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27일, 열여덟 번째 편지

from 지우

2023.09.27 | 조회 3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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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의 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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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 병 안에 우는 사람이 들어 있었는지 우는 얼굴을 안아주던 손이 붉은 저녁을 따른다 지난 여름을 촘촘히 짜내던 빛은 이제 여름의 무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올해 가을의 무늬가 정해질 때까지 빛은 오래 고민스러웠다 그때면, 내가 너를 생각하는 순간 나는 너를 조금씩 잃어버렸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순간 너를 절망스런 눈빛의 그림자에 사로잡히게 했다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순간 세계는 뒤돌아섰다
 만지면 만질수록 부풀어 오르는 검푸른 짐승의 울음 같았던 여름의 무늬들이 풀어져서 저 술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새로운 무늬의 시간이 올 때면,

 너는 아주 돌아올 듯 망설이며 우는 자의 등을 방문한다 낡은 외투를 그의 등에 슬쩍 올려준다 그는 네가 다녀간 걸 눈치챘을까? 그랬을 거야, 그랬을 거야 저렇게 툭툭 털고 다시 가네
 오므린 손금처럼 어스름한 가냘픈 길, 그 길이 부셔서 마침내 사월 때까지 보고 있어야겠다 이제 취한 물은 내 손금 안에서 속으로 울음을 오그린 자줏빛으로 흐르겠다 그것이 이 가을의 무늬겠다

 허수경, 이 가을의 무늬

 

내 몸에서 여름의 무늬가 점점 엷어지고

가을에 대해 생각하는 일

고통을 동반할지 모르나 어렵진 않습니다.

 

당신의 가을의 무늬는 어떠한가요?

 

말도 안 되게 이 시를 사랑하게 됐어요. 

먼저 떠난 시인의 조그마한 어깨를 안아주고 싶어졌습니다. 

 

병원을 나서는 길 

맺힌 작은 눈물이 슬프지 않습니다

라디오에서는 가을다운 노래가 흐르고

저녁 공기는 알맞고, 내 기분도 가을엔 제격입니다

자두 알러지가 있음에도 마셔본 푸룬 주스 덕에 내 목은 가려워 오고, 

오늘 쌓아둔 할 일을 다 마치지 못할까 걱정하는 건

여전한 하루의 증거입니다

 

누군가의 편지를 기다립니다

이 노래를 들으며,

Against The Wind - Bob Seger & The Silver Bullet Band

 

오랜만에 맘에 드는 곡이에요.

 


 

요즘 일기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스트레칭과 아침밥으로 몸을 깨우고, 운동하러 가는 길. 정말 좋아요.

운동보다는 운동 후의 샤워가 줄 개운함을 기대하며 걷게 돼요.

오전 스터디 후 졸음을 이기는 게 관건이에요.

 

밤 10시, 좋아하는 길
밤 10시, 좋아하는 길

 

오랜만에 밤산책을 했고요.

모든 길에 슬픔이 깃들었고, 그래서 더 아름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전만큼 걷는 게 힘들진 않았어요. 

공기가 참 좋았어요.

미치도록 슬프고, 미치도록 행복했어요!

같은 공간에 겹겹으로 기억을 쌓으려 하는,

좋지 않은 습관 덕입니다. 

 

Wake up my love beneath the midday sun / Alone, once more alone / This Travellin' boy was only passing through / But he will always think of you / One night of love beside a strange young smile / As warm as I have known

 

미나리 봉골레
미나리 봉골레

 

미나리가 들어간 건 왠지 다 좋지 않나요.

푸릇푸릇.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변해가는 나를 발견합니다. 

 

어떤 날에는 누군가의 의중이 너무도 쉽게 읽혀서

어른인 척을 해보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 있는 것만 같아서

조그라들 뿐입니다

 

모든 게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더 노력하는 것 같아요.

100보단 120을 주고, 

더 간절할 때면 200을 건네봅니다

50이라도 받을까봐서.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대부분은 시니컬하고 손 꼽는 일부 앞에 그러한 사람이니까!

 


 

연휴가 온다고 제 일상이 다를 건 없어요. 

금요일엔 할아버지를 보러 가기로 했어요!

 

나는 이 편지를 계속 쓸 작정입니다. 

한 시절이 되어버릴 지금의 가장 정확한 기록이기 때문에.

 

100년이 지나면 혹시 모르죠,

21세기 어느 인류의 생애구술사로, 버릴 수 없는 사료가 되어 

교과서에 실릴지도요?

 

문득 제3의 눈으로 보면

보잘 것 없는 나의 이 하루들이 

빛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가을이니까, 잘 보내려고 합니다

잊을 수 없도록

구태여 노력하지 않아도,

가을이니까,

잘 보낼 것 같아요.

 

봄이냐 겨울이냐의 난제에서 이제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가을의 결말을 아쉬워하는 겨울을 택하면 되겠어요.

봄까지, 가을을 뒤돈 채로 보고 있겠죠.

늘 그랬으니까요.

 

오므린 손금처럼 어스름한 가냘픈 길, 그 길이 부셔서 마침내 사월 때까지 보고 있어야겠다 이제 취한 물은 내 손금 안에서 속으로 울음을 오그린 자줏빛으로 흐르겠다 그것이 이 가을의 무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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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안녕. @applecream 혹은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 말 걸어도 되는 사람.

from 다정함의 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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