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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바다의 암호들

바닷길 신호등 항해등

2024.08.11 | 조회 1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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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퍼 매뉴얼

일요일 오전 9시에 읽는 바다, 항해, 세일링 요트 이야기(격주 발행)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날이 정말 덥군요. 저는 오랜만에 맞이하는 여름이라 괴로움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어쩌다 보니 최근 2년은 브라질과 멕시코에서 겨울을 지내 추위도 피했지만 여름엔 차가운 태평양에서 항해를 한 덕분에 더위 역시 잊고 지냈습니다. 

1년 전 오늘 어디 있었나 기록을 들춰보니, 첫 야간항해로 샌프란시스코 만 앞을 지나던 바로 그 때군요. 전날 밤 늦게 발견한 통신 장비 고장으로 출항이 늦어지고, 강풍까지 만나 잔뜩 겁을 먹은 채 겨우 정신줄 붙잡고 항해를 이어나가던 괴로운 경험. 다시는 야간항해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계기가 되기도 했죠. 항해기 링크 

그보다 1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 2022년 오늘 저는 선선한 밴쿠버에서 항해준비에 한창이었습니다. 선주의 항해를 돕겠다고 비행기 타고 오긴 했는데, 막상 도착해 보니 배도, 배 준비 상태도, 선주의 항해 실력도 의심스러웠던 그때. 우리 둘이서 이 배를 가지고 야간 항해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굳혔습니다. 그래서 다들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오프쇼어 항해로 빨리 건너뛴다는 북미 태평양 구간을 항구마다 들르며 데이세일링으로 주파하겠다는 무모한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북미 태평양에서 데이세일링이 어려운 이유는 특유의 해안 환경에 더불어, 항구 사이의 거리가 상당히 멀기 때문입니다. 출항 뒤 90마일을 항해한 뒤에야 첫 항구를 만나는 구간도 있었습니다. 5노트 속도도 버거운 무거운 요트를 가지고요. 그러다 보니 일몰 뒤에도 도착을 못해 어둠 속에 항해를 한 경우가 몇 차례 있었습니다. 항해 거리가 길지 않았는데도 늑장 부리다 별수 없이 야간항해로 이어지는 경우도 물론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아스토리아를 향해 컬럼비아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때입니다. 

여러 가지 바보같은 상황으로 점철된 이날 항해에서 가장 어처구니 없는 포인트는, 안전을 위해 먼바다에서도 피하려 했던 야간 항해를 하필 복잡한 컬럼비아 강에서 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텅 빈 태평양의 까만 밤바다에서는 작은 불빛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일단 컬럼비아 강 안으로 들어간 뒤에는 좌 우에 육지가 있고 항해 가능한 뱃길의 경계를 표시한 등이 눈앞에 주욱 늘어서 있어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컬럼비아 강 입구 항해 가능한 채널과 신호등
컬럼비아 강 입구 항해 가능한 채널과 신호등

해가 진 뒤의 문제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당연하지만 깜깜한 시야입니다. 채널을 따라 이어진 여러 개의 부이들이 멀리서 같은 불빛으로 보이다 보니 어디를 기준으로 뱃머리를 두어야 할지 알기 쉽지 않습니다. 플로터에서 부이를 하나하나 찍어 몇 초 간격으로 깜빡이는지를 확인하며 목표로 할 다음 부이를 찾습니다. 1초 간격으로 깜빡이는 부이 다음 부이는 2.5초 간격, 그다음은 4초...

