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버리 항해기

들어가며

2023.06.04 | 조회 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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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퍼 매뉴얼

일요일 오전 9시에 읽는 바다, 항해, 세일링 요트 이야기(격주 발행)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시간이 쏜살같이 흐르네요. 추위, 벚꽃, 미세먼지를 지나 이제 바닷물에 들어갈 수 있는 시즌이 눈 앞에 있습니다. 벌써 6월이군요.

저는 항해 준비를 하고, 출국 전에 북미 항해기 책을 마치기 위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작년과 올해 항해 사이 잉여의 시간, 책을 영문으로 번역해 베테랑 세일러 원어민 친구에게 교정을 받았고, 요즈음엔 열심히 책 삽화도 그리고 있습니다.  

스키퍼 매뉴얼 뉴스레터는 당분간 휴식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책 내용을 교정하고 다시 구성하는 과정에서 앞머리에 '들어가며' 부분을 추가했는데요, 휴식 전 마지막 뉴스레터 내용으로 싣습니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깊고 푸른 바다색, 선체가 물을 가르고 나아가는 소리, 세일을 조절하고 배의 가속을 느끼는 재미, 그리고 외딴 해변에 닻을 내리고 세상과 단절된 듯한 느낌... 언젠가 항해에 대한 글을 쓰게 된다면 이렇게 세일링을 아름답게 시적으로 묘사하는 말로 시작하고 싶었다. 이 항해에서 실제 벌어진 일들은 이와 매우 거리가 멀었지만, 어쨌든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했다는 데에 큰 기쁨을 느낀다.

 

더블 핸드 세일링

미지의 바다를 헤치며 나아가는 도전, 그때 느끼는 흥분과 스릴 때문에 세일링 요트에 매료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나의 경우 아름답고 (대체로) 온화한 지중해를 즐기기 위한 돌체 비타Dolce-Vita 스타일의 세일링이 좋을 뿐, 모험이나 고난의 극복, 목표 달성 등에는 별 관심이 없다.

"이 항로는 초보 세일러들이 더 어려운 바다로 나아가기 전에 경험치를 쌓게 해 주는, 디딤돌 같은 코스야." 호라이즌스Horizons 호의 선장이자 선주가 말했다.
"게다가 우리는 해안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고, 매일 저녁 입항해서 마리나에 계류할 거야."

그 말을 그대로 믿은 나는 수영복 세 벌이 든 작은 캐리어 하나를 들고 캐나다로 날아갔다. 밴쿠버에서 출항해 미국 서부 해안을 따라 남하, 멕시코까지 가는 항해. 만약 내가 합류할 수 없다면 혼자라도 출항하겠다던 선주가 항해의 시작을 원만히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빌린 배가 아닌 만큼 꼭 지켜야 하는 엄격한 일정도 없고, 매일 저녁 입항해 마리나에 배를 묶고 밤을 보낸다면야 별 어려울 일이 없을 항해로 보였다. 기왕 배도 있고 한 달이라는 넉넉한 시간도 있으니 올여름은 북미 바다에서도 바캉스를 즐길 수 있겠구나,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밴쿠버 다운타운 앞바다 펄스 크릭False Creek의 아침이 밝아오자, 나의 '북미 바캉스' 계획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 닻 내림 구역은 지중해에서 배 타다 온 사람의 상상력을 가볍게 뛰어넘는 환경이었다. 함께 항해할 동지인 선주가 세일링 경험이 충분치 않은 초보자라는 사실 역시 명확해졌다.

더블 핸드Double-handed 세일링은 직역하면 '두 손 세일링'으로, 단 두 사람이 승선해 세일링 요트를 조종하는 것을 말한다. 여태까지 내가 해 본 더블핸드 세일링 비슷한 것이라면, 프로페셔널 스키퍼의 요트 딜리버리에 끼어 본 경험 정도였다. '깍두기 크루' 정도로 승선했다가 어느 순간 '짐짝'으로 돌변하더라도 서로에게 아무 부담이 없는, 마치 스키퍼 입장에서는 싱글핸드Single-handed 세일링(혼자서 요트를 조종하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는 형태였다고나 할까. 이번 항해는 선주와 나 두 사람의 더블 핸드 세일링이었다. 그중 한 손은 지중해 밖 항해 경험이 거의 없는 돌체비타 세일러이고, 다른 한 손은 수영, 자전거, 달리기로 140.6마일을 완주하는 철인이지만 세일링 실력은 무척 소박한 초보 세일러. 둘 다 노련한 세일러 콘셉트와는 거리가 멀었고, 이 더블 핸드 세일링은 마치 더블 왼손 세일링 같은 느낌이었다.

