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트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헤레쇼프

클래식 요트 좋아하시나요

2025.07.06 | 조회 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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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퍼 매뉴얼

바다, 항해, 세일링 요트 이야기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프랑스 영화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 보셨나요? 눈부신 지중해를 배경으로, 질투에 사로잡힌 주인공이 부자 친구를 요트에서 살해하고 신분을 훔치려는 이야기입니다. 진수되는 요트에 딸려 올라온 시신이 발견되며 결국 범행이 들통나죠. 햇살 가득한 갑판, 하얀 세일, 물살을 미끄러지듯 가르는 요트는 영화에서 미남 배우 알랭 들롱 못지 않은 미모를 뽐냈습니다. 이 배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또 하나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이 영화를 리메이크한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에서도, 마찬가지로 멋진 클래식 요트가 인상 깊게 등장하죠. 

지중해를 항해하다 보면 이렇게 아름다운 클래식 요트들을 만나기도 하는데요, 길게 물 위로 뻗은 뱃머리와 배꼬리, 낮고 우아한 곡선의 선체와 그 위로 솟은 거대한 세일이 특징입니다. 그 매혹적인 자태의 시작점에 한 천재가 있습니다. 요트의 역사를 새로 쓴 디자이너, 내서니얼 그린 헤레쇼프Nathanael Greene Herreshoff입니다. 

오랜만에 전하는 스키퍼 매뉴얼, 이번엔 재미로 읽는 클래식 요트 이야기입니다. 요트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이걸 처음 생각한 사람이 이 사람이야?” 하는 반가운 발견이 있으실 거고, 기술적인 내용이 낯선 분들도 100년 전 아름다운 클래식 요트 사진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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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가득히, Johan Anker 60ft
태양은 가득히, Johan Anker 60ft
리플리, Philip Rhodes 42ft
리플리, Philip Rhodes 42ft

 

요트의 역사를 통틀어 한 사람의 이름이 이토록 깊이 새겨진 적이 또 있을까요? 헤레쇼프(1848~1938)는 MIT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지만, “배 만드는 법은 학교에서 배우는 게 아니라 피와 땀으로 익혀야 한다”는 말을 남겼죠. 열여섯 살 때 이미 첫 보트를 직접 설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길이 항상 순탄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늘 요트 디자인의 고정관념을 깨는 이단아였고, 수많은 좌절과 환호를 동시에 겪었습니다.

이 글은 헤레쇼프가 남긴 수많은 설계 중에서도, 요트 역사를 바꾼 몇 척의 배를 따라가보는 작은 항해 기록입니다. 각각의 요트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안에 어떤 기술적 아이디어가 숨어 있었는지, 그리고 그 흔적이 지금의 요트까지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아마릴리스: “너무 빨라서 실격!” 

아마릴스. 이미지 출처 https://www.yachtingworld.com
아마릴스. 이미지 출처 https://www.yachtingworld.com

헤레쇼프가 이름을 제대로 알린 건 1876년, 필라델피아 센테니얼 박람회 부대행사로 열린 레가타에서였습니다. 그의 25피트 카타마란(쌍동선) 아마릴리스Amaryllis를 본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레이싱 요트는 단동선, 그러니까 크고 묵직한 모노헐이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마릴스는 가느다란 선체 두 개를 연결해 놓은, 무슨 괴짜 기계처럼 보였거든요.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아마릴리스는 다른 배들을 압도적인 속도로 제쳐버렸습니다. 지금이야 쌍동선이 더 빠르다는 것이 상식이지만, 당시만 해도 말도 안 되게 생긴 배가 결승선을 먼저 통과하자 사람들은 경악했습니다. 그리고 주최 측은 "공정성"을 이유로 실격을 선언했습니다. 규정에 없는 배라는 이유였죠.

이 황당한 해프닝은 헤레쇼프가 얼마나 시대를 앞서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미 그때부터 카타마란의 가능성을 보고 있었던 것이죠. 

 

글로리아나, 딜레마, 알파: 레이싱 요트를 재정의하다

딜레마. https://iscc.marinersmuseum.org/watercraft/dilemma/
딜레마. https://iscc.marinersmuseum.org/watercraft/dilemma/

아마릴리스 해프닝 이후, 헤레쇼프는 1891년과 1892년에 걸쳐 세 척의 기념비적인 보트를 연달아 선보입니다. 글로리아나Gloriana, 딜레마Dilemma, 그리고 알파Alpha가 그 주인공이죠. 이 세 척의 요트는 그야말로 현대적인 레이싱 요트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이전에는 레이싱 요트와 크루즈 요트의 경계가 모호했습니다. 무거운 가구와 호화로운 실내를 갖춘 집 같은 배들이 레이스에 나섰죠. 헤레쇼프는 글로리아나(21.4m)를 설계하며 실내를 최소화하고, 금속을 적절히 혼합해 무게를 줄였습니다. 무엇보다 혁신적이었던 것은 얇고 깊게 내려오는 핀 킬fin keel과 그 끝에 무게를 집중한 것이었습니다. 배 무게 60%를 킬에 집중시켜 무게중심을 극단적으로 낮추니 요트의 안정성이 극대화되고 속도가 비약적으로 올라갔습니다.

