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즌드 어리버리

씨즌드 어리버리 11

사람과 사람

2023.12.24 | 조회 1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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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퍼 매뉴얼

일요일 오전 9시에 읽는 바다, 항해, 세일링 요트 이야기(격주 발행)

포트 브랙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동안 서둘러 남쪽으로 내려오느라 미뤄둔 일들을 하며 배를 준비했습니다.

재료만 사 놓고 미루고 있던 레이지 잭도 설치했습니다. 마스트의 중간 지점까지 올라가 작업을 해야 했는데, 나사를 박는 대신 매듭으로 설치하는 좀 특이한 방법이기 때문에 직접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난생처음 안전줄을 매고 마스트에 올라갔는데, 처음엔 아무 생각이 없다가, 작업 중 손에 든 부품 하나를 놓치니 그제야 갑자기 겁이 확 나더군요. 오밤중에 배추 떠내려가던 순간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손에서 놓치면 영영 다른 세계로 떠나가는 걸 눈으로 좇아야 하는 안타까움... 어쩌면 배 타는 동안 잔잔하게,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늘 가지고 있는 불안함인 것 같기도 합니다. 마스트 올라가는 건 무서웠지만, 레이지 잭이 있으니 이제 세일 내리는 작업이 더 안전하고 쉬워질 것입니다.

존의 진단에 의하면, 우리 배에서 엔진 벨트가 자꾸 얇아지고, 심지어 끊어지는 사건까지 벌어진 이유는 엔진의 알터네이터 풀리가 녹슬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루는 팔 걷고 풀리의 녹을 사포로 갈아내고 깨끗이 청소했습니다. 지렛대까지 이용해 있는 힘을 다해 벨트에 과한 텐션을 준 것도 잘못이었다더군요. 트랜스미션 오일이 새는 고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오일이 너무 묽기 때문일 거라는 의견도 주었습니다.  

출항때 부터 불안불안 안고 온 조타 시스템 문제에도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동안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은 데에는 포트 앤젤레스에서의 부정적인 수리 경험과 무사안일주의의 콜라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멘도시노에서 그 난리를 겪는 내내 '지금 조타대가 어떻게 된다면?' 이라는 무서운 상상에 시달린 다음, 무조건 처음 입항하는 곳에서 조타 시스템은 점검하고 떠나기로 했습니다. 

존은 와이어가 느슨한 것 외에는 특별한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며 손수 와이어를 교정해 주었습니다. 배도 나온 노인이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엎드린 자세로, 그 와중에 선주에게 방법을 가르친다고 중간중간 멈추고 설명도 하면서요. 너무나 불안했습니다. 

"존, 나이도 있고 배도 나온 사람이 그런 자세로 오래 있으면 우리가 너무 불안해..."

괜히 한 마디 던졌다가 엎드린 채 웃음이 터진 존의 혈압이 더 오를 위험만 키웠습니다. 

존은 연료통을 빌려주고 근처 주유소까지 차로 데려다주며 주유를 도와주기도 하고, 리깅에 대한 조언도 해 주었습니다. 배에 대해 잘 아는 존이 호라이즌스 호의 이런저런 문제들을 살펴봐 주니 안심이 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준비는 기상 정보와 그에 따른 항해 계획이었습니다. 포트 브랙에서의 체류가 길어질수록, 여기서 머무느라 지체된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이제 야간 항해를 시작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커져만 갔습니다. 안전한 밤 항해를 위해 해안에서 충분히 먼 바다로 나가야 하는 거리가 있는데, 1박 2일 항로는 아무래도 효율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2박 3일도 좀 아깝고, 컨디션만 괜찮으면 3박 4일 연속 항해가 가장 나은 가성비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400마일 떨어진 샌 루이스 오비스포San Luis Obispo까지 한 타에 쏘는 항로를 이리저리 시뮬레이션 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급발진하는 의욕에 제동을 걸어준 건 장피에였습니다. 샌 루이스 오비스포까지 한 번에 가겠다는 야심(만)찬 계획을 듣더니, 정색을 하고 진심 어린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첫번째 나이트 세일링이면 하룻밤만 하도록 해. 밤에 항해하면 사람의 멘탈이 흔들릴 수 있어. 한번은 내 딸이랑 둘이 항해하는데, 내가 두 시간은 자 둬야 해서 딸이 딱 두 시간 교대를 섰거든. 그런데 얘가..."

특유의 진지한 눈빛을 유지한 채, 귀 옆에 손가락으로 천천히 원을 돌리며 '미쳤다'는 제스처를 잠시 취하더니,

"두시간 뒤에 올라왔더니, 안고 있던 인형을 바다에 버렸다는거야.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까, 바다가 너무 아름다운 곳이라 인형이 좋은 곳을 떠나지 않고 영원히 있을 수 있게 던져줬다고 하더라고..."