어리버리 항해기 중

어둠 속에서 불빛은 보이지만 그 거리를 가늠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러 불빛 중 어떤 것이 우리가 찾는 목표 지점인지 분별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등불의 고유한 깜빡임 패턴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 정보는 해도에 표시되어 있으므로 목표지점 등불의 주기를 파악해 찾아낸 뒤 이를 목표로 삼고 조타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긴장 속에 조타하고 한 사람은 그 옆에서 전자해도를 확대, 축소해 가며 등불 정보를 찾고 길을 안내하느라 바쁜 가운데 또다른 난관이 등장합니다: 

컬럼비아 강의 교통혼잡도 난이도를 높입니다. 보름달이 뜬 하늘을 배경으로 뭔가의 실루엣이 나타나면 긴장이 됩니다. 요트 면허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초딩 시절 구구단 만큼이나 마음의 부담을 안고 외우는 항해등이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물론 소해정(수중 지뢰 제거선)이나 그물을 던지고 있는 트롤 어선과 같은 크리스마스트리 급의 항해등은 망각의 언덕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이지만 최소한 내 앞의 배가 오른쪽으로 가는 배인지 왼쪽으로 가는 배인지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상황은 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 강에서 항해하고 있는데 놀랍도록 큰 선박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어리버리 항해기 중

먼바다에서는 멀리 떨어진 불빛도 일찌감치 발견하고 진로를 점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들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지나칠 일도 없죠. 컬럼비아 강에는 큰 상선들이 많았는데, 검은 실루엣이 나타나 가까운 거리에서 스쳐가기까지의 시간이 매우 짧았습니다. 우리 호라이즌스 호에 비해 속도가 월등히 높으므로 상대 배의 진로를 일찌감치 파악해야 위험한 상황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깜깜한 시야, 혼란스러운 불빛들 사이에서도 상대 배의 방향을 파악하게 해 준 것이 항해등입니다. 

https://www.svb-marine.it/it/guida/luci-di-via-per-barche-a-vela-e-a-motore.html
https://www.svb-marine.it/it/guida/luci-di-via-per-barche-a-vela-e-a-motor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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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는 깜빡이로 다른 차들에게 진로 정보를 주지만, 차선이란 게 없고 사방에서 사방으로 움직이는 배들은 그와 다른 방법으로 다른 배들에게 정보를 줍니다. 

왼 쪽이 뱃머리 오른 쪽이 배꼬리
왼 쪽이 뱃머리 오른 쪽이 배꼬리

운항 중인 배는 뱃머리부터 오른쪽으로 112.5도 각도로 초록색 등, 왼쪽에 붉은 등, 그 둘 사이의 배꼬리 쪽에 흰색 등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록색 빛이 보이면 뱃머리를 우측으로 하고 오른쪽으로 향하고 있는 배, 붉은 색이면 왼쪽으로 향하는 배, 둘 다 보이면 나를 향해 정면으로 오고 잇는 배, 흰 색이면 멀어지는 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항해등은 비행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비행기는 배보다 늦게 발명되어 많은 해양 용어와 시스템을 계승했습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오른쪽(스타보드) 날개 끝에 초록색, 왼쪽(포트)에 붉은색 등을 밝히고 지나가는 비행기를 볼 수 있습니다. 항해등은 왜 스타보드가 초록색, 포트가 붉은색일까요?

여러 이론이 있지만 옛날 배에는 조타수가 스타보드 쪽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가장 논리적으로 보입니다. 상대 배의 스타보드(초록색)가 보이면 조타수가 우리 배를 보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이 쪽을 '안전한' 쪽으로 여겨 초록색을 사용하고, 포트 쪽은 조타수가 반대 편에 있어 시야가 좋지 않아 위험하므로 빨간색을 사용했다는 설명입니다. 

엔진으로 운항중인 배는 높은 곳에 흰색 등을 달고 있어야 하고, 이 흰색 등이 두 개이면 전장 50미터 이상의 큰 배라는 정보도 얻을 수 있습니다. 흰색 등 없이 초록색이나 붉은색 등이 보이면 엔진을 쓰지 않는 세일링 요트가 항해 중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해진 뒤 친구 배의 저녁초대에 가기 위해 고무보트를 타고 있었습니다. 인기 휴양지 카보 산 루카스의 만은 닻 내린 배들로 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친구 배의 앵커 라이트가 좀 이상합니다. 세일링 요트는 마스트 꼭대기에 360도 흰색 등을 밝혀 배가 닻 내리고 있다는 표시를 하는데, 친구 배에는 마스트 꼭대기에 초록색, 붉은색, 흰색으로 삼분 된 주행등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순간, 무슨 일이 생겨 배를 옮기고 있나 생각했지만 배는 움직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니 닻도 내려가 있는 것이 보입니다. 배꼬리에 접근한 우리 고무 보트를 환한 미소로 반기는 친구 배에는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습니다. 