딜레마(11.38m)는 핀 킬의 잠재력을 한층 더 끌어올렸습니다. 킬 끝에 어뢰 모양의 납덩이(토르피도 벌브torpedo bulb)를 다는 실험을 감행했고, 이는 현대 레이싱 요트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알파는 얕은 수심에서 올릴 수 있는 센터보드centerboard를 적용하고, 크루의 체중을 중심 잡는 데에 활용하는 등 파격적인 실험으로 이목을 끌었습니다. 이렇게 헤레쇼프는 요트 디자인의 상식을 하나씩 무너뜨리며, 레이싱 요트를 다시 정의했습니다.

 

릴라이언스: 아메리카스컵을 바꾼 규칙

릴라이언스. https://en.wikipedia.org
릴라이언스. https://en.wikipedia.org

헤레쇼프의 천재성은 아메리카스컵에서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1893년, 그는 뉴욕 요트 클럽의 의뢰로 아메리카스컵 디펜더 요트를 설계합니다. 강철 프레임과 청동 합금 킬을 가진 비질런트Vigilant가 탄생했고, 야심차게 도전장을 내민 영국을 상대로 여유 있게 승리를 거두며 아메리카스컵 방어에 성공합니다. 이후에도 그는 총 6척의 디펜더 요트를 설계해 1920년까지 무패 신화를 이어갑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전설적인 배는 1903년의 릴라이언스Reliance입니다. 릴라이언스는 당대 모든 요트 디자이너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준 괴물이었습니다. 수선 길이(선체가 물에 닿는 길이)는 27.4m, 선체 길이는 43.5m에 달했으며, 세일 면적은 무려 1,500m². 뱃머리에서 붐 끝까지 길이는 60m에 육박했습니다.

특히 배가 기울어질 때 선체 측면이 잠기며 수선 길이를 확장시키는 설계는 경기 규정의 허점을 파고든 영리한 접근이었습니다. 수선 길이가 길수록 배가 빠를 가능성이 높아지죠. 혁신적인 개념이었지만, 당시엔 상상할 수 없는 꼼수처럼 보였습니다. 릴라이언스는 압도적인 속도로 도전자를 따돌렸지만, 기존의 경기 규정으로는 더 이상 공정한 경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결국 헤레쇼프는 ‘유니버설 룰Universal Rule’을 공동 개발했고, 이 룰은 1905년부터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릴라이언스는 단순히 우승만 한 게 아니라, 요트 레이싱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놓게 되었죠.

 

작은 배들의 진화

Herreshoff S Class. https://www.ussailing.org/
Herreshoff S Class. https://www.ussailing.org/

헤레쇼프는 모노타입Monotype 요트, 즉 모든 배가 동일한 규격과 디자인을 가진 클래스의 가능성에도 주목했습니다. 공정한 경쟁을 통해 오직 스키퍼의 전략과 크루의 기량만이 승패를 가르는 레이스의 장을 열고자 한 것이죠. 1919년부터 1941년까지 95척의 S-클래스 모노타입 요트를 진수했고, 다수가 지금도 현역으로 항해 중입니다. 이 작고 날렵한 보트들은 훗날 J/70, 멜지스 24 등 요즈음의 모노타입 레이싱 요트 디자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답니다.

헤레쇼프는 구조 해석을 수학적으로 계산해 설계에 반영한 최초의 디자이너 중 한 명이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이 경험에 의존하던 시절, 그는 프레임, 마스트, 돛대의 강도를 정밀하게 계산해냈고, 덕분에 가벼운 금속 마스트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흔히 쓰이는 마스트 트랙 시스템 역시 그의 발명품으로, 세일을 쉽고 빠르게 올릴 수 있도록 한 장치였습니다. 그 전에는 세일을 마스트에 직접 끈으로 묶거나 그루브에 끼워 넣어야 했죠. 세일을 뒷단에 수직으로 재단하는 크로스컷 세일도 헤레쇼프가 고안한 것입니다. 부하를 받을 때 세일이 뒤틀리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죠. 이 밖에도 접이식 프로펠러, 강철 와이어 리깅, 현대적인 윈치 등, 오늘날 세일링에서 당연하게 쓰이는 장비의 거의 모든 혁신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헤레쇼프는 단순히 배를 잘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요트 디자인을 ‘기술’에서 ‘과학’으로 끌어올려, ‘세일링’이라는 스포츠를 과학적이고 정밀한 영역으로 끌어올린 선구자였습니다. 항상 시대를 초월했다는 평을 받았고, 그가 만든 혁신은 현대 요트 디자인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요트를 디자인할 때 레퍼런스로 자주 활용하는 양대 디자이너 중 하나가 헤레쇼프인데요, 시대를 초월한 혁신과 아름다움...이라고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음을 글 쓰면서 깨닫습니다. 새로 알게 된 사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이것도 헤레쇼프가?’ ‘저것도 헤레쇼프였어?’ 싶을 정도로, 말 그대로 현대 세일링 요트를 ‘발명’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더군요.

그러나 개별 기술의 혁신보다도, 바람과 물, 그리고 구조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가장 큰 유산인 것 같습니다. 헤레쇼프의 요트는 모두 아름답지만, 그 안에는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오직 기능에 충실했을 때 비로소 탄생하는 형태의 완벽함, 그 점이 가장 큰 아름다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로드아일랜드 브리스톨에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헤레쇼프 해양 박물관Herreshoff Marine Museum에 가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40여척의 헤레쇼프 요트들이 박물관과 인근 부두에 보존되어 있고, 수백 점의 설계 도면과 모형, 사진 등 방대한 아카이브를 보유하고 있어, 세일링 요트의 역사를 깊이 있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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