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30일, 네 번째 편지

from 지우

2023.09.28 | 조회 2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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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의 봉안

PD로 살고 편지를 씁니다.

오늘(23.06.29)은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써보려 해

 

손톱이 길면 때가 잘 끼는 것처럼

더듬이를 곤두세우면 거슬리는 게 많지

 

나는 밤늦게 Y에게 징징거렸고

 

Y는 내 삶을 이루는 즐거운 일과 힘든 일 중에서

즐거운 일의 함유량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했다.

 

즐거움의 함유량.

함유량이 낮아도 그것을 충분히 음미한다면 풍부해질 수 있다.

물론 음미가 어렵다면, 함유량을 양적으로 늘리는 방법도 있다.

 

행복의 음미(savoring).

 

편지를 쓰면서 즐거운 일을 돌아보는 이 시간도 음미가 아닐까

 

나는 원체 행복을 음미하지 못하는 사람이지.

행복을 누리기보다는 들뜬 나를 가라앉히려 애쓰는 쪽이다.

 

더 음미해보자.

 

꾸역꾸역 눈을 뜨고 스터디에 갔더니

스터디원이, 존경하는 우리(=나만의 내적 친밀감에 기반한 수식어) 선생님과

짧은 대화 속에서 나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고 한다.

문득 반가웠다. 살갑고 유쾌한 아침의 시작이었다.

 

집에 돌아와 발을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 입는다.

비 오는 날 홀로 책상에 앉아

젖지 않은 채 듣는 빗소리가 좋다.

 

자꾸만 여름의 맛들을 되짚는다.

음, 오늘은 냉모밀을 먹을까,

시원한 국수가 먹고싶다는 생각을 한다.

자두도 사과도 복숭아도 알러지가 있어 먹지 못하지만

물기 묻은 자두를 손에 쥐고 싶다.

 

하이쿠를 읽으면서

단맛이 나는 퍽퍽한 도넛을 먹고 싶다.

 

울지마 울지마 나를 다독이는 일, 지속한다.

오늘 한 번도 울지 않았다는 건 내내 나를 다독였다는 것

 

'그래 그래 울지 말고 말해봐'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근데 울지 않아도, 그저 울먹거려도 당신들은 그 말을 할 거잖아. 허공에 반문한다.

 

비가 그쳤다

 

날씨와 배달비와 메뉴 선택 때문에 고민하다가 결국 시킨 냉우동.

맛도 식감도 맘에 들지 않아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었어

우습지 않니. 냉우동을 따뜻하게 만들었다는 게.

 

함께 온 소스가 품은 매운 겨자의 맛

오. 먹는 동안 널 떠올리지 않았다

밥을 다 먹고 정리할 때 즈음 그런 생각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했다. 결국 생각한 것이지.

 

페퍼톤스의 'fine'을 듣는다

비 오는 날에 빗소리가 녹음된 노래를 듣는 건 왜일까

귀를 막아도 열어도 주룩주룩 들릴 따름.

 

시집의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

아, 오늘은 박은영의 시를 읽다 잠에 들어야지.

 

시인의 말을 읽는 건 딴 짓으로 제격이지

그녀가 어머니께 두부처럼 건네겠다는

하늘색의 시집을 펼쳐들고 잠시 떠올린다

오래 전 중환자실의 기억들.

그 기다림이 얼마나 중한지 당신도 아신다면,

나는 더 절박하게 시를 읽어보겠다 다짐한다

 

머리가 참을 수 없이 지끈거려 알람을 맞추고 낮잠.

기가 막히는 꿈을 꿨다

그것은 내 욕망을 괴기하게 엮어 만든 꿈이었다

 

아휴, 또 자책이야 자책

 

아무래도 당신을 사랑하는 건 모양새가 이상하지요

혹은 이상적인 일이지요

꿈꾸는 거니까요.

 

아무래도, 라는 말 자주 쓴다고 지적을 받았었는데.

 

아무래도 당신과 빗소리를 들으면서

쌀국수에 동동 뜬 피쉬볼을 먹고 싶어요

피쉬볼-쇠똥구리-눈덩이 내 의식의 흐름은 그렇게 흘러 가고

스노우볼 효과처럼 굴려 굴려 커지는 마음

 

난 지금 계속 헛구역질을 한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그간 쌓아둔 쓸데없는 낱말들이

모두 쏟아져 나오려 하나봐

분노 슬픔 욕 뒷담화 나쁜 생각들

 

그러다가

펜을 주머니에 꽂고 다니는 네가 생각났다.

나는 네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나그네 같다

펜 하나 들고 이 세상에 온,

 

그래 넌 쓰러 온 사람

 

정이 많아 슬픈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제 눈물로 한강을 걸었다는 내 사랑하는 G를 떠올린다.

어떤 일이 있든 그 아이에게 다정함을 건네고 싶다.

오래도록, 성의 있고 싶다.

 

어느덧 오전 12:34

 

내일, 아니 오늘도 비가 오려나요

 

장마가 싫은 나는 그러나

아직 가을을 기대하진 못하겠다

계산법이 바뀌어 한참 어려진 나이는 내 것이라 하기에 어색하고,

 

정다운 사람들, 매만지고 싶은 시간들

분명 내게 있을 테지만 온데간데 없는 것만 같은 늦은 밤

 

우리 마주보고 앉아 먹는, 육회 열 접시를 다 비울 때까지는

살아보자고 약속한다

 

 

휘도가 높은 꿈을 꿀래요
휘도가 높은 꿈을 꿀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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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안녕. @applecream 혹은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 말 걸어도 되는 사람.

from 다정함의 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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