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28일, 세 번째 편지

from 지우

2023.09.28 | 조회 2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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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의 봉안

PD로 살고 편지를 씁니다.

사랑하는 손

우리를 살게 하는 사랑에 대해. 혹은 죽게 하는. 제목은 시인 최승자로부터.

 

오랜만에 S를 만났다.

나는 S가 정의내린 애틋함이 좋았고 그 정의를 내릴 때 나를 떠올렸다는 다정한 말이 좋았다.

여름의 더위가 좋았고 산모기의 따가움, 분주한 청설모, 초록색 단풍이 어우러진 산책길이었다.

긴 시간이 지나 찾아간 숲에 두려움은 없었다. S는 10년 후를 생각해보라고 했지만 나는 자꾸만 10년 전을 되짚게 된다.

고요한 슬픔, 그건 언제부터였을까. 생각해본다.

우리가 나눈 변화와 욕망과 정체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이 마음에 들었다.

나의 현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욕망이란 단어를 부정하지 않는 S가 좋았다.

문득 돌아보니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은 사랑이 없었다.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는 사랑이 없는 나는 S가 부러웠다.

S에게 가득 찬 풍성한 사랑의 기운. 그리고 그 아이가 탐구하는 관계와 가능성이 부러웠다.

그러나 S가 말했듯이, 어딘가에서 누군가 날 오래 오래 좋아했다면, 그건 좋은 일이니까.

집에 돌아오는 길, 결국 저녁 먹을 상대를 찾지 못하고 부엌에 앉아 삼순이처럼 비빔밥을 과량섭취했다.

그런대로 즐거웠다.

떠나지 말아달라던 S의 말을 생각한다. 나는 기도한다. S 역시 떠나지 않기를. 우리가 떠나지 않기를.

언젠가 네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 모두 온순하게 망해가기를.

아름다움과 끔찍함 앞에서 우리가 결국 아름다움을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계절감

계절이 비치는 사람

 

여름다운 것들이 좋아

 

포케
포케
양재숲
양재숲
열무 국수 
열무 국수 
시원한 파스타 
시원한 파스타 

 

올해 여름은 여름다운 것들을 챙겨 먹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연어 포케. 열무 국수. 시원한 파스타. 음식들의 채도도, 이름도, 질감도 마음에 드는 걸.

스물 하나, 내가 바라본 여름을 되짚어보니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여름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것은 여름이라는 이름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이름에 걸맞는 시간을 가둬놓고 싶어서 애쓰는 중일지도 모른다. 내가 더럽힌 모든 것들 앞에서 사과 대신 포옹을 택하면 여름의 그 이름만큼은, 그 물기 머금은 글자만큼은 이번 여름을 기억하게 될 수 있을까.

좋아하는 계절을 누가 물었을 때 어김없이 가을이라 말하지만 왜 여름은 늘 끝이 아쉬울까.

(2020.08.17)

 

아직 폭염이 시작되지 않아서일까

올해 유독 여름이 마음에 든다. 여름이라는 이름뿐만 아니라, 그밖의 여름의 것들이.

 

더럽혀진 바닥을 사랑하는 것으로 / 여름은 다시 쓰일 수 있다 / 그래, 더 망가져도 좋다고
더럽혀진 바닥을 사랑하는 것으로 / 여름은 다시 쓰일 수 있다 / 그래, 더 망가져도 좋다고

 

안희연의 열과裂果.

결국 또 다시 더럽혀진 바닥 앞에서 이 시를 꺼내든다

여름은 다시 쓰일 수 있고 바닥을 치우지 않아도 된다, 더 망가져도 좋다.

나의 비천한 욕망이 실은 아름다웠음을 깨닫는 순간. 나의 과수원은 슬픔이란 수많은 그루를 이루고

눈물과 애욕이라는 두 단어는 언제나 짝을 지어 나를 괴롭히겠지.

 


보고싶은 작년 여름.

 

6월의 첫날이면 나루의 June Song을 듣는 전통이 있다.

10대 초반부터였으니 아마 10년은 넘었겠지.

7이란 숫자는 너무 네모반듯하고, 8은 거만해보여. 6이 아무래도 살가운 주황빛이 아닐까.

그래서 여름 중엔 6월이 제일 아닐까.

해마다 반복되는 계절의 루틴을 만들어주었다는 것. 그래서 고마운 노래, 고마운 사람.

 


 

자격 있는 노래 

상당히 자주 듣습니다. 다양하게 듣고, 많이 듣고. 들은 만큼 씁니다.

 

락페 가고 싶다

 

여름이잖아요.

세이수미를 들읍시다.

도시의 피난처를 찾아봅시다. 어딘가에 초록색 물기가 있을 거예요.

우리 어떤 꿈에서 만나면 좋겠어요.

 


 

몰라서 달콤한 말들이 주머니 속에 많았다 

좋은 글과 가사를 나눌게 (코너명은 시인 오은에게 빌렸다)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_시작 메모. 기형도. (1988.11)

 

Y와 통화 중에 발견하고 사랑에 빠진 문장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고통과 절망의 거리를 걷는 나를. 우린 결국 믿음을 따라 걷는 자들. 정해지지 않았으나 정해진 발걸음들.

 


 

나의 더럽혀진 바닥처럼
나의 더럽혀진 바닥처럼

 

능소화가 떨어지니 알겠습니다.

여름, 더럽혀져도 충분히 괜찮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멀리있는 나의 동반자여, 당신은 여름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열기와 습기, 끈끈한 땀방울과 망설임과 수치를 지나

입동立冬에 만납시다

그렇게 약속할게요. 단, 이번 겨울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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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널리 알려주시고, 하고 싶은 말도 전해주세요.

 


 

그럼 안녕. @applecream 혹은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 말 걸어도 되는 사람.

from 다정함의 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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