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사는 사람들 3

스키퍼 늬우스

2025.04.27 | 조회 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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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항해, 세일링 요트 이야기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쓰다 보니 주절주절 글이 길어져 결국 세 편으로 나누게 되었네요. 오늘은 바다에 사는 사람들 마지막편, 조니와 가이 이야기를 드려드리겠습니다. 

 

엘리트 가족 세일러

멕시코의 갈라파고스, 이사벨라 섬에 도착한 세일링 요트들은 주로 두 군데에 닻을 내립니다. 하나는 섬이 감싸듯 안고 있는 남쪽 만, 다른 하나는 섬이 등지고 있는 동쪽의 돌섬 앞입니다. 호라이즌스 호는 작년과 달리 이번엔 남쪽 만에 닻을 내렸습니다. 새 구경을 하러 섬에 오르려면 남쪽 만으로 상륙하는 게 편하거든요. 고무보트 타고 동쪽 정박지에서 오기엔 거리도 멀고 열린 바다를 돌아 와야합니다.

이번엔 웬일로 다른 배들이 없다며 얼씨구나 남쪽 만에 닻을 내렸지만, 덩그러니 혼자 떠있는 건 좀 심심했습니다. 가깝다고 매일같이 섬에 올라 새 구경을 하게 되는 것도 아니었고요. 배에서 낮잠 자고 수영하는 것도 지겨워질 무렵, 고무보트를 내려 동쪽 정박지 쪽으로 탐험을 나갔습니다.

트래킹할 때 찍어둔 수영 명소를 향해 가는데 맞은편에서 고무보트 하나가 보였습니다. 손을 들어 멀리서 인사를 한 뒤, 그냥 지나갈까 다가가 얘기를 나눌까 망설이며 속도를 늦추었는데, 상대도 올까말까 망설이며 엔진을 늦추는 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 두 고무보트를 묶고 둥둥 떠서 해안으로 밀려나기 직전까지 폭풍 수다를 떨었습니다. 

근처에 닻 내리고 있는 배의 조니와 가이는 멕시코에서 만나는 세일러 치고는 젊은 축이지만 항해 경력이 엄청난 사람들이더군요. 갈라파고스, 마르키즈, 통가, 피지, 인도네시아 등 남태평양 섬들을 건너뛰며 태평양을 건너 일본까지 다녀오는 항해를 세 번이나 했다고 합니다. 이거슨 우리가 막연하게 꿈꾸고 있는 바로 그 루트 아닌가...!

세일링 베테랑들이 여긴 남쪽 정박지보다 이 곳에 닻 내리는 게 낫다고 하자 팔랑귀가 마구 팔랑였습니다. 그래서 호라이즌스에 돌아가자마자 당장 닻을 옮겼죠. 과연 동쪽 정박지가 훨씬 낫더군요. 날씨 때문인 줄 알았던 파도도 없었고, 돌바닥에 체인 긁히는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남쪽 만보다 여기가 낫다는 걸 아는지 알아? 작년에 거기서 바위에 부딛혔거든! 우리도 너희 못지않은 어리버리 세일러들이야." 

그렇게 닻 이웃이 되어 고무보트로 오가며 친구가 되었답니다.

조니와 가이의 배는 50피트 알루미늄 요트입니다. 무게가 가볍고, 충격을 받으면 깨지는 대신 찌그러져 안전한 알루미늄 요트 자체의 장점에 더해, 배가 너무나 깨끗하게 가꾸어져 있었습니다. 선주들의 종특 중 하나가 세상에서 자기 요트가 가장 멋지다는 믿음인데, 지금까지 호라이즌스 호가 최고라던 선주는 방문 후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우리도 남태평양 가려면 그 정도 배가 있어야 하는걸까'라고 하더군요. 

배에서 차리는 저녁식사에도 '대충'이 없었습니다. 알루미늄 용접을 배워 찌그러진 킬과 선체를 직접 수리한다는 여장부 조니는 요리도 보통내기가 아닌지, 스페인식 감자파이에 후식으로 초코쿠키까지 구워 내왔습니다. 누가 봐도 엘리트 세일러들인데 왜 본인들이 어리버리 세일러라고 주장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체 블리스터 하나에도 쩔쩔매고 배에서는 간편요리를 사랑하는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데 말이죠. 

