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스키퍼 매뉴얼 친구들

2023.12.31 | 조회 261 |
0
|

스키퍼 매뉴얼

일요일 오전 9시에 읽는 바다, 항해, 세일링 요트 이야기(격주 발행)

올해 달력은 마지막 날이 일요일로, 빈 칸 없이 꽉 채워 끝나네요. 구독자님도 2023년, 즐거운 기억들을 달력만큼 꽉 채워 충만한 한 해를 보내셨길 바랍니다. 

저와 선주, 호라이즌스 호는 엔세나다에서 한달을 꽉 채워 보내게 되었습니다. 엔진 문제를 안고 입항했지만 이 정도로 오래 머물게 될 줄은 몰랐네요. 시내에서 알아본 수리 가격들에 아무래도 뻥튀기 냄새가 많이 나서, 한 미국 트럭 기사가 올린 인터넷의 글 하나를 바탕으로 마리나에서 9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디젤 엔진 부란자 수리 공장을 찾아 나섰습니다. 가 보니 이런 분위기였죠: 

고물상인지 공장인지 구분이 어려운 와중에 뭔가 힙한 이 분위기.. 사장은 없고, 오래된 덤프트럭을 연상시키는 백발 스포츠 머리 메카닉과 마티즈를 연상시키는 어린 남자 경리가 공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공장 이름이 엘 치노El Chino인데, 스페인어로 중국인이라는 뜻입니다. 중국인과 상관 없고 단지 사장의 성이었을 뿐이지만요.

사장이 오면 연락을 부탁하며 전화번호를 남겼는데,

마티즈: "이름은 뭐라고 저장하지?"

선주: "엘 치노! (중국인)"

선주의 농담에 공장 안에 폭소가 터졌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늦은 시간, 마티즈의 부재중 전화를 발견했습니다. 이 시간에 웬일인가 의아해하며 전화를 했던 선주가 곧 배꼽 잡고 웃느라 정신을 못 차립니다.

"사장(엘 치노)한테 전화한다는 게 나한테 잘못 했었대 ㅎㅎㅎㅎㅎ"

아, 마티즈...

시간 약속을 하되 지키지는 않는 일관된 사내 문화와, 번번이 필요한 도구를 지참하지 않아 마리나에서 수소문해 빌리게 하는 데에 불안함이 떠나지 않게 했으나, 결국 깨끗하게 부란자 수리를 마쳤습니다. 외국인들 상대하는 메카닉들의 절반 정도 가격에요. 

물론 우리 실력에 엔진 수리가 성공적이었는지 알 방법은 없고, 믿을만한 고문이 와서 봐 주었습니다. 선주와 같은 브라질 출신이지만 미국에 사는 세일러 페르난도인데요, 요즘 우리와 매일 만나 함께 뭔가를 하는 절친이 되었답니다. 브라질에 독재 정부가 공포정치를 하던 시절,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도망쳐 나온 이후 고국에 돌아간 적이 없다는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주인공. 미국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엔지니어로 퇴직한 후, 이제 전업 세일러로 활약 중이랍니다.

엔세나다에서 오래 쉬는 동안 페르난도의 조언으로 배의 이런저런 부분들을 손보고 있습니다. 심지어 고장난 오븐도 고쳐 주어, 크리스마스에는 배에서 칠면조 요리로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어요. 포트브랙에서 만났다가 엔세나다에서 다시 접선한 조반니&희진 커플과, 엔세나다에서 40 킬로미터 떨어진 과달루페Guadalupe의 와이너리 주인 오스카까지 여섯 명이었습니다. 

페르난도가 말하길: 

"난 너희들이 정말 자랑스러워. 보통 와이너리 가면 와인을 가져오는데 너희는 와이너리 주인을 데려왔냐.."

미국 샌디에고에서도 투어버스 타고 방문하는 와인 산지 과달루페. 엔세나다에서 가까운 거리라, 누구나 한번씩은 방문하는 코스입니다. 다만,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투어 프로그램 가격이 만만치 않고, 그렇다고 택시를 대절해도 와인을 마시는 동안 택시기사를 밖에 대기시킨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엔세나다에 온 지 삼주차, 이미 현지화를 마친 우리는 2000원 내고 타면 과달루페 중심가에 내려 주는 지역 버스를 찾아내게 됩니다. 탈탈거리는 버스에서 한시간 넘게 땀을 흘리다 내린 정류장에서 와이너리까지 20분 가량은 흙길을 걸어 올라갔죠.

인적 없는 포도밭 사이 외줄기 길.. 곧 와이너리로 보이는 건물이 보였으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묶여 있지 않은 거대한 개 세 마리가 우리를 내려보다 그 중 곰처럼 큰 검은 개가 언덕을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개들이 짖기 시작하자 누군가 2층 창문을 열어 내려보았고, 우리는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우리의 방문 목적을 바디 랭귀지로 전달하면서요:

평일, 아무도 없는 와이너리에 걸어 들어온 두 명의 동양 방문자들, 게다가 세일링 요트를 타고 항해중이라 하니 재미있었나 봅니다. 홀로 와이너리를 지키고 있던 오스카 할아버지는 36년간 멕시코항공에서 근무했던 파일럿이라 우리와 공통의 화제가 많았습니다. 두 개였던 와인잔은 어느덧 세 개가 되었고, 해가 지자 오스카 할아버지는 우리를 배까지 차로 데려다 준 뒤, 콕핏에서 차 한잔 했습니다. 와이너리 간다더니 와인 대신 친구를 데려온 우리를 보고 페르난도가 재미있어 했죠. 

이렇게 연고 없는 엔세나다의 마리나에 배가 묶인 채 크리스마스를 맞았지만, 친구들과 복작복작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답니다. 엔세나다는 미국 국경 근처, 크루즈선이 기항하는 도시라 썰렁하고 재미없고 멕시코스럽지 않은 도시라고 알고 있었으나, 어디에 있든 얼마나 좋은 친구들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 곳의 느낌이 달라진다는 점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바다 상태가 한동안 좋지 않기 때문에 아마 새해 초에야 출항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스키퍼 매뉴얼 친구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선주의 칠면조 일품요리
선주의 칠면조 일품요리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스키퍼 매뉴얼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4 스키퍼 매뉴얼

일요일 오전 9시에 읽는 바다, 항해, 세일링 요트 이야기(격주 발행)

뉴스레터 문의 : info@easysailing.kr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070-8027-2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