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3일, 여섯 번째 편지

from 지우

2023.09.28 | 조회 2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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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의 봉안

PD로 살고 편지를 씁니다.

*김사월의 '프라하'를 들으며 적는 편지

 

벌써 여섯 번째 편지다.

편지마다 색과 결이 달라지는 것도 좋고, 가끔씩 전해오는 답장도 좋다.

 

남색 여름 나시를 입고 책상 앞에 앉으니 스스로 고요해진다.

 

일본식 카레와 감자 샐러드.

냉차가 든 컵에 맺힌 물방울도 보기 좋아

 

달력을 넘기는 걸 까먹었다. 7월.

숫자의 성격을 상상하길 좋아한다

7월, 언제나 얇게 썰은 비누 같다. 민트빛일 것만 같다!

 


 

몰라서 달콤한 말들이 주머니 속에 많았다

좋은 글과 가사를 나눌게. 코너명은 시인 오은에게 빌렸다.

 

나는 가능하지 않은 사랑에 대해 말했고

아끼는 동생 D가 한강의 단편 '파란 돌'을 읽어보라고 했다.

그것은 탁월한 권유였다.

 

먹빛 하늘이 서서히 밝아집니다.

이렇게 푸른빛이 실핏줄처럼 어둠의 틈으로 스며들 때면, 내 몸속의 피도 다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 의지, 내 기억, 아니, 나라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워집니다. 한차례 파도가 밀려나간 사이 잠깐 드러난 부드러운 모래펄처럼, 우리가 여기 머무는 시간은 짧은 순간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문득 당신의 그림이 보고 싶어집니다.

어쩌면 시간이란 흐르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때 함께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그 시간의 당신과 내가 빗소리를 듣고 있다구요. 당신은 어디로도 간 게 아니라구요. 사라지지도, 떠나지도 않았다구요. 언젠가부터, 당신과 동갑인 남자를 만날 때마다 세월이 변화시켰을 당신의 얼굴을 막막하게 그려보던 버릇을 버린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신에게 물어도 되겠지요.

거긴 지낼 만한가요. 빗소리는 여전히 들을 만한가요. 영원히 가져오지 못하게 된 감자 생각은 잊었나요. 오래전 꾸었다는 꿈속의 당신, 부풀어오른 팔로 파란 돌을 건지고 있나요. 물의 감촉이 느껴지나요. 햇빛이 느껴지나요. 살아있다는 게 느껴지나요.

나도 여기서 느끼고 있어요.

(한강, 파란 돌 中, 볼드는 내 마음)

 

불가능한 사랑을 시작해볼까.

그것대로 나에겐 즐거운 일.

이건 마치 김사월의 프라하 같은 사랑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결국 한강의 파란 돌 같은 사랑

한 번도 마주하지 못했으나 함께 느끼는 사랑

만약, 이라는 기원도 하지 않는 사랑

그저 그 시간에 살아 있는 사랑

 

그렇게 버티고 걸어가는 7월

불가능을 꿈꿀 수 있어

힘이 나는 사실을, 당신은 알까?

 


 

자, 이제 시 '파란 돌'을 읽어볼 차례

오래 전 읽다 만 한강의 시집을 다시 펼쳤다

시집이 많은 책들에 짓눌려 있었다. 꺼내주는 김에 책상 정리를 했다.

눈길이 닿는 바로 앞에 시집들만 모인 자리를 마련했다. 무언가 넉넉한 기분.

 

제목만 엮어도 시 같지 않니
제목만 엮어도 시 같지 않니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들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 빛나는 내[川]로 돌아가 들여다보면 아직 거기 눈동자처럼 고요할까

 

내 천 자를 생각하다가

몇 년 전 친구가 나에게 해준 말을 떠올렸다

우리의 왼손바닥엔 '시'가 있다고. 시를 쥐고 사는 손이라고.

한번 왼손을 펼쳐보세요, 시가 있을 테니까 :)

 

실은 '파란 돌'을 찾다가 뜻밖의 잎사귀들에 놀랐다.

언제 즈음일까. 아마 19살의 내가 넣어둔 거겠지.

그 시간도 어딘가에 살아있겠지. 사라지지도, 떠나지도 않은 채로.

 

자작나무 잎사귀.
자작나무 잎사귀.

 


 

나를 소개하는 일은 너무 어려워

 

자소서를 쓰고 있다

두려운 커서의 깜빡임과 백지 상태
두려운 커서의 깜빡임과 백지 상태

 

왜 이 회사, 왜 이 직무,

왜 왜 왜 왜 왜

왜 나를 뽑아야 하는지

 

많은 고민 끝에 갈피를 찾아갔지만, 서류부터 탈락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다.

 

머리 아플 때 마이쮸를 왕창 입에 넣는 나쁜 습관.
머리 아플 때 마이쮸를 왕창 입에 넣는 나쁜 습관.

 


 

자격 있는 노래

상당히 자주 듣습니다. 다양하게 듣고, 많이 듣고. 들은 만큼 씁니다.

 

엘리엇 스미스를 들었다. 역시 이 노랠 혼자 듣는 건 무척이나 좋고, 해롭습니다.

 

이상하고 눅눅한 냄새가 나는 새벽

잠들기가 싫어 새벽 세 시가 다 될 때까지 머리를 쥐어 뜯었고

결국 다음 날 엉망진창의 낮잠을 자게 만들었고

이제 이런 멍청한 짓은 그만 해야지 다짐하면서

또 새벽으로 간다

 


 

습관은 한결같다.
습관은 한결같다.

 

감사를 세어볼까요

열 손가락이 다 접힐 때까지

 

열 손가락

 

모두 접힐 만큼 당신을 만나볼 수 있을까요,

 

당신의 존재가 존재의 쓸쓸함이

내 다섯 손가락에 걸리는 날이 올까요

 

답장을 기다릴게요

 

저번처럼요. 저번처럼만.

 


댓글과 공유는 글쓰기를 지속할 큰 힘이 됩니다 :)

널리 널리 알려주시고, 하고 싶은 말도 전해주세요.

 


 

그럼 안녕. @applecream 혹은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 말 걸어도 되는 사람.

from 다정함의 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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