"배에 앵커라이트 대신 주행등 켜있는거 같은데?"

"응, 앵커라이트가 고장나서. 보이기만 하면 되니까 상관없어."

만에 닻을 내린 배는 앵커라이트를 밝혀 다른 배들에게 닻 내리고 있다는 정보를 줍니다. 만 입구에서 기웃거리는 배는 그 안에 있는 앵커라이트를 보고 진입할지 지나칠지 결정하기도 합니다. 이미 배가 많아 여유가 없어 보이면 다른 닻내림 포인트를 찾아가기도 하고, 높은 마스트 위에 앵커라이트를 밝히고 있는 세일링 요트들이 닻내린 만을 골라 들어가기도 합니다. 비슷하게 생긴 배들이 닻을 중심으로 돌아갈 때 비슷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더 안전하거든요. 

초록색, 붉은색과 흰색의 주행등이 보이면 움직이는 배라고 생각하고 그 방향에 맞추어 대비를 합니다. 그래서 주행등을 밝히고 있는 닻 내린 배는 충돌 위험은 피하겠지만 다른 배들의 주의를 요구하는 셈입니다. 고무보트가 오는 상황이었다면 고장난 앵커 라이트에 대해 미리 알려주는 것도 좋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속도를 줄이고 뱃머리 닻 체인을 확인하는 수고는 줄일 수 있었을 테니까요. 

같은 바다 위에 한국 배와 미국 배, 멕시코 배가 동시에 항해하더라도 서로의 메세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항해등은 국제적으로 통일된 규칙을 따릅니다. 항해등을 이해하는 것은 안전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운전 면허 시험의 도로 표지판처럼 요트 면허 시험에서 꼭 외워야만 통과할 수 있는 관문입니다. 아래와 같은 그림을 가방에 넣고 다니며 외우던 기억이 나는군요: 

시험이 끝나는대로 대부분 맘편히 떠나보낸 뒤 면허시험의 추억 정도로 남는 표이기도 합니다. 벼락치기로 쌓은 지식은, 특히나 그 뒤에 사용 빈도가 낮다면, 썰물에 휩쓸려 나가듯 머릿속에서 빠져나가게 마련이죠. 그런데도 바다에서 만날 확률이 극히 드문 수중 지뢰 제거선 등의 선종까지 빠짐없이 외워야만 면허를 주다니 왠지 반감이 일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요즈음엔 상대 배의 선종과 뱃머리 방향을 알려 주는 장비도 널리 쓰이는데 말이죠. 

하지만 바다에서는 언제든 예상 외의 상황들이 펼쳐질 수 있고, 이때 스키퍼는 배와 크루들의 안전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합니다. 첨단 장비가 오작동하거나 극한의 기상 조건에서 제 기능을 못할 때, 바로 이 '불필요해 보였던' 지식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진정한 씨맨쉽이란 단순히 현재 필요한 기술만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는 준비된 자세를 의미합니다. 자, 그럼 구독자님도.. 화이팅!

항해등 퀴즈(플래시 게임)

지난 뉴스레터에서 공지했던 가을 남해 세일링 요트 모임에 대해 유튜브 라이브를 합니다. 오늘 저녁 여섯 시에 시작해서 20분 정도 이야기 나눌 예정입니다.

알림 설정해 두세요: https://youtube.com/live/jcctS6viGKA

유튜브 라이브에서 논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일정과 장소 등을 확정하여 다음주 일요일(8월 18일) 뉴스레터를 통해 최종 공지합니다. 

참가를 원하는 요트들은 미리 신청하세요: https://forms.gle/tirhPtNz1XKDgkEm8

개인참가 신청은 추후 공지하겠습니다. 

채팅창에서 여러분의 의견과 질문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많이 참여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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