 

한쪽 왼손

나는 이탈리아에서 슈퍼요트를 디자인한다. 어쩌면 대단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이 정도의 대규모 프로젝트는 한 사람의 디자이너가 아니라, 특정 기술에 특화된 여러 전문가들에게 역할이 세분화되어 주어진다. 그렇기에 나처럼 특별한 세일링 경력이 없는 사람도 내 영역에서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다. 나는 요트의 외형과 선내 레이아웃을 포함한 전체적인 디자인 콘셉트를 만드는 일을 주로 담당한다.

어린 시절부터 화려한 세일링 경력을 가지고 있는 전천후 요트 디자이너의 전통적인 개념과 나는 상당히 다르다. 내 경우, 요트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인턴십을 시작하기 전에는 심지어 세일링 요트에 발을 디뎌 본 경험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입사 초창기엔 회사에서 세일링 교육 코스에 보내거나 프로페셔널 스키퍼들이 배를 딜리버리 하는 항해에 나를 끼워 넣어 배울 수 있게 지원하고, 나도 남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소양을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덕분에 값을 매길 수 없는 지식과 경험을 얻을 수 있었지만, 배의 전반적인 시스템에 대해 총체적으로 배우기보다는 주로 특정한 측면에 치우친 정보를 주로 얻게 되었다.

항해기를 쓰고 이 여행을 되돌아보면서야 비로소, 이 특수한 배경으로 인한 두 가지 성향이 이번 항해에 잠재적인 위험 요소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첫째, 내가 처음 세일링을 접한 환경이 지중해였다는 점. 지중해에서의 세일링은 즐거움의 요소가 압도적으로 크고, 주로 놀이나 휴가의 형태로 인식되기 때문에 세일링이라는 스포츠에 다소 편향된 인식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내가 주로 참여하는 요트 프로젝트들은 신중하기보다는 실험적이고, 특히 간편한 조종을 우선하는 성향이라 더더욱 이런 인식이 강화되기 쉬운 환경이었다.
두 번째는 좀 더 개인적인 이유인데, 나는 스키퍼의 의견에 토를 달지 않고 맹목적으로 따르는 경향이 있다. 프로페셔널 스키퍼와 나 사이의 넘사벽 실력 차이로 인해, 미심쩍은 점이 있어도 자신 있게 의견을 표현하지 못하던 것이 세월이 지나며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이 습관은 어리버리 선주와 함께 한 이번 항해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사실, 제때 적절한 의심을 했다면 바로잡을 수 있었을 선주의 작은 실수들이 큰일로 번졌던 데에는 나에게 책임이 있다.

게다가 나는 배를 직접 소유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배 운용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다. 선주는 요트 정비와 운용에 대해 배웠고, 저명한 블루워터 세일링 협회에서도 교육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힘을 모으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다른 왼손

선주의 세일링 첫 경험은 평범과는 거리가 멀다. 바람 별로 없던 날, 친구 요트를 타다가 즉흥적으로 바다에 뛰어들어 배 옆에서 한참을 수영하며 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날의 ‘배 옆 바다 수영’에 큰 매력을 느낀 선주는, 철인 3종 경기 선수로서 열린 바다에서 수영할 도구로 요트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데이세일러(일일 항해에 사용하는 작은 세일링 요트) 정보를 얻으러 밴쿠버 보트쇼를 찾았다가 우연히, 요트에서 생활하며 세계를 항해하는 블루워터 세일러 커플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이들은 선주를 자신들의 요트에 초대했다. 매력적인 클래식 디자인과 나무로 된 아늑한 인테리어에 마음을 빼앗긴 선주는, 그날 이후로 그 배의 모습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크레이그리스트Craiglist(당근마트 류의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같은 기종의 요트를 우연히 발견했다. 보통 크레이그리스트에 요트가 올라오는 일이 흔한 건 아니기 때문에 호기심에 한번 배를 보러 갔다고 한다. 은퇴한 노인인 배 주인은 이 요트를 타고 멕시코까지 항해했고, 그 항해담에 매료된 선주는 그 자리에서 배를 구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요트를 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갑작스러운 자이빙으로 붐이 격렬하게 휘돌면서 시트가 풀리고 물에 빠져 프로펠러에 엉켰다. 이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이 초보 세일러가 내린 결정은, 허리에 줄을 묶고 엉킨 프로펠러를 풀기 위해 험한 바다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배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어 뒤로 끌려갔고, 그제야 당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이 사연은 우리가 밴쿠버에서 이미 출항한 이후에야 듣게 되었다.

 

두 왼손의 코믹 어드벤처

그 이후 이어진 이 왼손들의 더블 핸드 항해는 끊임없는 실수와 다양한 문제들로 가득 차게 된다. 하드웨어(요트의 기기적 문제)와 소프트웨어(세일러들의 소양 문제) 둘 다에 총체적인 결함이 있었다.

