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6일, 여덟 번째 편지

from 지우

2023.09.28 | 조회 2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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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의 봉안

편지 쓰는 일이 좋은 PD.

오전 6시 반이면 눈이 저절로 떠지는 요즈음

안타깝게도 나는 늦은 새벽 잠들고

중간 중간 몇 번이고 깬다

무엇을 기다리기에 무엇을 바라기에

눈을 뜨게 되는 걸까

 

책상 앞 벽에 덕지덕지 붙여둔

십수 장의 사진들이 하나 둘 떨어진다

테이프의 접착력은 기한이 일 년인가봐

 

오전 9시 아침 스터디, 단골 고객에게 내어주신 선물
오전 9시 아침 스터디, 단골 고객에게 내어주신 선물

 

어쩐지 습도가 낮은 날이다

매일 아침 향하는 카페에서 '또 오셨군요'라는 눈짓으로

나를 반기는 직원의 얼굴

다정함을 오늘도 누적하고

 

할머니집, 베란다 나란히 선 화분들이 좋아
할머니집, 베란다 
나란히 선 화분들이 좋아

오랜만에 나의 사랑스런 할머니

 

집으로 돌아갈 때

12층 창문에서 손을 흔드는

그 장면이 내게 올 때마다

기억해본다, 두 개의 손짓이었을 시절을

 

또 떠올려본다, 지난 5월 마지막 손짓을 보았을 때

그때보다 나는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나

 

대단지의 풍경을 바라보며

잇몸 사이 사이 맴도는

말할 수 없는 나의 절망 나의 희열 나의 환희

 


 

친구와 우스꽝스러운 셀카를 주고 받고

말도 안 되는 바램을 노래하고

얼룩이가 골목에 찾아 왔는지 두리번거리다

 

조용히 당신과 대화하는 날들

 

이대로 견딜 수 있을까

가을까지는 그럴 수 있을까

 

편지도 단숨에 쓰는 나는

워낙에 참을성이 많지 않은걸요

 

떨어진 열매를 찍고 싶었어 아침이면 많은 게 사랑스럽나보다
떨어진 열매를 찍고 싶었어 
아침이면 많은 게 사랑스럽나보다

 


 

몰라서 달콤한 말들이 주머니 속에 많았다

좋은 글과 가사를 나눌게. 코너명은 시인 오은에게 빌렸다. 

 

여름시들을 읽고 싶어서,

강지이의 시집을 펼쳤다

 

저걸로 샐러드를 만들 수 있을까? 대교에서 얼어붙은 바다를 바라보는 꿈을 자주 꾸었다 굳이 시키는 사람이 없는데도 무언가를 기다렸다 얼어붙은 물속엔 초록 잎사귀들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그게 예뻐서 언젠가는 저걸로 샐러드를 해 먹어야지, 그래야만 한다고 늘 생각했다 그렇다면 도끼를 가져올게 저걸 깨뜨려서 네게 줄게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나는 아니라고 했다 이건 그렇게 해결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결국 도끼를 남기고 떠났고 나는 그 도낏자루들을 분리해 의자도 만들고 대교를 더 튼튼하게 정비했다 의자에 앉아서 얼음 안에서 궤도를 그리며 돌아가는 잎사귀들을 망원경으로 매일매일 바라보았다 나는 이제 바라보는 것만 할래...... 이제 그만 돌아다니고 싶어...... 보통 이렇게 되면 국면 전환을 위해 너는 얼어붙은 바다 위를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뿐히 걸어온다 그리고 얼음 속에 갇힌 잎사귀가 아닌 흐르는 물 속에서 헤엄치는 잎사귀들을 내게 건넨다 이제는 샐러드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로 끝날 것이나 나에게 너는 사실 영영 없는 것이 당연하고 그게 그렇게 아쉽지 않다 왜냐하면 샐러드는 있잖아, 꿈에서 깨어나 만들어 먹으면 된다 그런데 만일 네가 있다면 네가 너 자신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날들이 많길 나를 굳이 구하러 오지 않아도 되는 날들이 당연하길 누군가의 당연한 행복을 이상하게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어? 응. 왜냐하면 나는 이미 대교에 불을 지르고 깨어난 지 오래되었다 여름 샐러드, 강지이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를 버무린 플라타너스 잎사귀의 맛을 상상해