영국인이지만 미국에서 일했던 가이는 조니를 만나 결혼 2년차에 집을 팔고 배에서 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자녀 넷을 배에서 살며 낳고 키워 모두 출가시킨 게 바로 얼마 전이라고 합니다.

뱃머리에는 이층침대가 있는 선실 두 개가 붙어 있었습니다. 원래는 크루 선실이었을 이 곳에서 네 자녀가 지냈다니, 좁지만 각자 자기만의 침대가 있었던 셈입니다. 살룬의 테이블은 아이들 차지이고, 부모는 화장실 딸린 선미 선실을 쓰고 콕핏 테이블에서 주로 머물러 활동 영역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중고 배지만 커스텀 디자인된 배 만큼이나 여섯 가족 지내기에 불편함이 없었을 듯한, 영리한 선택이었습니다.

배를 둘러보는 내내 이 제한된 공간에서 24시간 피부를 맞대며 생활하는 형제자매들의 관계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졌습니다. 문을 쾅 닫고 혼자 숨어버릴 공간조차 없는 배 안에서, 적어도 소통 부재는 없겠구나 싶더군요. 이런 환경에서는 갈등과 화해의 과정이 더욱 직접적이었을 것 같았습니다. 가족의 연대가 큰 만큼 자녀들이 떠난 뒤의 빈집증후군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조니는 이 큰 배에서 빈배(?)증후군을 어떻게 극복할지가 숙제라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네 자녀들은 육지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배와 관련한 일을 하고 있을까, 본인 가정을 이루어 새로운 배로 분배(?)해 나갔을까... 예상 외로, 넷 중 셋이 컴퓨터공학 전공이고 하더군요. 다른 것도 아니고 수학은 기초가 중요하고 꾸준하고 지속적인 학습이 필요한 과목인데 배에서 어떻게...

과목별로 최고의 교과서를 선정해 홈스쿨링을 하고 함께 책을 많이 읽었다는 조니와 가이는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을 심사숙고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수학과 과학은 싱가포르 교과서를 구해 가르쳤다는군요. 아이들은 본인이 원해서 일 년 가량 육지에서 학교 생활을 해 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경험해 봤으니 이제 됐어."라고 하고는 홈스쿨링 시스템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생활을 해 보고 싶었고 경험해 좋았다, 하지만 학교가 너무 엉망이다' 라며...

배에서 산 지난 세월을 돌아볼 때 가장 만족스러웠던 부분도 자녀들 교육이라고 했습니다. 형제자매 넷이 '한 배를 타고' 항해를 하며, 협동해 고난을 극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누리고.. 말 그대로 어깨를 맞대고 성장하는 경험은 배에서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에서 하는 홈스쿨링이 어쩔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좀 더 적극적인 교육 방식일 수도 있음을 깨달았죠. 결국 중요한 건 어떤 의지를 가지고 어떻게 하냐의 문제인 것이었습니다. 

며칠전 '소년의 시간'이라는 넷플릭스 시리즈를 정주행했습니다. 요즈음 청소년과 온라인 세계를 따라가지 못하는 부모, 권위가 무너진 학교의 위기를 다룬 영국 드라마입니다. 보는 내내 조니와 가이의 아이들이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통제가 안 되는 학교나 정글같은 SNS 세계 등 부모의 노력으로 개선이 불가능한 위험에서 아이들을 보호할 길이 많지 않은데, 배에서 키우는 것도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요. 


ps: 올 가을 조니와 가이의 네 자녀 중 막내가 한국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온다고 합니다. 기숙사 경쟁이 높아 집을 찾고 있다고 하니, 혹시 구독자님 주변에 연세대 근처 하숙이나 자취방 세 놓으시는 분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이사벨라 섬 남쪽 만을 바라보는 언덕의 푸른발 부비새와 선주
이사벨라 섬 남쪽 만을 바라보는 언덕의 푸른발 부비새와 선주

easysailing.kr 을 리뉴얼했습니다. 편하게 한줄 소식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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