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지난 주에 이어, 이번 항해에서 만난 '뱃사람' 친구들 사연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배에서 태어난 남자
몇주 전 뉴스레터를 썼던 반데라스 베이 기억하시나요? 미어터지는 그링고 관광객과 지나친 개발로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곳이었지만, 두 가지 좋은 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혹등고래를 원없이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린 고래들이 떠나기 시작하는 시기에 갔는데도 정말 많더군요. 선체를 통해 고래들이 짖는(?) 소리를 듣는 것도 그 곳에서는 매우 흔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또 한가지 장점은 세일링하기 좋은 바람이 부는 곳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반데라스 베이에 처음 도착한 날도 그랬습니다. 화창한 하늘, 다소 강했지만 돌풍이 없고 일정한 바람, 6노트가 넘어가는 (호라이즌스 호에게) 다소 높은 속도에 긴장을 놓지 못하면서도 "야.. 이건 굿 세일링이다." 라는 감탄이 절로 나오더군요.
반데라스 베이에 닻 내리고 지내던 어느날, 오후 해풍을 타고 포일foil 서핑을 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얼핏 보기에도 정말 속도가 빨랐습니다. 서퍼는 날개를 노련하게 조작하며 닻 내린 배들 사이를 요리조리 다니다 호라이즌스 호 가까이에도 왔습니다.
"완전 멋져효! 진짜 빠르네!!"
목청껏 소리 질러 칭찬해 줬더니 한번 더 호라이즌스 호 근처로 돌아와서는,
"이거 포일이라 그래!" 하고는 쿨하게 날개를 돌려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누군가 고무보트를 타고 호라이즌스 호에 접근했습니다. 어제의 서퍼인데 그냥 인사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이 친구의 이름은 크리스찬이었지만, '어느 나라 사람이니?'라는 질문에는 난처해하며
"난 어느 나라 사람도 아닌 것 같애." 라고 답하더군요.
엄밀하게 따지면 부모님이 미국인이고 특별히 다른 국적을 취득한 것도 아니니 미국사람이지만, 미국에서 산 경험도, 미국 문화의 영향도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네 살부터 배에서 살았기 때문에, 사실 육지 인간과는 다른 삶을 살아왔습니다. 학교는 당연히 다니지 않았고, 교류하는 사람들도 가족 아니면 배에서 만난 사람들 뿐인 인생, 상상이 가시나요?
본인이 배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생각 자체가 없는 시절부터 배 생활을 하다, 18살이 되어 "난 배가 진짜 싫어. 난 여기서 나갈거야!"라며 육지에 갔다고 합니다. 한번은 육지 여자친구가 세일링 요트를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걸 보고는, "그거 우리도 할 수 있는데?" 라며 작은 배를 하나 산 이후로 다시는 육지에 돌아가지 않았다는군요. 부인과 열 살 아들과 함께 사는 지금 배가 그 뒤로 여덟번째 배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크리스찬은 부모님과 함께 80년대부터 리버보드 생활을 하며 전 지구의 바다를 누볐다고 합니다. 지금은 반데라스 베이가 이렇게 됐지만 옜날엔 정말 멋진 곳이었다, 지금은 닳고 닳은 관광지가 되어버린 카보 산 루카스의 정신없는 마리나가 옛날엔 닻을(충격!) 내리던 곳이다 등 재미있는 얘기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관광객이 폭증한 뒤 여행이 옛날의 여행이 아니게 되었듯, 세일링 요트가 많지 않던 시절 세일링은 정말 다른 이야기였나 봅니다.
크리스찬의 배는 카타마란인데, 멀리서 봐도 뭉뚝한 크루즈용 카타마란과 달랐습니다. 평생 모노헐만 타다 처음으로 빠른 카타마란을 시도해 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무서워서 배를 바꿀 생각이라고 합니다. 바람과 비슷한 속도로 항해하고, 파도를 타고 내려가는 대신 다음 파도의 봉우리로 '점프'한다니, 말만 들어도 오싹하죠?
모노헐 세일링요트로는 온갖 상황을 다 겪고도 '그래도 괜찮음'을 확인한 경험치가 있는 반면, 카타마란은 '괜찮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아도 직접 겪어본 적이 없어 무서운 건 어쩔 수 없다고 합니다. 제가 낯선 선종의 호라이즌스 호로 항해를 시작했을 때 느꼈던 두려움도 같은 종류였나보다 생각했습니다. 호라이즌스 호 항해 마일리지가 늘어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음'의 데이터가 쌓이는만큼 두려움이 줄어드는 것 역시요.
호라이즌스 콕핏에서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던 크리스찬은 깜짝 놀라며 "지금 출발하는건가?" 하더니 황급히 고무보트를 타고 돌아갔습니다. 그날 크리스찬의 아들과 옆 배 아이가 딩기를 타고 10해리 떨어진 도시에 가기로 했다더군요. 동력도 없고, 언제라도 뒤집힐 수 있는 작은 배라 크리스찬이 카타마란으로 에스코트할 예정이었는데, 아빠가 늦자 먼저 출발해 버렸나 봅니다.
크리스찬이 돌아가 닻 올릴 준비를 하는 사이 아이들은 노란 세일을 올리더니 금새 반짝이는 수평선 너머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나 같았으면 아빠 기다렸을텐데...
이탈리아의 친한 친구 중에도 어린 시절을 아버지, 삼촌 등과 함께 전세계 바다를 항해하며 보낸 친구가 있습니다. 육지 인간이 가지지 않은 장점이 매우 많지만, 성인이 되어 육지 생활을 하기에 어려움이 있었겠다 싶은 바다인간의 특징들도 많이 보였죠. 삼형제 모두 오프쇼어 레이서, 조선소 사장, 해양 다큐멘터리 감독 등 바다와 관련된 직업을 가진 데에도 그 제약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크리스찬의 경우 육지로 돌아가지 않고 평생을 바다에서 살고 있는 케이스인데요, 모르는 배에 와서 '그냥 인사하러 왔다'고 한 것부터 보통의 육지인 세일러들과 달랐던 점이었습니다. 본인이 바다 생활에 만족해 하고, 즐거운 대화 내내 실례가 될까하는 마음에 끝내 묻지 못했지만 크리스찬은 본인의 인생에 이토록 큰 영향을 준 부모의 결정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을까, 본인이 원했다면 다른 대부분의 사람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할까 등의 질문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다음 뉴스레터에서 소개해 드릴 조니와 가이를 만나고 어느정도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네 자녀를 배에서 출가시킨 부모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께요.
편안한 일요일 되셔요.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