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위 매기기를 좋아하는 한국인답게 마음속에 ‘성북동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후보를 꼽는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일이다. 계절별로 조금씩 변동되지만 요즘 성북동에서 가장 흐뭇한 공간은 성북동 거리 정원이다. 한성대입구역에서 성북동을 관통하는 성북로에 있어 성북동에 방문한다면 반드시 지나게 된다. 한 블럭 정도의 넓은 인도 위에 색색의 꽃이 있고 쉴 수 있는 벤치가 있어 거리 정원이라 불린다. 길을 따라서는 카페나 음식점이 있다. 여기서 선선한 저녁부터 펼쳐지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어른들은 빨간색 간이 테이블에서 치킨을 먹고, 어떤 아이는 씽씽이를 타고, 다른 아이는 그 뒤를 얼굴이 벌게진 채 쫓아가고, 산책 나온 강아지들은 서로 익숙한 듯 인사한다. 이 장면을 볼 때면 아마 어느 누구도 흐뭇한 미소를 감출 수 없으리라. 이것은 해피엔딩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다. 온갖 역경을 거친 주인공이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얼굴의 상처가 아직 있어야 함) 뻔하지만 그래서 더 영화 같은 장면이 성북동에 있다.
문득 이 거리의 10년 후 모습을 생각해본다. 여전할까? 부디 새로운 부모와 아이로 채워지길 바라지만 당장 10년 전만 생각해도 너무 까마득하다. 혼란스럽다. 기술과 혼란은 함께 자란다. 변하는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1960년대 성북동에 살았던 시인 김광섭도 이 질문을 품었다. 김광섭은 1961년부터 5년 동안 성북동에 살았다. 짧은 거주 기간에도 그가 성북동 문인에 빠지지 않는 이유는 그의 대표작 <성북동 비둘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 이후 늘어난 서울의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1960년대 성북동에는 길을 정비하고 서양식 건물을 짓는 택지개발공사가 한창이었다. 성북동에 고급 저택이 들어오면서 부촌으로 변모한 것도 이 시기다. 김광섭은 그 변화의 한복판에서 <성북동 비둘기>를 썼다. 변화의 뒷면은 어둡다. <성북동 비둘기>에는 변화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것에 대한 씁쓸한 감상이 드러나 있다.
김광섭은 성북동 168의 34(현재 성북로10길 30 원익스카이빌)에 살았다. 시에 등장하는 ‘산 1번지 채석장’은 그의 집 너머에 있는 현재 동소문 한신한진아파트로 추정된다. 깎아내린 언덕에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채석장에선 폭약을 사용한다. 추정컨대 폭약 터지는 소리는 북악산을 맴돌아 메아리가 되어 성북동을 울렸을 것이다. 이 소리가 성북동 비둘기와 함께 쫓아낸 것은 무엇일까. 성북동에서 거주하던 주민의 주소와 온기를, 그리고 사랑과 평화를 앗아갔다. 무엇보다 보편적인 것들. 살아있다면 응당 누려야 할 것이 사라지는 상황을 김광섭은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포성이 가능했던 성북동엔 현재 사랑과 평화가 가득하다. 김광섭 시인이 지금 성북동 거리 정원을 방문한다면 어떤 마음이실까. 그때 그 온기를 느끼실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을 기념하여 만든 비둘기 쉼터도 소개해드려야지. 비둘기 쉼터는 거리 정원에서 10분 정도 걸리는 북정마을에 있다. 성북동에서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북정마을에 떠났던 비둘기가 다시 둥지를 틀었다.
원고를 작성하면서 한 기사를 읽었다. 기사에는 “시인은 얼마나 많이 알고 있어야 할까?”라는 질문이 있었다. ‘그래도 많이 알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고 마음 속으로 답했다. 하지만 틀렸다. 프란츠 카프카는 생명과학도 인공지능도 몰랐다. 셰익스피어는 카프카보다 더 몰랐다. 기사에는 “누가 이 바보들을 뛰어넘는 작품을 쓰고 있나”라고 묻고 이렇게 답을 한다. “바보는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것을 안다.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는 것, 추울 때는 집이 필요한 것, 맞으면 아프다는 것, 사람은 사랑받아야 하는 것을 안다.” 모든 것이 넘쳐나는 요즘 어쩌면 우리는 중요한 것을 잊은 건지도 모르겠다. 바쁘디 바빠 중요한 가치가 잊혀지는 요즘 세상에 성북동이 필요한 이유다.
글쓴이. 고운
사진. 돌고돌아 성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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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뉴스레터 너무 좋습니다🕊️🤎 늘 잘 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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