그렇게 미끄덩거리며 입안에서 부유하는 여름을

 

아니면 자작나무도 괜찮을 것 같아
아니면 자작나무도 괜찮을 것 같아

 

여름 샐러드를 먹으면서

흰 눈이 쌓인 운동장을 함께 달리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고, 또 있었더라도

우린 앞으로 잘 달릴 수 있다

그런 믿음은 이상하게도 잘사라지지 않는다.

 

_작가의 말, 강지이

 

이제 나는 당신이 없어도

겨울을 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더 이상 대교에서 얼굴이 벌게질 때까지

얼어붙은 표면을 바라보지 않는다

여름이 손에 닿지 않아, 라고 말하며 울지 않는다

 

대신 나는,

흰 눈이 쌓인 운동장을 달리려 한다

 

꿈에서 깨어나 내 손으로 샐러드를 만들고서

 

얼음 속에 봉안되어 있는

철지난 여름을 올해의 것으로 만들면서

 

이상하고 단단한 믿음으로

잘 달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자격 있는 노래 

상당히 자주 듣습니다. 다양하게 듣고, 많이 듣고. 들은 만큼 씁니다.

 

전진희의 새 노래 노랫말사소한 이야기를 소개하려다가,

아니다, 이 앨범은 모든 트랙을 들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내 부탁을 꼭 들었으면 좋겠다!

내가 평론가가 된다면 전진희론을 쓰겠어요

아 아니다 김동률론 아 아니 이영훈론 곽진언론 박현서론도

 

어쩌면 삶이란 건 사랑하기 위해서 /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 아닐까 

 

이어서 다른 노래들도 듣고 싶다면

 

전진희, Breathing in July

생각의 여름, 다섯 여름이 지나고

생각의 여름, 비둘기호

생각의 여름, 습기

 

아차, 7월이지 하며

Breathing in July를 듣는다

내 단편영화를 생각한다

 

수박을 씻는 장면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면이었다

 

벌써 2년 전이구나

나는 당신이 이 곡을 꼭 들었으면 좋겠다

만일 당신의 여름이 내가 기대하는 여름과 같다면

적막을 좋아한다면

 

여름다운 것을 찾아다닌다

생각의 여름, 들은 지 오래됐다

다섯 여름이 지나고.

정말로 다섯 여름이 지났다

내 얼굴엔 그늘이 드리웠고

사람은 누구나 상실을 경험한 순간

그 나머지 삶은 애도의 과정이 되지

그러나 아름다워졌고 푸르러졌고

때론 창백해졌고

환해졌고 그늘이 졌다

 

미운 만큼 애정해서

비둘기호를 타고

경치를 보다가 졸면서 잊어야 하는 것들도 있지

기차를 타고 멀리 멀리 가고 싶다

습한 날들이다

우리의 고민과 한숨이 섞인 습기라면

기꺼이 너를 위해 잔을 비워내고 싶은 여름밤이다

 


 

열린 일기

요즈음의 생각을 나눌게

 

쓰기 위해 응시할까요

응시하기에 쓰는 걸까요

 

편지를 쓰기 시작한 후로 온몸의 감각은 더 활짝, 열렸습니다

 

찜통의 옥수수 냄새와 꽃들 사이 방울토마토

귓가에는 남미의 노래가 흐르고

잠시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너무나 생활스러운 풍경, 차의 경적 소리

잠시 숨이 막혔습니다

 

이곳, 결국 내가 사는 곳입니다

 

이끼가 눈에 들어왔다, 어렸을 때는 자주 관찰했었구나
이끼가 눈에 들어왔다, 
어렸을 때는 자주 관찰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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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널리 알려주시고, 하고 싶은 말도 전해주세요.

 


 

그럼 안녕. @applecream 혹은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 말 걸어도 되는 사람.

from 다정함의 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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