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규의 말줄임표 | 다정함이 능력을 이긴다

💬 TMI.FM의 DJ 강남규 | 변화와 변혁의 시대에 공동체는 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강남규 DJ는 느낌표도 마침표도 아닌 말줄임표로 전하는 이야기, 혹은 말줄임표로 읽을 때에야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지금은 없는 시민]의 저자이자 네이버프리미엄콘텐츠 [토론의 즐거움]을 운영하는 강남규 DJ가 함께 읽고 싶은 웹툰을 소개합니다.

최근 개봉한 <인어공주>를 둘러싸고 디즈니의 ‘정치적 올바름’ 노선이 또 논쟁의 도마 위에 올랐다. 이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어 자료를 찾다가 흥미로운 얘기를 봤다. ‘디즈니 프린세스’ 애니메이션들의 대사를 통계적으로 분석한 2016년 논문에 관한 이야기인데, 1930~1990년대 작품과 2000년대 작품 사이에 ‘여성 캐릭터의 대사 비율’이 크게 달라졌다는 것이 논문의 핵심이다. 여성이 주인공인데도 <포카혼타스>(1995)나 <뮬란>(1998) 같은 영화의 여성 캐릭터 대사 비율은 채 40%도 되지 않는단다.

그러면서 논문은 또 하나의 통계를 제시했는데, ‘여성 캐릭터에 대한 칭찬 대사’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분석한 통계다. 논문에 따르면 과거 디즈니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를 칭찬하는 대사 중 절반 이상이 ‘외모’에 대한 것이었는데, 2000년대 이후부터는 ‘능력’에 대한 대사가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는 거다. 외모에서 능력으로. 분명 아주 큰 진전이다. 근데 이 씁쓸함은 뭐지? 외모가 아니면 능력? 다른 건 없나?

이 씁쓸함을 지울 만한 나름의 대답을 주는 작품이 있다. <슈퍼 시크릿>을 연재했던 이온 작가의 네이버 웹툰 <합격시켜주세용>이다. 지난 2019년 5월 연재를 시작해 이제 이야기의 마지막을 향해가는 중이다. 전작 <슈퍼 시크릿>에서 늑대인간, 구미호 등 익숙한 설화를 차용해 달달한 러브스토리를 썼던 실력 그대로, <합격시켜주세용>에서는 이무기 설화를 가져와 독특한 이야기를 그려냈다. 한국에서 이무기 설화가 활용되는 맥락을 떠올리면 흥미롭게도, <합격시켜주세용>은 이무기 설화를 절묘하게 비틀어 ‘다정함이 살아남는다’(책 제목이기도 하다)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전통적인 이무기 설화는 이무기가 물 속에서 1천년을 수련하면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속담은 바다나 강보다는 하찮은 개천에서도 기어이 1천년을 살아낸 이무기가 용이 됐다는 ‘출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말이다. 이렇듯 이무기 설화는 근본적으로 ‘노오력’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다. ‘참고 노력하면 너도 용이 될 수 있어.’ 한국에서 노오력 담론은 필연적으로 능력주의 담론과 닿기 마련이다. 두 담론이 만나 “노력에 따라 누구나 능력을 키울 수 있고, 능력에 따라 ‘과실’을 가질 자격이 생긴다”는 각자도생의 사회 원리로 재구성됐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온 작가가 굳이 이무기 설화를 택해 ‘다정함이 살아남는다’라는 주제의식을 전하기로 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합격시켜주세용>의 세계관에서도 이무기는 1천년을 수련하여 용이 될 기회를 얻는다. 다만 여기서는 승천에 실패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누군가 승천하는 이무기를 보고 ‘뱀이다’라고 하면 승천에 실패하고, ‘용이다’라고 하면 성공하는 식. 한 번 승천에 실패한 이무기는 다시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이무기가 용이 되면 각각의 강과 바다 등을 다스리는 보직을 맡는데, 바꿔 말해 ‘T/O’가 나지 않으면 용이 되어도 강과 바다를 다스리지 못한다.