그리고는 다시 한 번 귀 옆에 손가락으로 원을 돌렸습니다.

어린 딸을 데리고 대양을 건너며 배를 배달하는 프로 스키퍼 장피에가 하룻밤만 항해하라고 조언을 하니, 우리의 불꽃 튀던 2박 3일 연속 밤샘 항해에의 욕구는 그 자리에서 쉽게 사그라들었습니다.

장피에는 이 지역에서 항해하는 데에 필요한 일반적인 정보부터 멕시코 국경을 건널 때 서류 처리하는 구체적인 노하우까지 그 자리에 한참을 선 채로 알려주었습니다. 항해 정보를 주는 데에 이만큼 열성적인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항해하기 좋은 바람과 바다가 일정 시간 이상 이어지는 웨더 윈도우weather window 예보가 명확해질수록 포트브랙에서 기다리고 있던 우리 배, 장피에의 배와 조반니&희진의 배는 출항 준비를 착착 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내일은 드디어 디데이. 

해가 뜨는 대로 출항해서, 1박 2일 항해로 포인트 아레나Point Arena와 같은, 아직 위험한 구간을 먼바다에서 지나친 뒤, 장피에와 조반니&희진은 샌프란시스코로 들어가고, 우리는 복잡하고 교통량 많은 샌프란시스코 베이를 지나쳐 그 바로 아래의 하프문 베이Half Moon Bay에 가 닻을 내리는 것이 계획입니다.

지도 북쪽, 긴 호수처럼 쑥 들어간 곳이 샌프란시스코 베이. https://www.thehableway.com/fascinating-day-trips-around-the-sf-bay-area-ca/
지도 북쪽, 긴 호수처럼 쑥 들어간 곳이 샌프란시스코 베이. https://www.thehableway.com/fascinating-day-trips-around-the-sf-bay-area-ca/

마지막 날. 

낮게 발사되는 늦은 오후의 햇볕에 눈부셔하며 데크 위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존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존은 한 손엔 블럭, 다른 한 손엔 오일통을 들고 배 앞에 서 있었습니다. 호라이즌스호에 대한 조언을 주고 배를 점검해주는 요 며칠간, 존은 올 때마다 양손에 뭔가를 들고 있습니다. 이번엔 메인세일 리깅 문제에 도움이 될 만한 블럭과, 너무 묽다는 트랜스미션 오일을 대체할 오일이 각각 오른손과 왼손에 당첨되었나 봅니다. 

주유 선착장이 없어 걱정하던 선주가 존의 친절한 제안으로 연료통을 가지고 근처 주유소로 출동한 사이, 나는 데크에 남아 이런저런 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등 뒤에서 다이애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번엔 다이애나도 양손에 뭔가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다이애나가 가져온 꾸러미를 풀어 보니, 존과 다이애나 둘 다 좋아한다는 쿠키 한 꾸러미, 우리가 오디세이 호에서 보고 신기해했던 튜브 LED 조명, 그리고 내 책이 들어있었습니다. 이 여행이 끝날 때까지 내가 책을 받아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아직 다 읽지도 못한 책을 선물한 것입니다. 우리와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던 사이사이, 우리가 좋아하던 것들을 눈여겨보고 기억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호의와 깊은 관심, 내가 선물을 꺼낼 때마다 내 표정을 읽으려는 애정 어린 눈빛, 이 커다란 마음을 담을 만한 그릇이 나에게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책을 다 읽은 뒤 저자 사인과 메세지를 받겠다는 선언에, 그간 무슨 메세지를 쓰고 사인을 할까, 고민이 많았는데, 이 책의 첫 장은 내 메세지 대신, 다이애나의 메세지를 담게 되었군요. 

알레씨아,네 경험과 배움, 성장하는 자신감과 즐거움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그리고 네가 손에 쥐게 된 너의 첫 번째 책을, 그것도 중고로 선물하게 되어 영광이야. 

멕시코, 그리고 그 다음 어딘가까지 항해하는 데에 좋은 바람과 '쿨 헤드'가 함께 하길 바래. 

다이애나 & 존, 

세일요트 오디세이, 

노요 하버, 

2023년 8월 8일 

나한테 줄 책은 싸인해서 여기로 보내줘: XXXXXX, 솔트레이크, 유타 

아참 그리고 스키 타러도 놀러와!

 

내가 쓰려고 다듬어 놓은 문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다이애나에게 선물할 책 첫장에 쓸 계획입니다.

시간이 흐른 후, 딱 다이애나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용기롭고 진취적이지만, 따뜻한 사람.

