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작품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디테일이 모여서 신용이 되고, 신용이 쌓여서 신뢰가 되고, 신뢰가 커지면 신앙이 됩니다." (넷플릭스 <레이디 두아> 中)

공개 3일 만에 글로벌 TOP 10에 오른 화제작, 넷플릭스 <레이디 두아> 보셨나요? 가짜일지라도 명품이 되고 싶던 여자 '사라 킴'의 서늘한 눈빛을 보며 기시감이 들지 않으셨나요? 한국 콘텐츠 속 '거짓말쟁이'들은 시대의 결핍을 먹고 진화해왔습니다.
오늘은 <레이디 두아>와 소름 돋게 닮은 평행이론 작품들인 <화차>, <안나>, <마스크걸> 속 인물들의 욕망을 단계별로 해부하고, 마침내 '진짜란 무엇인가'를 묻는 소설 <혼모노>까지. '가짜'라는 키워드로 엮인 이 거대한 세계관을 깊이 있게 파헤쳐 봅니다.
밑바닥에서의 생존: <화차>의 차경선

거짓말의 시작은 '결핍'이었습니다. 영화 <화차>(2012)의 차경선(김민희)은 어마어마한 빚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의 인생을 통째로 훔쳤습니다. 그녀의 거짓말은 축축하고 비릿합니다. 펜션에서 피칠갑을 한 채 첫 살인을 저지르던 그녀의 모습은 욕망이라기보다, 제발 살려달라는 처절한 구조 신호와도 같았으니까요. 그렇게 보면 그녀가 진짜 훔치고 싶었던 것은 그저 빚쟁이에게 쫓기지 않고 숨 쉴 수 있는 '평범한 하루'였을 겁니다.
계급 사회에서의 존중: <안나>의 이유미

10년 뒤 등장한 <안나>(2022)의 유미(수지)는 다릅니다. 타인의 삶을 통째로 빼앗은 <화차>와 달리, <안나>는 이름과 학위라는 '보여지는 스펙'을 위조해 촘촘한 계급 사회의 사다리를 오르죠. 그녀는 밑바닥의 생존을 넘어 타인의 '존중'을 원했습니다.
유미는 사람들이 '보여지는 것'만 믿는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간파합니다. 그리고 그 맹점을 이용해 무례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동시에, 신분 상승의 사다리로 거짓말을 남발하기 시작하죠.
디지털 세계에서의 관심: <마스크걸>의 김모미

넷플릭스 <마스크걸>(2023)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주인공 김모미는 낮에는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무시당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밤에는 마스크를 쓰고 환호받는 인터넷 방송 BJ로 활동합니다.
유미가 현실 세계의 '존중'을 원했다면, 모미는 디지털 시대의 익명성 뒤에서 대중의 '관심'을 갈구합니다. 그녀가 마스크를 쓰고서야 비로소 자신감을 갖게 되는 모습은 사라 킴이 가짜 신분으로 위장한 뒤에야 세상의 인정을 받는 아이러니와 정확히 겹쳐집니다. 모미에게 '마스크'는 단순한 도피처가 아니라, 비틀린 꿈을 실현하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철저히 가려진 가짜의 모습이었지만, 그녀에게만큼은 그 순간이 유일한 '진짜' 삶이었을지도 몰라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군림: <레이디 두아>와 <벌거벗은 임금님>

그리고 2026년, <레이디 두아>의 사라 킴의 거짓말은 '권력'이 됩니다. 그녀는 "아무나 살 수 없는 제품"이라는 희소성을 팔아 사람들을 맹신하게 만들죠.
이 지점에서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이 떠오릅니다. 동화 속 사기꾼들은 "어리석은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옷"이라며 허영심을 자극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바보 취급을 당할까 두려워, 보이지 않는 옷을 보인다고 찬양하며 스스로 눈을 가리죠.
<레이디 두아> 속 대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명품이라는 라벨, '유럽 왕실 보증'이라는 가짜 권위 앞에서 사람들은 이성적인 의심을 거둡니다. 사라 킴이 만든 브랜드는 현대판 '벌거벗은 임금님의 옷'입니다. 우리의 불안과 과시욕, '나만 뒤처질 수 없다'는 조바심이 투명한 거짓말을 비단보다 더 고귀한 '신앙'으로 둔갑시킨, 사실상 대중 스스로 공범자가 되기를 자처한 사기극인 셈입니다.
모든 껍데기가 벗겨진 뒤의 실존: 소설 <혼모노>

그렇다면 화려한 거짓말의 옷을 다 벗겨내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요? 성해나 작가의 소설 <혼모노>는 이 질문에 묵직한 답을 던집니다.
소설은 평생 모신 신령에게 버림받은 30년 차 무당 '문수'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신(神)이 떠나버린 뒤, 문수의 세계는 무너집니다. 화려한 작두 위를 걷던 영험함도, 사람들의 운명을 점치던 권위도 신기루처럼 사라졌습니다. 남은 것은 늙고 지친 육체와 '더 이상 영험하지 않다'는 수군거림뿐입니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문득 떠오르는 역설이 있습니다. 신의 기운이 사라진 그 순간, 고뇌하는 문수의 얼굴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진짜(혼모노)'일지도 모른다고요.
신이 있을 때 그는 '진짜 무당'이었지만, 인간으로서는 신의 대리인이라는 껍데기에 불과했을지 모릅니다. 오히려 신이라는 외부의 권위가 사라지고, 발가벗겨진 채 자신의 나약함과 정면으로 마주한 그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문수는 생애 처음으로 고유한 한 명의 '인간'으로 선 게 아닐까요.
에디터의 시선: "너는 너로 살면 돼"

우리는 종종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기를 꿈꿉니다. 화려해 보이는 타인의 삶을 동경하며, 초라한 내 현실을 감추려 사회적 가면을 쓰곤 하죠. 저 역시 그랬습니다.
제 에세이 <그 시절의 이름들>에서 썼듯이, 저는 농담처럼 "한강 작가처럼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단순히 글을 잘 쓰고 싶다는 바람을 넘어, 작가가 가진 명성과 아우라, 세상의 인정 같은 '빛나는 껍데기'를 탐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때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너는 너로 살면 돼. 네가 되면 된 거야."
<화차>의 경선, <안나>의 유미, <마스크걸>의 모미, <레이디 두아>의 사라 킴. 그녀들이 그토록 훔치고 싶었던 '완벽한 삶'은 어쩌면 신기루였을지 모릅니다. 때로는 무력하고 초라해 보여도 내 장점과 단점을 모두 끌어안고 오늘을 살아가는 모습. 그것이야말로 그 어떤 명품보다 값진 '진짜' 내 모습 아닐까요.
가짜들이 판치는 세상, 부디 당신만은 당신이라는 이름의 '혼모노'를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화려한 라벨이 없어도, 당신은 이미 충분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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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성해나, <혼모노> (수록작 '혼모노')
무당 문수의 이야기를 통해 진짜와 가짜의 경계, 껍데기가 사라진 뒤의 인간다움을 묻는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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