<합격시켜주세용>의 이야기는 바로 이 T/O에서 시작된다. 낙동강을 다스리던 용이 어느 날 죽는다. 때 이른 죽음이었다. 후임자를 남기지 못했고, 자리를 채울 용도 없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용들의 수장인 천룡이 대책을 내는데, ‘승천에 실패한 이무기들’이 참여하는 시험을 열어 다시 한 번 용이 될 기회를 주겠다는 것. 아아, 시험이라니. 능력주의가 안 끼어들 수 없는 키워드 아닌가. 시험의 주제는 ‘인간의 이해와 조화’, 그간 인간과 벽을 쌓아온 용들이 인간과 공생하는 새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천룡의 의지가 담겼다.

천룡은 이무기들이 인간 조력자와 함께 시험에 치르도록 했는데, 이 인간은 각 이무기의 승천을 방해한 인간의 후대다. 이무기는 자신의 승천을 방해한 인간에게 대대손손 대물림되는 ‘저주’를 내린다. 이를 ‘업보’라고 부른다. 인간은 자신이 조력해야 할 이무기가 용이 되면 오랫동안 대물림되어 온 업보를 끊을 수 있다. <합격시켜주세용>은 용이 되고자 하는 이무기와 업보를 끊고자 하는 인간이 함께 시험을 치러 나가는 이야기다.

1천년을 건 시험, 합격자는 단 한 명. 말도 안 되게 잔인한 이 시험에 참여하게 된 이무기 ‘바리’가 <합격시켜주세용>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사회성이 부족해 인간 세계에 잘 섞이지 못한다. 이무기들은 각각 하나씩 초능력을 갖고 있는데, 구름을 다루거나 폭풍을 소환하는 다른 이무기들에 비하자면 바리의 초능력은 ‘작은 물방울을 조종하는 것’으로 너무나 허접하다. 무엇보다 바리는 너무 선하고 순진하다. 남들 챙기느라 자기 앞가림은 뒷전이다. 한 용은 바리를 이렇게 평하기도 했다. “깜냥에 비해 오지랖이 넓다.” 이토록 무능력하고 경쟁에 부적합한 바리가 대체 무슨 수로 시험을 통과한단 말인가.

바리의 조력자인 인간 유찬영이 또 다른 주인공이다. 바리와 달리 엄청난 능력자다. 명문대를 나왔고, 온갖 화려한 스펙을 지녔다. 특히 남을 가르치는 능력이 놀랍도록 뛰어나서, 입시 과외만으로 업계 전설 취급 받는다. 그런데 이런 인재가 취업을 못한다.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안정적인 직장’을 갖는 게 유일한 꿈이건만, 중요한 고비마다 장염에 걸리거나 교통사고를 당하는 식으로 미끄러진다. 그의 조상이자 바리의 승천을 방해한 인간 ‘김서방’에게 바리가 내린 저주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능한 바리와 유능한 찬영이 시험을 헤쳐 나가는데, 찬영 입장에선 답답할 노릇이다. 첫 테스트에서 바리가 제대로 말을 못해서 벌써 탈락했다. 그런데 운 좋게도(?) 테스트에 합격한 이무기들 다수가 모종의 사고로 부상을 당해 기권하는 바람에 바리는 보결로 합격한다. 두 번째 테스트이자 본격적인 첫 시험에서 바리는 찬영의 도움으로 수석 합격을 이뤄내고 그 대가로 소원권을 얻는데, 바리가 빈 소원이 이렇다. ‘탈락한 이무기들의 패자부활전을 개최해 달라.’ 경쟁자를 하나라도 더 떨어뜨려야 하는 시험에서 도리어 탈락한 경쟁자들이 다시 시험을 치를 수 있게 해달라는 소원을 빈 거다. 패자부활전 문제도 바리가 출제했는데, 이무기라면 틀릴 수가 없는 문제를 내버리기까지. 경쟁 일변도의 삶을 살아온 찬영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둘은 크게 싸운다.

그러나 이미 예상할 수 있듯이, 바리는 끊임없이 경쟁에서 승리해 나간다. 그의 맹목적인 다정함에 마음을 움직인 누군가가 시험의 단서를 제공하고, 그의 편견 없는 친절함에 덕을 본 누군가가 길을 내주면서. 그의 하찮아 보이던 초능력도 남을 대가 없이 돕는 데에는 충분한 역할을 하고, 그렇게 나눈 배려가 다시 바리의 성장에 보탬이 되는 답례로 돌아오는 일이 반복된다.