오늘은 다이애나의 초대로, 오디세이 호에서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다이애나가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정성을 다해 준비한 저녁을 먹고, 우리가 따 온 블랙베리에 아이스크림으로 후식을 먹은 뒤, 호라이즌스 호로 돌아와 출항 준비를 마무리했습니다. 

내일 이른 새벽 떠날 예정이라 인사를 하지 못할 것이므로, 마지막으로 오디세이 호에 작별 인사를 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참새 방앗간이 따로 있을까요, 어느새 우리는 또 배 안에 들어가서 수다를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야기가 통신 장비로 흘러갔습니다. 교통량이 많은 샌프란시스코 베이를 지나는 항로이므로 통신장비는 어느 때보다 중요할 터. VHF 채널 하나를 골라서, 존이 우리에게 송신하고, 우리가 그에 응답하는 라디오 테스트를 해 보기로 했습니다.

호라이즌스 호로 돌아가 테스트를 해 보니, 메세지는 수신하지만 우리가 응답하려고 하면 자꾸 라디오가 꺼지는 문제가 반복되었습니다. 어쩌다 이야기가 나와서 확인을 해 봤기에 다행이긴 하지만, 오랫동안 기다리던 출항이 당장 내일 새벽인데 큰일 났습니다. 이제 코스트 가드에 구조 신청도 못 하게 되는 걸까요?

결국 그 오밤중에 존이 호라이즌스 호로 출동했습니다. 라디오 뒤의 복잡한 전선들을 다 테스트해 보고 설정을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라디오 발신 문제는 충분치 않은 밧데리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AIS(자동 식별 시스템) 신호가 나가지 않고 있다는 문제를 추가로 발견했습니다. 위치, 진행 방향과 속도 등 주변 다른 선박들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도 있고, 다른 선박에 우리 배가 보이게도 해 주는 장치입니다. 우리 AIS로 다른 배 정보는 확인할 수 있으나, 우리 배 정보를 내보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시야가 없는 야간 항해에서 상대 배가 우리 배를 보지 못하면, 충돌을 방지할 적절한 조처를 할 수 없어 위험합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 베이 앞을 밤중에 지나가려면 말이죠. 

존은 이런저런 시도를 해 보며 차트 테이블을 떠나지 않았으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자정이 훌쩍 넘어서 오디세이 호로 돌아갔습니다. 피곤했을 텐데 자기 일처럼 늦은 시간까지 노력해 준 것이 고마웠습니다. 

 

출항

어제 취침이 너무 늦었습니다. 원래 06:00 출항 예정이었으나, 피로가 쌓인 상태로 첫 나이트 세일링을 하는 것보다는 한두 시간이라도 더 눈을 붙이는 게 좋을 것 같았습니다.

조반니&희진 배와 장피에의 배가 출항하는 모습을 보며 기상해, 출항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데 존이 배 앞에 나타났습니다. 평소 기상 시간이 이르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제 해결하지 못한 AIS가 마음에 걸렸나 봅니다. 이번에도 양손에 뭔가를 들고 있습니다. 

"어제 너희 배 전기 테스터가 별로인 거 같아서, 우리 배에 남는 거 하나 가지고 왔어."

우리 배에도 다른 종류의 전기 테스터가 있었지만, 선주는 감사하며 받았습니다. 

"지금 다시 시도해 볼 시간이 없겠지?"

일찍 일어나 다시 AIS 수리를 시도해 보려고 온 것이었나 봅니다. 

계류줄을 풀고 출항하려는데, 아니, 이게, 웬, 배가 앞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RPM을 높이 올리니 엔진이 굉음을 내며 용을 쓰지만 1노트 속도가 겨우 나올 뿐입니다. 그 사이 트랜스미션 오일이 떨어진 것 같습니다.

선주가 급히 아래로 내려가 오일을 채우는 동안 조마조마하게 1노트 추진력으로 다른 배 사이를 피해 마리나를 빠져나옵니다. 마리나 입구 근처 높은 곳에 올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존이 출항하는 우리 사진을 찍는 게 보입니다. 

아련한 어리버리 친구들의 뒷모습, 마지막 순간까지 문제가 있었음은 존도 몰랐음
아련한 어리버리 친구들의 뒷모습, 마지막 순간까지 문제가 있었음은 존도 몰랐음

다른 두 배보다 한 시간 반 늦게 출항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AIS로 위치를 확인하고 VHF로 통신하며 함께 내려가기로 했는데, 우리 AIS는 고장 나 신호 송신이 안 되고, 다른 두 배와 VHF 통신 가능한 거리 이상으로 벌어지지 않도록 빨리 가고 싶은데 배 속도는 3-4노트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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