40년이 넘은 엔진은 항해 내내 우리를 짜릿한 스릴과 서스펜스의 롤러코스터 위에 올려놓았고, 엔진을 고쳐 보려는 시도는 우리를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할 뿐이었다. 엔진 고장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인지 러닝 리깅Running Rigging(세일을 제어하는 장치)도 결정적인 순간에 당황스러운 문제들을 드러내면서 사태에 일조했다.

소프트웨어 문제는 더 복잡했다. 지중해에서는 무슨 비상 상황이 발생하든 가장 가까운 항구나 만으로 피항하는 마음 든든한 옵션이 있었다. 물론 지중해라고 해서 모든 항구가 입항이 쉬운 것은 아니고 특히 악천후에는 더 그렇겠지만, 일단 멀지 않은 거리에 다양한 피항지 옵션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놓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곳 북미 서해안은 항구 사이 거리가 너무 멀고, '입항'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행위조차도 기술적으로 매우 난도가 높았다. 바 크로싱, 조수, 해류 등 처음 경험하는 개념들과 씨름하는 것에 더해, 국경을 넘어야 하는 문제도 더해졌다.

우리는 이 항해를 통해 코스트 가드Coast Guard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고,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새로 구입한 VHF 무전기 사용법을 미처 터득하지 못한 탓에, 코스트 가드와의 부끄러운 교신 내용 전체가 의도치 않게 채널 16번에서 생중계되고 말았지만. 더욱 당황스러웠던 점은, 우리가 코스트 가드를 호출한 날 바다는 평온했고, 유일한 문제점이라고는 우리의 두려움뿐이었다는 사실이다. 푸른 하늘 아래 평화로운 바다, 16번 비상 채널에서 울리는 우리의 긴박한 목소리는 주변 선박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VHF 무전기가 갑자기 원거리 통신을 수신하고 있나, 예외적인 전파 지연이 발생해 과거의 통신이 수신되는 것은 아닌가 의아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밴쿠버에서 출발해 미국 북태평양 연안을 따라 남하, 멕시코 바하 캘리포니아를 최종 목적지로 두고 항해했다. 이 엉뚱한 항해는 시종일관 우여곡절로 점철되었지만, 그 화룡점정은 바로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못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바다 배낭여행자

느긋한 미국 바캉스의 꿈은 곧 모험과 고난의 극복, 목표 달성을 위해 달려야 하는 항해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배와 바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기회를 가졌다. 요트가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요트를 사치스러운 취미로 오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 항해는 소싯적 하던 배낭여행과 비슷한 느낌이다. 밤 기차에서 내려 익숙지 않은 땅에 첫 발을 내딛는 아침, 새로운 문화에 푹 빠지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기쁨, 자유의 느낌과 모험의 순간들,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맥락에서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는 기회. 이번 항해에서 비슷한 즐거움을 만끽했다.

낯선 사람의 친절에 기댈 수밖에 없는 나약함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 또한 배낭여행과 비슷하다. 만약 우리가 안전지대 안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이번 여행에서 만난 독특하고 재미있는 친구들과 인연이 닿지 않았을 것이다.

배낭여행은 등에 모든 소지품을 짊어지고 다니지만 요트를 타고 하는 여행에서는 매일 밤 돌아올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은 중요한 차이점이다. 집과 함께 여행하는듯한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고, 덕분에 전반적인 여행 경험이 안락하고 풍족했다.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항구마다 각 도시와 마을의 분위기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관찰하는 것도 재미있는 포인트다. 미국은 동일한 언어, 동일한 통신사, 동일한 코스트 가드라는 동일한 국가 시스템 안에서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다양한 문화, 사람들과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승선하세요

호라이즌스 호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항해담을 펼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레네요. 글을 통해 북미 태평양 연안 항해 경험담을 나누고 새로운 발견과 모험으로 독자 여러분을 안내하고자 합니다. 재미있는 순간들, 눈앞이 깜깜한 어려움과 도전 속에서의 경험, 배 위에서 생활하며 겪은 다양한 에피소드를 생생하게 전해드릴 것입니다. 요트를 책임지는 사람들이 어리버리해서 왠지 승선이 망설여지나요?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직접 고생하지 않고도 이 여정을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음 시즌 스키퍼 매뉴얼 뉴스레터를 시작하기까지 종종 짧은 '스키퍼 늬우스'로 인사드리겠습니다. easysailing.kr은 간단한 블로그 형식으로 운영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비정기적으로 가벼운 글을 올릴 예정이니 이 곳에서도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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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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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노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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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month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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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답글 (1)
  • 어슬렁

    0
    11 month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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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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