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8일 새벽 2시 22분.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많은 이들이 보는 편지에 조금 우울한 이야기를 남겨도 되는 걸까
그러나 이것마저 나의 진짜 이야기
지금 많이 무너진 것 같아. 어제의 여파로 순식간에.
아마 잠들지 못하는 밤의 시작은
불행이 멈추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지, 작년 봄이었을까
지금 순간 순간의 결정으로 나의 미래가 결정되면 어떡하나
내 작은 머리로 만들어낸 결과물들이 너무 보잘 것 없어서
그들이 비웃고 휙, 넘겨버릴까봐 겁이 난다
근거 없는 자신감
기백
그런 게 중요하다는 세상인데
오늘 밤만 쪼그라들어도 될까요
나는 나인데
나의 가치를 잘 모르겠습니다
잠이 오질 않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마취 주사 삼아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인턴시절 시작된 족저근막염은 또 다시 나를 찾아와 괴롭힌다
발의 통증이 멈추질 않아서, 눈을 감아도 잠들 수가 없다
후회 모음집을 적어볼까
엊그제 라면 먹고 자지 말 걸 그만 좀 먹을 걸
발 약한 주제에 플랫슈즈를 신지 말 걸
슬픈 장면 보면서 펑펑 울지 말 걸 그립고 미운 기억들 떠올리지 말 걸
기껏 다 배운 바이올린 그만두지 말 걸
기타를 계속 쳐볼 걸
너무 기대하지 말 걸 배려없는 이에겐 말을 걸지 말 걸
하지만 우습게도
모든 마주함을 후회하지는 않는구나
왜일까
숨 막히듯 울어도 후회하지 않는 게 있다면
그렇다면 이젠 칭찬 모음집을 적어볼까
일주일 내내 스터디를 제끼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일어났다
쉬는 시간 없이 온종일 할 일만 했다
최선은… 다했다
수요일엔가, 아침엔
웃으면서 달리는 사람을 봤어
나이가 그리 적지 않았던 것 같아
어린 소년이나 지을 법한 미소로 그는 달렸다
웃으면서 달리는 것
그는 나를 지나갔지만 나는 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무엇을 향해 달렸던 걸까
어떤 걸 품고
오전 8시 20분 즈음
편의점 앞에는 늘 검은콩 두유팩과 담배를 든 남자가 있다
카페에 다다를수록 거리가 구워지는 냄새가 난다
노릇하다
때로는 아침에 거리를 걸을 때
수영장 소독 냄새가 나면 좋겠어
백수린의 장편소설이 나왔대
이번에도 다정하겠지
그 여름의 빌라는 잘 있을까
파스칼 메르시어 선생님의 소식을 들었다
오직 그의 소설 때문에
떠났던 리스본
내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수평선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만 했던 반도의 끝
아 너무 먼 시간을 지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을 떠난 그분의 역사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구나
휴지 한 장 줍기에도
작은 기도를 올리기에도 힘든 순간엔
좋은 문장을 찾아 심폐소생술 해야겠지
잠시 메모장을 뒤적거리겠다
칼국수가 나왔다. 나는 칼국수를 먹는 인회 언니를 보았다. 붉디붉은 양념으로 버무린 배추김치를 척척 얹어 칼국수 면발을 후루루룩 사정없이 빨아들이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그것이 그녀가 차선으로 택한 음식임을 모를 것이다. 언니의 이마와 콧등에 땀이 송알송알 맺혀갔다. 언니는 안경을 벗더니 스웨터의 소맷귀로 얼굴을 쓱 문질러 닦았다. 내가 보기에 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최선을 다해 선택하고 최선을 다해 포기하고 최선을 다해 먹고 최선을 다해 땀 흘리는 사람. 인회 언니와 보낸 그 겨울 동안 나는 맑고 쨍한 호수를 누비며 헤엄치는 새끼 은어가 된 기분을 느꼈다.
낙관도 비관도 없이 의지에 의해 걷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언니, 정이현 中
스무 살이 된 지 한 달이 된 내가 기록해놓은 문장이었다
낙관도 비관도 없이 의지에 의해 걷는 자.
나는 무엇으로 걷는가 무엇으로 걸어야 할까
다만 낙관도 비관도 포기했을 때 아무런 선택지가 없는 줄 알았으나
하나의 선택지가 더 남아있다는 사실에, 조금, 안도를 한다
난 내 주변에
감동도 감화도 분노도 슬퍼함도 부끄러워함도
모두 같은 결로 느끼고 내보일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
실은 우리의 결이 비슷했다고,
숨바꼭질 속 정체를 들킨 사람처럼
내 앞에 나타나주면 좋겠어
말을 걸어주면 좋겠어
나타나주시겠어요?
땀을 흘리며 칼국수와 억센 김치를 먹을 때
함께 웃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
같은 말에 같은 대답을 하고
다른 대답을 하더라도 그것대로 괜찮은
어떤 것도 아니라
이 소박한 글로 겨우 사는
그런 사람들
보고싶은 당신
내 정면에 달력이 보여
애정하는 오래된 CD 플레이어도
반려식물 투끼도
리스본에서 사온 페소아의 '불안의 서'도
읽지 못하는 포르투갈어의 초록색 책들도
내 명령에 따라 다들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어
'당신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인가요?'
나는 그런 질문 앞에서
항상 그런 건 없다고, 늘 같기에, 그래서 지금이라고 답했었다
어쩌면 지금이 아닌 것 같다
그건 과거이기도 하지만
미래일 수도 있다는 거지
전진희의 노래
스위치를 끄는 소리일까 페달을 밟는 소리일까
무엇이건 나는 그 소음으로
그녀의 치는 행위를 상상한다
타인이 나에게 친절할 의무는 없지만
나에게 상처 줄 권리도 없지 않는가
모두 자신만의 싸움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의 내면에서 어떤 투쟁을 벌이고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렇기에 되도록 모두에게 친절하려는 나의 노력은
헛된 것일까 쉽게 버티지 못할 짓일까
내일과 날씨에는 기대를 걸 수 없으니
누군가의 답장에 기대를 걸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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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안녕. @applecream 혹은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 말 걸어도 되는 사람.
from 다정함의 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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