지보다는 시끄럽겠지

그러나 우리가 나눈 예의바른 다정은 그대로겠지

 

밤 골목의 유행가를 들으며

진부한 노래가 진부하지 않게 들리는 순간

 

우리는 하하 웃겠지 혹은 엉엉 울겠지

 


 

선생님께

 

초록을 선물하고 싶어요
초록을 선물하고 싶어요

 

편지는 잘 읽고 계신가요?

많이 바쁘시겠지요

장마 소식은 지난 여름을 생각케 합니다

 

안부를 물으셨다지요, 스쳐가는 빈말일 수도 있지요

그러나 누군가 안부를 물어주는 것

내겐 결코 당연하지 않은 다정이기에, 답장을 써보고 싶어졌습니다

 

늘 할 수 있는 말은

잘 되겠다는 말 잘 하고 싶다는 말

그렇게 정해져 있는 말들뿐이니

이곳에서 여태 할 수 없던 말을 해보려 합니다

 

나는 왜 작년 여름의,

비가 발목까지 차오르던 날을 기억할까요

그 명동역 거리는 지난 여름 생에 처음 가본 길이었습니다

호텔 입구를 에워싼 천막과 피켓 앞을 걸을 때면 걸음은 가벼울 리 없었지요

곧이어 건넜던 횡단보도, 이상하게 세상이 넓어 보였습니다

 

이번 늦봄 뜻하지 않게 그 길가를 다시 찾아갔지만

어째서 작년 여름이 더 강렬하기만 했습니다

그 비를 무엇도 이길 수 없나 봅니다

 

나는 또 왜 작년 가을,

내 발끝을 적시던 종각역의 비를 생각할까요

건물 앞에서 내가 남색 우산을 털던 모습

어두운 지하철역 앞에 퍼붓던 비

술에 취한 사람들의 저녁을 시샘했던 마음까지

모두 기억합니다

 

비가 올 때마다 생각하지 않을까요

초조했던 마음들

어디로 향해갈지 알 수 없는 내 삶을 들고

우산을 꼭 쥐던 그 여름

오늘과 그때는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지금은

꿈을 꾸는 기간일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나의 좌절과 숱한 의심이

밤을 이루는 꿈의 재료들이 될 뿐

현실이 나를 즐겁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실까요

어딘가 나를 에워싸던 테두리를 벗어난 순간

더 이상 의지할 곳도, 선생님- 이라 다정히 부를 사람도 없을 때,

그럴 때여서일까요

 

나는 왜 당신께 이 편지들을 보여주고 싶었을까요

 

나는 당신만큼 자라고 싶습니다

10년 후의 나를 생각해봅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결국 기억할까요

초조했던 2022년의 나를

그 발목을 감싸던 빗물의 감촉을

 

어젯밤 잠들기 전

가만히 당신과 여름을 생각하며 이 편지를 시작했습니다

 

이른 답장을 받을 줄 모른 채

 

지켜지지 않는 약속을 붙잡을 때

더 마음에 드는 요즈음입니다

 

언젠가 숫자나 빗방울,

위대한 문장 같은 것들을

함께 앉아 매만져보고 싶다고

 

그렇게 일방적인 약속을 걸어두고 갑니다

 

나는 지친 당신,

존재의 쓸쓸함도 내일없음도

알게 되어 그저 좋은 마음입니다

 

지난 장마의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이요

 

그러나 결국은 또 다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잘 하겠다는 말, 잘 되고 싶다는 말

그런 말들에 갇혀있지요

 

녹지 않은 얼음들이 부딪혀 내는 소리를 듣다가

모래 한 톨 없이 검은 조약돌만 있는 해변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오늘은 혼자 걸어도 괜찮습니다
오늘은 혼자 걸어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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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널리 알려주시고, 하고 싶은 말도 전해주세요.

 


 

그럼 안녕. @applecream 혹은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 말 걸어도 되는 사람.

from 다정함의 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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