결국 그 모든 시험을 지나 최근 에피소드에서 바리는 최종 합격자가 된다. 그간의 시험을 통해 바리도 꽤 단단한 자아를 갖게 됐다. 1천년의 시간을 지나, 마침내 용이 된 바리. 최후의 시험으로 그 대신 ‘액운’을 맞을 사람을 고르도록 요구 받는다. 대상은 바리를 도와온 유찬영, 그리고 바리의 오지랖으로 함께 오게 된 이무기 미리, 그리고 미리의 조력자인 박승희, 마지막으로 바리의 승천을 방해했던 김서방.

바리가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용의 능력을 부여하는 여의주를 깨버리고 액운 자체를 소멸시켰다. 자신을 위해 누구를 희생시키는 선택을 바리는 당연하게도 거부했다. 여의주를 깨버려 압도적인 권능을 잃은 대신, 바리는 다른 선택을 한다. 시험에 참여했으나 용이 되지 못한 다른 이무기들을 그가 다스리는 낙동강으로 모두 데리고 가겠다는 거다. 그 이무기들 모두에게 깨진 여의주 파편을 나눠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이무기들 가운데서 용다운 능력은 제가 가장 한미했을 테지만, 정화는 자신 있으니 이번엔 제가 스승이 되어 이들을 가르쳐볼까 합니다. 이 많은 이무기들이 힘을 모은다면 여의주는 물론이요, 용 하나보다도 더 낫지 않겠습니까.”

<합격시켜주세용>은 이런 이야기다. 디즈니가 ‘외모’의 대척점으로서 ‘능력’을 찾아냈다면, 이온 작가는 ‘외모지상주의’와 ‘능력주의’라는 두 가지 길을 과감히 부정하고 ‘다정함’이라는 길을 개척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바리가 그 모든 시험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디즈니의 대답이 아니라, 이온 작가의 이 대답을 지지하기로 했다. 💬 DJ 강남규 | FB

📻 과나 - 사람이 되기 싫은 곰

직전 연재분에서도 함께 듣는 노래로 과나의 노래를 골랐는데, 이번에도 별 수 없이 과나의 노래를 골라봅니다. <합격시켜주세용>이 이무기 설화를 비튼 것처럼, 작년 개천절을 맞아 공개된 이 곡은 웅녀 설화를 비틀어 만들어졌어요.

평화로운 동물 세계에 어느 날 신이 나타나 인간이 될 동물을 공개 구인(?)하는데, 동물들은 그 누구도 인간이 되고 싶질 않았어요. 동물로 사는 게 훨씬 행복하니까요. 그때 호랑이가 나서서 인간이 되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동물들이 긴장합니다. 호랑이는 탐욕스러워서, 그가 인간이 되면 동물 세계를 불도저로 밀어버릴 것 같았으니까요. 호랑이가 손을 드니 곧 이어 곰이 손을 듭니다. 호랑이의 야망을 자기가 막겠다는 거예요. 왜? “미련한 곰”이니까. 이것저것 재고 간 보는 ‘영악함’ 같은 건 곰에게 없으니까.

곰과 호랑이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로 동굴 속에서 100일 동안 쑥과 마늘만 먹는 미션을 부여 받았는데, 호랑이는 하루하루 죽어갑니다. 쑥과 마늘이 호랑이 입맛에 맞을 리도 없고, 일단 너무 외로웠거든요. 반면 곰은 꽤 괜찮은 동굴 생활을 이어갑니다. 요리를 좋아해서 쑥과 마늘로 이것저것 만들어 먹었고, 부족한 재료는 평소 곰이 그 동안 미련하게 베풀기만 했던 동물들이 몰래 갖다 줬기 때문이래요. 결국 곰이 이겼죠.

인간이 된 곰은 인간 세계에 와서 고된 회사 생활을 이어갑니다. 인간이 되어서도 미련했죠. 그런데 동물 세계와 다른 점이 있었으니, 인간들은 미련한 인간이 있으면 이용해 먹을 생각만 한다는 거죠. 모두가 하기 싫은 장기자랑에 강제로 참여하게 된 곰은 무대 위에서 벌벌 떠는데, 그때 호랑이를 비롯한 동물 친구들이 나타나 함께 공연하며 노래는 끝을 맺습니다. 곰의 미련한 다정함이 그 자신을 구했다는 이야기죠. <합격시켜주세용>과 참 닮아 있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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